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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5
등장인물 11 1 31 2 83 3 123 4 153 5 191 |
Yuji Sakamoto,さかもと ゆうじ,坂元 裕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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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리 그쪽 어머니라고 해야 하나, 그분이랑 합치시기 전에, 그러니까 그쪽이 태어 나기 전에, 그 이전의 가족이랄까, 그 가족의 아들이거든요, 최초 가족의 아 들, 지금 내가 하는 말 이해돼요?
지카스기 (고개를 갸우뚱한다) 네모리 음, 좀 이상한 표현을 빌리자면, 배다른 형제인데, 내가 형, 그쪽이 동생인 거 예요. 지카스기 아, 아아. 아아 아아 아아. 네모리 응? 이해했어요? 지카스기 책 만드는 사람이다. 네모리 네, 맞아요, 일반적으로는 작가라고 하는데. 소설가거든요. 음, 도쿄에서 온 네모리라고 합니다. --- p.43 네모리 그날 일을 기억하는 고토 씨라는 장기 입원 환자가 있었어요. 그날은 평창올림픽 9일 째였고, 남자 피겨 스케이트 프리 프로그램에서 하뉴 유즈루 선수가 금메달을 딴 날 이었어요. 오후 1시 43분. 입원 중인 환자들은 다들 텔레비전 앞에 모여 하뉴 선수를 응원하고 있었죠. 그런데 고토 씨는 관심이 없었대요. 그래서 들었던 거예요, 복도를 뛰어다니는 간호사들의 발소리를. 입원 생활이 길다 보니 바로 알겠더래요. 무슨 일 이 생겼구나. 고토 씨는 무슨 일인지 보러 갔어요. 6층으로 올라가 호흡기내과 병동 으로 갔는데, 거기서 간호사 한 명과 부딪혔어요. 간호사는 그때 뭔가를 떨어뜨렸고, 얼른 주워서 자리를 떴어요. 그런데, 어라? 고토 씨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간호 사가 들고 있던 인공호흡기 튜브에는 있어서는 안 될 게 있었거든요. 매듭이요. 고토 씨는 캠핑이 취미라 그 매듭의 이름도 알았어요. 그건 버터플라이 매듭이었어요. 하 뉴 선수의 금메달 소식에 병실은 소란스러웠지만, 고토 씨는 그 순간에도, 매듭이 있 는 튜브를 들고 간 간호사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 간호사가 쭈그리고 앉았을 때 살짝 가슴이 보였대요. 원래 그 병원 간호사들은 옷을, 간호사 전용 홈쇼핑인 ‘앙피 르미에’에서 공동구매해서 입거든요. 그래서 다들 몸을 숙여도 가슴이 보이지 않는, 새로 나온 스크럽이라는 흰 옷을 입어요. 그런데 그 간호사는 가슴이 보였대요. 실은 거기서 근무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 예전 병원에서 입던 옷을 입고 다녔던 거죠. 숙이면 가슴이 보이는 그 옷을 입었던 단 한 명의 간호사는 바로, 시메노 씨. 시메노 가요코 씨. 이리 오세요. 시메노 (한숨을 쉬고) 억지 좀 그만 부려요. 네모리 저기, 지카스기 씨. --- p.62-63 지카스기 만날… (고개를 크게 저으며) 만나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데, 아니, 안 해 요, 죄송해요. 생각 안 해요…. 그런데 우연히 만나면 어떡하지, 싶어서. (수줍게 웃 으며 고개를 떨군다) 네모리, 대화에 흥미를 잃고 화장실 쪽으로 향한다. 시메노, 그를 노려보며 아직 얘기 중인데 어딜 가냐는 의미로, 턱으로 지카스기를 가리킨다. 지카스기 한번, 딱 한 번 엽서를 보냈어요. 죄송해요. 네모리 엽서요? 어디로? 지카스기 책이요, 책에 적힌 주소로요. 네모리 아아, 출판사로. 지카스기 죄송해요. 이상한 거 보내서. --- p.73 시메노 네모리 씨 소설은 10대들한테 특히 인기가 있대요. 자극적인 설정에 잔혹한 묘사에 기분 나빠지는 결말이 특히 먹히나 봐요. 이 책도요, 열네 살짜리 여자애가 마지막에 자살하는 내용이에요. 자살해서, 구원받아요. 네모리 …어? 왜 이러지? 갑자기 배가 아프네. 네모리,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시메노 마에바시에서, 열네 살짜리 여자애가 이 책을 읽고 주인공이랑 똑같은 방법으로 자살 했어요. --- p.98 지카스기 …형.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형. 일어나. 나 좀 도와줘. 대답이 없는 네모리, 잠이 든 듯하다. 지카스기 어떡하지. 가만히 못 있겠어. 지카스기, 네모리의 어깨를 흔들며. --- p.118 시메노 텔레비전에서 간병 얘기가 나와도 용변 장면은 안 나오니까 모르겠죠. 간병은 기본적 으로 ‘아, 똥이 여기 있구나’의 연속이에요. 방, 화장실, 식탁, 어디든 있거든요. 매일 똥을 닦으면서 살고, 살면서 닦고. 손톱 사이, 손가락 마디, 거울 보면 자기 턱에도 있고, 외출해서 소매 보면 아, 똥이 여기도 있었네. (미소 짓지만, 웃음기는 곧바로 사라진다) 환자 본인도 힘드니까, 화풀이를 하거든요. 꼬집어요. 꾹 꼬집히면, 속에서 증오 같은 감정이 덩어리로 올라와요. 아아, 이 사람은 이제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 니구나, 깨닫게 되죠. 직장 다니면서 혼자 간병하는 거, 보통 두세 달이면 한계가 와 요. 50년을 같이 산 아내라도 간병 시작하고 석 달이면 지옥을 보고요, 언제 죽나, 소리가 절로 나온다니까요. --- p.135 네모리 …뭐라고 썼을까? 그 애가 나한테 무슨 말을 했을까? 편지에 뭐라고 썼을까? 지카스기 (걱정스러운 얼굴로 네모리를 보고) 형, 괜찮아. 네모리 (‘어?’) 지카스기 저희 딸이 폐를 끼쳤습니다. 저희 딸은 작가님이 자기를 구해 줬다고 했어요. 네모리 (가슴을 울리는 말이지만) 그런데 난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용서 안 해주는 것보 다 용서를 해주는 게 나는 더 괴로운데, 그게 더 괴롭, 거든…. --- p.170 네모리 너, 그 엽서에. 뭐라고 써서 보냈어? 