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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문
주 해설_기억을 복원하는 행위로서의 글쓰기 판본 소개 시바사키 도모카 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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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뒤를 쳐다보니 소녀는 가녀린 손을 우편함 투입구에서 빼내고 있었다. 봉투가 한 장 들려 있다. 나도 초등학생 때까지 저런 식으로 투입구에 손을 넣을 수 있었지, 하고 오랫동안 떠올리지 않았던 것을 생각한다. 소녀는 엘리베이터 홀 바로 앞에서 뒤를 돌아 다시 한번 지토세를 노려봤다. 지토세는 모르는 척하고 동 밖으로 나왔다.
수요일 오전 열한 시. 6월 말. 아직 아이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 자신도 거짓말을 하고 학교에 가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고, 가즈토시도 이 단지에 살았던 초등학생, 중학생 시절에는 자주 땡땡이를 쳤다고 했으니 드문 일도 아니다. 5층짜리 동으로 둘러싸인 굽이진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용했다. 빗방울이 소리를 흡수하는 건지, 큰길의 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단지 안에 있으면 자신이 도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 p.38 “지토세가 어릴 적에도 이웃집에서 아버지들끼리 마작을 했었지, 누구 집이었는지 모를 광경이 떠오른다. 정월에도 고타쓰 판을 뒤집으면 초록색 천으로 된 면이 나타났다. 이 단지에 있으면 잊었던 것이 차례차례 떠오른다. 떠올리기 전까지는 사라진 상태, 즉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던 것이, 떠올린 순간 어딘가 숨어 있었을 뿐,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며 놀라고 만다. 이렇게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라는 사실에.” --- p.118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토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본 적 없는 지바의 바다와 중고등학생 때 봤던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의 장면이었다. ‘당시의 도쿄’라면 지토세는 텔레비전 속 이미지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곳은 텔레비전 저편의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자신과는 무관한 세계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가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거니와, 하물며 도쿄에 산다는 건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장소라고 생각했던 도시에서 벌써 10년 넘게 살고 있는 자신은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했다. 이 도시에 와서 지낸 생활은 텔레비전에 비치던 영상처럼 전원을 끄면 사라져 버리는 무언가일지도 모른다고.” --- p.141 “지토세는 천천히 걸어서 나란히 서 있는 콘크리트 건물들을 올려다봤다. 무수한 베란다와 복도와 문이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다. 매일 같은 장소여서 그때도 변함없었다. 고저차가 있는 부지 내를 걷고 있으니, 고층동 복도가 잘 보이는 장소가 나왔다. 같은 모양, 같은 무게의 문. 연푸른색 또는 옅은 노란색의, 신문 구멍이 달린 차가운 철제문. 그 안에는 누군가 살고 있다. 가족이나,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사람. 가족과 헤어진 사람. 가족을 만들려 했던 사람. 가족이 된 사람. 혼자 지내는 사람. 바로 옆에 있는데도 어떻게 사는지, 문 너머는 보이지 않는다.” --- p.281~2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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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모양, 다른 삶―단지라는 공간
소설의 무대인 도영 단지는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대량으로 건설된 집합 주택지다. 같은 모양의 건물, 같은 구조의 방, 같은 형태의 철제문이 늘어선 이 공간은 전쟁의 폐허 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전후의 기억과 맞닿아 있다. 『천 개의 문』은 이 획일적인 공간 안에 있는 “같은 모양, 같은 무게의 문” 하나하나에 저마다 다른 삶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가족이었던 사람, 가족과 헤어진 사람, 혼자 지내는 사람… 바로 옆에 있어도 문 너머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는 인식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소설은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다카하시 씨’를 찾아 단지를 헤매는 지토세의 현재적·공간적 탐색이며, 다른 하나는 태평양 전쟁을 겪은 가쓰오로부터 딸 게이코, 손자 가즈토시로 이어지는 삼대의 시간적 서사다. 가쓰오의 기억은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도쿄와 그 위에 단지가 들어서는 과정을 관통하며, 소설이 다루는 전후라는 시간적 배경 전체를 아우른다. 이 두 개의 축은 서로 다른 시간과 인물을 오가면서도 결국 단지라는 하나의 장소로 수렴하며, 지토세와 직접적인 접점이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까지 포함해 단지에 쌓인 기억에 총체성을 부여한다. 장소를 기억하는 소설 시바사키 도모카는 도시와 거리, 집과 같은 일상적 장소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작업으로 일본 문단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점해 온 작가다. 이 소설에서도 뚜렷한 사건보다는 단지의 지형과 풍경, 계절의 감각을 축적해 나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오사카의 매립지 위에 세워진 단지에서 자라 ‘기억이 없는 땅’의 아이로 스스로를 인식해 온 지토세가, 도쿄의 낯선 단지에 얽힌 타인들의 기억을 좇으며 비로소 자신이 발 딛고 선 장소에 대한 감각을 얻어 가는 과정은, 빠르게 변화하며 장소의 기억을 쉽게 지워 버리는 오늘날의 도시 공간에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진다. 이러한 감각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다다미의 냄새, 여름 아침의 습기, 골목을 울리는 까마귀 소리처럼 사소한 요소들을 통해 환기된다. 지토세는 단지 안의 오래된 카페 ‘카틀레야’를 드나들며 단골들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과거의 도쿄에 대해 묻는데, 이렇게 모인 이야기들은 서로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은 채 단지에 쌓여 있던 여러 겹의 시간을 하나씩 드러낸다. 『천 개의 문』은 감각적 디테일의 축적을 통해, 장소에 대한 기억이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반복 속에서 조용히 형성된다는 점을 보여 준다. 작가는 2014년 『봄의 정원』으로 제151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을, 2026년 『돌아오지 못하는 탐정』으로 제77회 요미우리 문학상 소설상을 수상했다. 도시의 일상과 장소의 기억, 지리적 공간에 대한 관심을 작품 전반에 녹여 온 문학 세계를 인정받아 일본지리학회상 사회공헌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대표작 『꿈속에서도 깨어나서도』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 의해 영화 〈아사코〉로 만들어져 제71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