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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005
1부 슬픔이 코 고는 소리 해빙기 010 해루질 012 피아노 레슨 014 피부와 마음 016 풍향 018 풀베개 020 폐문 022 파주 024 파스토랄 026 티후아나 기념품 가게 028 2부 능소화 지는구나 킨츠기 수업 032 키친 034 초생 036 지는 038 중정 040 저수지 휴게실 042 자카르타 044 자전거 버리기 046 원앙 048 양양 050 3부 인간을 관둔 이유는 아마 사랑이었을 거야 습설 054 스웨덴 가구 매장 056 솜털 오리들 058 스탄 게츠 060 사랑의 유람선 061 선릉과 정릉 062 사월 064 사슴농장 견학 066 사랑의 바깥 068 봉합 070 4부 저세상이 있다면야 모르지 복원 074 방공호 076 밤에 레몬을 하나 먹으면 078 믿는 사람 080 물방울무늬와 달빛 082 무주 084 마들렌 086 러시아의 풍경 묘사 088 돌아온 이야기 090 다시 봄꿈 091 5부 이 모든 게 꿈인 줄 모르고 높은 희망 094 나는 096 곶 098 개종 100 개의 마음 102 강릉 해변 메밀막국수 104 감은빛 106 가장 기억에 남는 108 가난 111 가든파티 112 전욱진의 편지 115 Crescent - Translated by Jack Saebyok Jung 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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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대답하는 와중에도
그는 허리를 숙여 개흙을 뒤졌다 대강 보아도 수완이 좋아 보였다 그때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고 내 귀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왼손에 든 랜턴의 빛은 바빠졌다 그 빛기둥이 눈꺼풀을 스쳐지난 순간 어쩐지 살아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고 --- 「해루질」 중에서 그런데 이렇게나 작아지는 걸 보면 마치 사라지기를 바랐던 거 같은데 왜 아주 사라지지는 않을까 그게 나는 항상 의아하고 누군가의 손에 들린 사소한 내 모습도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이 자주 나를 웃게 하고 --- 「피부와 마음」 중에서 같이 좋아하는 음악을 재생하면 이 시가 시작된다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걸까 내가 물으면 이렇게 간단해도 되지 그 사람이 답하고 내 삶은 알몸으로 밖을 배회한다 자긴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고 처음부터 숨긴 적 없다고 --- 「스탄 게츠」 중에서 오염 없이 맑고 환하기 향기 퍼뜨리기 따스하면서 보드랍기 사람은 원하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는 과정을 저리도 투명하게 위잉 위잉 모르는 이와 나란히 앉아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에 놀라워하며 --- 「솜털 오리들」 중에서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이웃이 깨지 않게 느지막이 나지막한 소리를 내기 위해 현을 튕기는 데 쓰는 플라스틱 쪼가리 대신 오른손에 붙어 있는 첫손가락을 사용하여 안에서 바깥으로 부드러운 피부가 하나하나 자아내는 소리를 떨림을 그를 사랑하는 모든 것이 잠든 시간 --- 「물방울무늬와 달빛」 중에서 그렇다고 불가능한 맛을 자아내는 방식은 아니고 매일 아침 직접 기계로 뽑는 메밀국수 가락 정도 그러니까 그저 앞니 아랫니만으로 툭툭 끊어 삼킬 수 있는 정도 그렇게 삼킨다 해도 발목을 적시는 물결의 감촉이 느껴지거나 파도 소리가 귀에 들린다거나 하지는 않는 그러니까 불가능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아닌 이 기분 좋은 단맛은 역시 매실청일 것이다 --- 「강릉 해변 메밀막국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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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장만해놓은 여러 가능성을 지나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식당에 다다른다 방에 에어컨을 설치하기 위해 나이가 지긋한 남자와 여자가 도착했다. 아웅다웅 옥신각신 티격태격 이러니저러니 실랑이하며 기계를 놓으려는 부부는 꿈에서 화자의 부모가 되어 있었다. 오늘 하루도 참 고생 많았다며 둘의 어깨를 두들기고 손발을 주무른다. 여름 지나면 다 같이 여행을 가자기에 여행은 무슨 여행이냐며 심통을 부렸지만 어느 날 저녁 불어오는 바람은 썩 차가워 가기로 한 섬의 모양을 그려보기도 했다(「풍향」). “낮과 밤을 길러 배웅하던 타이가의 침엽수들/수평선과 지평선 구름이 추는 트로이카/은 쟁반 같았던 바이칼 호수의 마음 없음”(「러시아의 풍경 묘사」)처럼, “이 모든 게 꿈인 줄 모르고”(「가든파티」). 현실이 더는 무엇인지 모르겠는 때에 현실은 그냥 한 무더기 저녁이 된다. “잘 삶은 달걀이 정확히 반 개/고추장 양념에 버무린 명태회/잘게 부순 김이랑 얇게 저민 오이/참깨 빻은 것하고 참깨로 짠 기름/살얼음이 뜬 시고 단 동치미 국물”(「강릉 해변 메밀막국수」) 같은 것 말이다. 