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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보다 그 여인네들의 절실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그들과 나는 어느 하나도 다를 것이 없지요. 우리는 이미 운명에 호되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무릎을 꺾인 사람들입니다. 명분과 도리, 그 미명과 훈계에 밀려 자기 몫의 생애를 송두리째 저당 잡혔지요. 아버지라는, 남편이라는, 아들이라는 하늘이 진동하는 대로 돌풍에 찢기고 뇌우에 쓸려 청맹과니 당달봉사로 땅바닥을 기어야 하지요.
세상에는 어찌하여 이토록 슬픈 여자들이 많은 것인지, 여자들의 슬픔이 넘치는 세상이 과연 정의롭고 평화로울 수 있는지 어리석고 둔한 저조차도 의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조선이라는 남자들의 나라에서 태어나 초라하고 값없는 목숨으로 살아가는 이들, 사라지는 모든 것들과 새로이 생겨나는 것들 전부가 남자들을 위해 만들어지는 세상에서 영원한 그림자로 살아야 하는 여자들, 그들은 얼마나 더 구차하고 힘겨워야 하는지요? --- p.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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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자주 내게 말씀하였지요.
노여워 마시오. 어지러운 정국을 남의 탓으로 돌릴 요량이 없소. 인간사회가 극도로 무질서하다면 그것은 왕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배웠소. 나의 무능이 먼저요. 내가 더 강하지 못한 것이 재앙이요 죄일 뿐이오……. 당신, 그곳에서라도 행여 자책으로 괴로워 마셔요. 당신은 얼마든지 현명하고 어진 왕이 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할아버님인 세종 임금과 아버님인 문종 임금을 꼭 빼어 닮은 당신. 그러나 부왕인 문종 임금은 세상 전부를 사랑하느라 단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할 줄 모르셨지요. 두 번 거듭 결혼에 실패한 아픔이 너무 크셨던지 현덕왕후가 돌아가신 후 다시 아내를 구하지 않으니 당신은 바람막이 구실을 해줄 외척도 섭정도 없이 혈혈단신 권력 투쟁의 회오리에 휩쓸려야 하셨지요. 반면 당신은 세상에 대한 사랑을 전부 잃은 그 순간에도 단 하나의 사랑을 목숨처럼 소중히 품지 않으셨던가요. 거룩한 위업 대신 비천한 사랑을, 만 사람에게 펼치는 너른 애민 대신 오직 한 사람을 향한 깊고 좁은 사랑을. 하지만 어리석은 어느 누가 사랑을 두고 귀천과 미추와 경중을 재오리까? 나는 당신 곁의 마지막 단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어떤 광영과 영화보다 기껍습니다. --- p.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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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김별아 소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
-여성을 넘어 삶의 본질을 향해 시야를 넓히다 『영영 이별 영이별』에서 신체 일부를 간질이듯 짜릿한 불안감을 느낄 정도로 자유로운 성 性을 이야기하던 김별아의 소설을 기대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간 작가가 꾸준히 탐구해온 여성의 성적 욕망과 정체성에 관한 고찰을 위주로 형상화되었던 여성과는 사뭇 다른 여성이 등장한다. 바로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머나먼 유배지로 떠나 결국 죽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던 조선시대 비운의 왕, 단종의 비 정순왕후이다. 작가 특유의 역사적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영영 이별 영이별』은 형벌과도 같은 가혹한 운명에 맞선 정순왕후의 삶을 담담한 어조로 담고 있다. 정순왕후는 조선시대 정치적 격변의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그리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실낱같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평생을 숨죽여 살아야 했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써야만 하는 것은 비단 정순왕후에게만 주어진 짐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남성 앞에 굴종하도록 운명지어진,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할 수 없었던 조선시대 여성이 갖는 공통된 형벌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정순왕후라는 인물이 왕비에서 서인으로, 걸인, 날품팔이꾼, 뒷방 늙은이가 되기까지, 사랑한 것이 형벌이 되어버린 한 여인의 모진 운명을 두고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는 체념적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단종에 대한 사랑이 그녀의 고된 삶을 지탱하게 해준 힘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미실’이 욕망과 본능에 따라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갔듯이, 정순왕후 역시 주어진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이끌어갔다. 그녀에게 삶은 사랑이었고, 사랑은 삶이었으며, 삶은 치욕이면서 복수이면서, 기어이 살아내라는 생명의 준엄한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정순왕후에게 있어 눈앞의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의지는 바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작가는 『미실』에서처럼 본능과 욕망에 충실하여 삶을 개척하는 것도, 인내함으로 삶을 살아내는 것도 모두가 인간 삶의 본질임을 나타낸다.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갖기 위해 몇 년간 캐나다에서 생활할 예정이라는 작가는『영영 이별 영이별』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집필 활동을 중단할 예정이다. 그간 마치 집착하듯 여성의 성 정체성을 끌어안고 있던 작가가 『영영 이별 영이별』을 전환점으로 폭넓은 삶의 본질을 이야기하게 된 것은 놀라운 변신이다. 앞으로 긴긴 침묵의 시간을 두고 다음은 우리 앞에 어떤 이야기를 안고 돌아올지 자못 기대된다. 영도교에 얽힌 단종과 정순왕후의 불멸의 사랑 -맑은내 소설선 그 첫 번째 작품 지난 2003년부터 공사가 진행되어 올해 9월 말 완공 예정인 청계천 복원사업은 600년 역사를 지닌 우리 서울의 문화와 역사를 되살리는 데 의의를 두고 있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맑은내 소설선은 복원된 청계천 다리를 소재로 씌어진 11편의 장편소설이다. 『영영 이별 영이별』을 시작으로 모전교(김용우), 맑은내다리(김용범), 비우당교(김용운), 광교(고은주), 수표교(박상우), 오간수교(서하진), 장교(이순원), 황학교(이승우), 두물다리(이수광), 하랑교(전성태)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맑은내 소설선 가운데 첫 번째로 선보이게 된 『영영 이별 영이별』은 ‘영이별 다리’ 또는 ‘영영 건널 다리’란 뜻을 지닌 영도교를 소재로 씌었다. 영도교는 조선 6대 임금 단종이 정순왕후와 눈물로 헤어져야 했던 애절한 사연이 담긴 다리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길을 떠나던 단종과 부인 정순왕후가 영도교 위에서 눈물로 이별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영도교는 정순왕후가 귀양 가는 낭군을 배웅할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였다.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운의 임금으로 불려지는 단종과 그의 부인 정순왕후. 그들의 애달픈 사랑이 서려 있는 영도교는 아직까지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살아서는 볼 수 없는 영이별을 해야 했던 단종과 정순왕후의 눈물이 서려 있는 영도교를 『영영 이별 영이별』을 통해 미리 만나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