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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란의 거리
동업자 딸의 업을 이으려 망국인기 명과 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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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 입내하옵시라는 전교가 곕시오.”
대궐에서의 이러한 급명을 받잡고, 황황히 의대를 갖추는 국태공 흥선대원군 이하응(國太公 興宣大院君 李昰應). 때는 고종(高宗) 십삼년 임오 유월 초아흐렛날. 봄내 여름내 비 한 방울 오지 않아서 온 천하가 타는 듯이 말라붙었던 것이 (오늘 아침까지도 비올 모양도 보이지 않던 날씨가) 갑자기 흐리기 시작하여, 하늘은 먹을 갈아 놓은 듯하고, 주먹 같은 비가 우더덕 우더덕 오기 시작하였다. 바야흐로 악수로 내려부으려고 비를 맞으면서 행차는 뜰안에 착착 정비되었다. 이 행차를 굽어보며, 오래간만에 몸에 걸치는, 대원군의 정장(正裝)을 갖추는 동안, 태공은 감회무량하였다. 현복, 사모, 옥대, 기린흉배 그새 사년간을 의장에 넣어둔 채 한 번도 입어 볼 기회가 없던 이 의대 다시는 입을 기회가 없으리라고 믿었던 이 정장. 왕의 급명으로서 다시 입궐할 기회를 얻어서 몸에 걸치는 동안,(이미 사소한 감동에는 움직이지 않을 만치 늙은) 그의 마음도 공연히 설렁거렸다. “자. 어서 가자.” --- “동란의 거리” 중에서 그것은 내가 ○○사(社)에서 일을 볼 때의 일이니까, 벌써 반 10년이 지난 옛날 일이외다. 그때 ○○사에 탐방 기자로 있던 나는, 봄도 다 가고 여름이라 하여도 좋을 어떤 더운 날 사의 임무를 띠고 어떤 여자를 한 사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기차로 동북쪽으로 서너 정거장 더 가서 내려서도 한 30리나 걸어가야 할 이름도 없는 땅으로서 본래는 사에서도 그런 곳은 가볼 필요도 없다고 거절한 것이지만, 그 전달에 내가 어떤 귀족 집안의 분규를(아직 신문사에서도 모르는 것을) 얻어내어 잡지에 게재하여 그 때문에 잡지의 흥정이 괜찮았으므로 내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허락하였습니다. 사건은 그때 신문에도 다치키리로 한 비극으로 몇 회를 연하여 발표된 주지의 사실인지라, 특별히 방문까지 안 하더라도 넉넉한 일이지만 그때는 마침 다만 하루라도 교외의 시원한 공기를 마셔보고 싶던 때에 겸하여 함흥까지 가는 친구를 전송도 할 겸 거기까지 가보기로 한 것이었습니다(사실을 자백하자면 신문을 참조해가면서 벌써 방문도 하기 전에 기사까지 모두 써두었던 것으로서 말하자면 이‘방문’이란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습니다). 함흥 가는 벗을 기차에서 작별하고 고요한 촌길에 나선 때는 아직 아침 서늘한 바람이 오전 10시쯤이었습니다. --- “딸의 업을 이으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