깊은 밤 홀로 침실을 나와 조용히 식탁 앞에 앉으려고 할 때, 시인은 말한다. “그때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보다 더 작은 어두움”(「스웨덴 가구 매장」)이라고. 겨우 짜맞춘 그릇은 언제나 수업이 끝날 즈음 다시 부서졌다 그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시작한 이가 그곳에 나뿐만은 아닌 듯했다 멍하니 서서 불붙은 건물의 외벽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킨츠기 수업」). 벽난로 속 불꽃이 타오르는 동안 금방 들어온 눈송이들이 죽는다(「습설」). 기다리는 자리에 매달려 있는 것은 마음뿐이고, 우리에게는 아직 더 많은 죽음이 준비되어 있다. 다만 시인은 잠깐 할말을 고르다 이야기를 이어간다. 모르는 누군가가 건넨 그때 그 빵의 맛과 온도에 관해서, 혹은 반쯤 베어 문 절망을 쥐고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 사람의 이야기를. “언제 어디서나 어렴풋한 그늘/누구도 잘 쉬지 못하지만//목에 줄을 매단 채 비틀대며/도로변을 걷고 있는 저 개를/당신이 쓰다듬어주면 좋겠다”(「무주」)는 마음으로. 넌 이런 삶도 좋을 거 같다고 말했다 난 이 한가로운 짐승들을 지나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었던 녀석도 이 가운데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관둔 이유는 아마 사랑이었을 거야 넌 지그시 웃는 얼굴이었고 난 그런 삶도 분명 있을 거라 여겼는데 _「사슴농장 견학」부분 *난다시편을 시작하며 손에 쏙 들어오는 시의 순간 시를 읽고 간직하는 기쁨, 시를 쥐고 스며보는 환희 1. 2025년 9월 5일 출판사 난다에서 시집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시를 모아 묶었음에 ‘시편(詩篇)’이라 했거니와 시인의 ‘편지(便紙)’를 놓아 시집의 대미를 장식함에 시리즈를 그렇게 총칭하게도 되었습니다. 난다시편의 라인업이 어떻게 이어질까 물으시면 한마디로 압축할 수 없는 다양한 시적 경향이라 말을 아끼게 되는 조심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모든 말이 시의 언어로 발산될 수 있기에 시인에게 그 정신과 감각에 있어 다양함과 무한함과 극대화를 맘껏 넘겨주자는 초심은 울타리 없는 초원의 풀처럼 애초부터 연녹색으로 질겼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은 단호함은 있습니다. 2. 난다시편의 캐치프레이즈는 “시가 난다winged poems”입니다. 날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무거움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날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가벼움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바람처럼 꽃처럼 날개 없이도 우리들 몸을 날 수 있게 하는 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랑처럼 희망처럼 날개 없이도 우리들 마음을 날 수 있게 하는 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여 온전히 시인의 목소리만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을 빚어보자 하였습니다. 해설이나 발문을 통한 타인의 목소리는 다음을 기약하자 하였습니다. 난다는 건 공중에 뜰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말이니 여기 우리들 시를 거기 우리들 시로 그 거처를 옮김으로 언어적 경계를 넘어볼 수 있겠다는 또하나의 재미를 꿈꿔보자 하였습니다. 시집 끝에 한 편의 시를 왜 영어로 번역해서 넣었는가 물으신다면 말입니다. 시인의 시를 되도록 그와 같은 숨결로 호흡할 수 있게 최적격의 번역가를 찾았다는 부연을 왜 붙이는가 물으신다면 말입니다. 3. 난다시편은 두 가지 형태의 만듦새로 기획했습니다. 대중성을 담보로 한 일반 시집 외에 특별한 보너스로 유연성을 더한 미니 에디션 ‘더 쏙’을 동시에 선보입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시의 순간”이라 할 더 쏙. 7.5×11.5cm의 작은 사이즈에 글자 크기 9포인트를 자랑하는 더 쏙은 ‘난다’라는 말에 착안하여 디자인한 만큼 어디서든 꺼내 아무 페이지든 펼쳐 읽기 좋은 휴대용 시집으로 그만의 정체성을 삼았습니다. 단순히 작은 판형으로 줄여 만든 것이 아니라 애초에 특별한 아트북을 염두하여 수작업을 거친 것이니 소장 가치를 주기에도 충분할 것입니다. 시를 읽고 간직하는 기쁨, 시를 쥐고 스며보는 환희. 건강하게 지저귀는 난다시편의 큰 새와 작은 새가 언제 어디서나 힘찬 날갯짓으로 여러분에게 날아들기를 바랍니다. [ 시가 난다 WINGED POEMS ] 001 김혜순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002 황유원 시집 일요일의 예술가 003 전욱진 시집 밤에 레몬을 하나 먹으면 004 박유빈 시집 성질머리하고는 005 정일근 시집 시 한 편 읽을 시간(근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