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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4 [민공閔公(재위 기원전 661∼기원전 660)]
민공 원년 / 민공 2년 / 민공 원문 권5 [희공僖公(재위 기원전 659∼기원전 627)] 희공 원년 / 희공 2년 / 희공 3년 / 희공 4년 / 희공 5년 / 희공 6년/ 희공 7년 / 희공 8년 / 희공 9년 / 희공 10년 / 희공 11년 / 희공 12년 / 희공 13년 / 희공 14년 / 희공 15년 / 희공 16년 / 희공 17년 / 희공 18년 / 희공 19년 / 희공 20년 / 희공 21년 / 희공 22년 / 희공 23년 / 희공 24년 / 희공 25년 / 희공 26년 / 희공 27년 / 희공 28년 / 희공 29년 / 희공 30년 / 희공 31년 / 희공 32년 / 희공 33년 / 희공 원문 권6 [문공文公(재위 기원전 626∼기원전 609)] 문공 원년 / 문공 2년 / 문공 3년 / 문공 4년 / 문공 5년 / 문공 6년 / 문공 7년 / 문공 8년 / 문공 9년 / 문공 10년 / 문공 11년 / 문공 12년 / 문공 13년 / 문공 14년 / 문공 15년 / 문공 16년 / 문공 17년 / 문공 18년 / 문공 원문 |
何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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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시해한 죄는 누구에게 돌아갔는가? 말을 치는 노예 등호락이다. 왜 등호락에게 죄가 돌아갔는가? 장공이 살아 있을 때 등호락이 궁중에서 음란한 짓을 한 적이 있다. 자반이 그를 잡아 채찍으로 때렸다. 장공이 죽자 경보가 등호락에게 말했다. “자반이 너를 모욕한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안다. 왜 그를 죽이지 않는가?” 경보는 이런 식으로 자반을 죽이게 만들었다. 그런 뒤 등호락을 죽여 임금을 시해한 죄를 덮어씌웠다. 공자 우가 왔지만 역시 이 결론을 바꿀 수는 없었다.
--- p.13-14 어디에 성이 있었나? 위나라에 쌓았다. 그런데 왜 위나라를 위해 쌓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위나라는 이미 멸망했기 때문이다. 누가 멸망시켰는가? 적狄이다. 왜 적이 멸망시켰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제나라 환공을 위해 감춘 것이다. 왜 환공을 위해 감춘 것인가? 당시 위로는 현명한 천자가 없고 아래로는 제후를 이끄는 어른이 없었다. 천하의 제후들이 상호 병탄하고 멸망시키는 상황이었다. 환공은 이를 수습할 수 없다면 치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누가 성을 쌓은 것인가? 환공이 성을 쌓았다. 왜 환공이 쌓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제후가 독자적으로 땅을 정하는 것에 대하여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 p.49 누가 성을 쌓았는가? 기나라에 성을 쌓았다. 왜 기나라를 위해 성을 쌓았는가? 기나라가 이미 멸망했기 때문이다. 누가 기나라를 멸망시켰는가? 서徐나라, 거나라가 위협(脅)했다. 왜 서나라와 거나라가 그들을 협박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환공을 위해 피휘했다. 왜 환공을 위해 피휘해야 하는가? 당시 위로는 현명한 천자가 없고 아래로는 제후를 이끄는 어른이 없었다. 천하의 제후들이 상호 병탄하고 멸망시키는 상황이었다. 환공은 이를 수습할 수 없다면 치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누가 성을 쌓은 것인가? 환공이 성을 쌓았다. 왜 환공이 쌓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제후가 독자적으로 남에게 땅을 정해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 p.109 왜 기록했는가? 괴이한 일이어서 기록했다. 자연재해를 기록한 것이다. 큰 가뭄은 재해라고 기록한다. 이번 사건은 가뭄인데 왜 괴이한 현상이라고 기록했는가? 가뭄 기간이 짧고 피해 상황이 있으면 재해로 기록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비가 내리지 않은 시일이 길었지만 재해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괴이한 현상으로 기록했다. --- p.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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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공양경전해고》는 《공양전》에 대한 漢代의 古注를 집대성한 유일한 서적이다. 하휴는 訓?, 章句, 禮樂제도 등의 제방면에 관한 해설을 포함하여 《춘추》와 《공양전》의 의리를 발굴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所傳聞世’ ‘所聞世’ ‘所見世’의 三世이론은 ‘亂世’ ‘升平世’ ‘太平世’의 改制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이외에도 ‘三科九旨’ ‘五始’ ‘六 ’ ‘二類’ ‘七等’ ‘七缺’ 공양철학의 주요개념이 모두 이 책에서 배태되었다. 물론 ‘大一統’ ‘尊王攘夷’를 위시한 중화사상과 만물을 철저히 존비관계에 기반 하여 자리매김 하는 등급적 세계관 또한 《춘추공양경전해고》가 후세 중국인의 사유에 끼친 결과물이다. 이밖에 구체적 역사 사건에 어떤 포폄의 잣대를 적용해야 하는가라는 당위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원시 중국인의 가치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교류는 확장일로에 있다. 호불호와 관계없이 중국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는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다. 따라서 중국학 종사자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중요한 원전을 성실히 번역하여 시민사회에 제공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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