미안, 나 그런 거 안 읽는단 말이야. 읽었으면 달라졌을까? 셋이 빙수 먹고 서로 혓바닥 내미는 날이 왔을까? 그랬으면 나도 간병 도와주고… 도울 리가 없지, 내가. 이제 와 무슨 소용이야. 천성이 이런 걸. 형이 좀 촌스러워. 항상 그래. 죽어라 앞만 보고 가는데, 보면 똑같은 짓만 반복하고 있어. 좌 회전, 좌회전, 좌회전해서. 도착했나 보면, 아아 여기인가? 좌회전, 좌회전, 좌회전, 좌회전해서, 또, 아아, 여기인가? 맨날 여기야. 내가 좀 부족한 점이 많아, 하하하. --- p.176 네모리 괜찮아, 그렇게 쓰면 돼. 지카스기 아무거나 써도? 네모리 응. 지카스기 아무거나 다? 네모리 응. 정말로 네가 해보고 싶었던 거 쓰면 돼. 지카스기 알았어요. --- p.1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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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람의 엇갈리고 이어지는 마음
도쿄 외곽의 한 주유소 서비스룸. 여름 저녁, 주유소를 운영하는 지카스기와 아르바이트생 나루미가 무료하고 어딘가 어긋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이곳에 갑작스럽게 네모리와 시메노가 찾아온다. 네모리는 지카스기의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배다른 형으로, 소설가다. 두 형제의 대화는 처음부터 엇박자를 낸다. 사소한 말다툼과 농담,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이 반복되고, 인물들은 끊임없이 빗겨 간다. 네모리는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가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원인이 의료사고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병원을 고소하자고 설득하지만, 지카스기는 그 말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채 엉뚱한 데에 주의를 빼앗긴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아버지의 병과 간병 그리고 죽음 등을 둘러싼 기억과 책임의 문제들이 놓여 있다. 네모리는 의료사고의 증거를 모아 소송을 준비하려 하지만, 그의 말에는 개인적인 분노와 경제적 이해관계가 뒤섞여 있다. 한편 시메노는 병원에서 근무한 간호사로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끝내 명확한 진실을 내놓지 않고, 대화가 깊어질수록 사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때 어딘가 억눌린 듯 보이는 지카스키가 알 수 없는 기묘한 이야기를 하고 급기야 주유소에 휘발유를 뿌리며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하는데... 그림으로 완성된 활자극장 《또 여기인가》의 표지 중앙에는 낡은 선풍기가 놓여 있고, 주변에는 바람에 흩날리는 파편화된 언어들과 사건을 암시하는 상징적인 오브제들이 배치되어 있다. 정지된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회전하는 선풍기는, 반복되는 일상, 되풀이되는 질문, 그리고 “또 여기인가”라는 제목처럼 그 자리에 머무르면서도 계속 흔들리는 인간관계를 은유하며, 극 전반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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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의 길 끝에서, 우리는 마침내 다정한 이해와 마주한다.
사카모토 유지의 〈또 여기인가〉는 그 여정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나는 오래전부터 오해로 시작해 이해로 맺어지는 것이 바로 연극이 지닌 가장 큰 아름다움이라고 믿어왔다. 다른 존재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나를 설명하느라 지쳐버리고, 남을 알아갈 여유조차 잃어버린다. 각자의 좁은 시공간 속에서 깨지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가는 우리는, 그래서 더욱 작은 세계에 갇혀버릴지도 모른다. 결코 이어질 수 없으리라 믿었던 관계에서 오해가 풀려, 너와 내가 진실로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산산이 부서져 사라질까, 아니면 그때야 온전히 이어질까. 당신을 알기 전 우리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던가. 당신이 나와 같음을 알았을 때, 우리는 얼마나 깊이 안도했던가. 지독히도 외로운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듯 살아가던 두 사람이, 마침내 먼 길을 돌아 서로에게 도착한다. 나를 지우고 버텨야만 하는 세상에서, 나와 닮은 존재를 만난다는 기적.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오해로부터 풀려나는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수많은 이들을 품을 수 있게 된다. 나와 당신이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만큼은, 어느 세계에서도 변함이 없다. 사카모토 유지가 장난스럽게 이끄는 오해의 길 끝에서, 눈물 나게 따뜻한 이해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란다. - 김정 (연출가, <또 여기인가> 낭독공연 연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