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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
서문 새로운 문명 창조와 함석헌의 생명철학 핵심저작 1장 생명과 역사 2장 생각하는 민족과 세계구원 3장 고전 · 문화 · 종교 · 교육 4장 생명철학과 사상 함석헌 연보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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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역사에서 새로운 삶의 뜻을 찾다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한 뒤 학교를 그만두고 오산학교에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스승 유영모를 만났다. 이후 일본에서 공부하며 무교회주의 기독교를 접했고, 귀국해서는 오산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기독교 신앙과 동양 고전에 대한 탐구, 민족의 현실을 향한 관심은 이 시기부터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1930년대 『성서조선』에 연재한 한국사 서술은 훗날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발전하며 함석헌의 역사철학을 대표하는 저술이 된다. 이 책 1장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주요 대목을 통해 함석헌이 한국인의 고난을 어떻게 읽었는지 보여준다. 그에게 역사는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것만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 일을 겪은 사람들이 어떤 뜻을 발견하고 어떻게 달라지는지가 중요했다. 나라를 잃고 전쟁과 분단을 겪은 민족의 경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역사의 실패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경계하고, 그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요구했다. 그가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든다”(52면)고 말한 데에는 고통을 통과함으로써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더 큰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 함석헌은 해방 후 북에서 거듭 고초를 겪고 남으로 내려왔지만, 남한의 독재와 분단 현실에도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사상계』에 발표한 「할 말이 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등은 정치권력뿐 아니라 침묵하고 의존하는 국민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지는 글이다. 나라의 운명을 강대국이나 소수 지도자에게 맡겨둔 채로는 자주적인 삶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었다. 2장에 모인 논설들은 민족이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을 지는 일이 세계의 평화를 모색하는 출발점임을 강조한다. 함석헌에게 민족의 자각은 다른 민족을 배척하는 우월감과 거리가 멀었다. 고난을 겪은 민족이기에 다른 이들의 고통을 알아보고 인류 전체를 위한 길을 찾아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씨알과 우리말로 풀어낸 생명철학 함석헌의 사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말은 ‘씨알’이다. 씨알은 역사의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름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도, 그들이 품은 생명의 가능성을 함께 드러낸다. 작은 씨앗 안에 새 생명이 자라날 힘이 들어 있듯, 평범한 사람 한명 한명에게도 스스로 판단하고 역사를 바꿀 힘이 있다는 것이다. 씨알을 통치의 대상이나 동원할 인원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서는 데서 시작한다. 함석헌이 1970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고 민중의 목소리를 전하려 한 일은 이 같은 사상의 실천이었다. 편저자 박재순은 이 씨알 개념을 ‘한’ ‘얼’ ‘뜻’이라는 말과 연결해 설명한다. ‘한’은 개별 생명이 서로 이어져 이루는 큰 하나를, ‘얼’은 몸과 마음을 아우르는 생명의 주체를, ‘뜻’은 삶이 향하는 목적과 의지를 드러낸다. 이 말들은 추상적인 정의만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자기 삶에서 뜻을 깨닫고 그것을 몸으로 행할 때 비로소 사상의 내용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함석헌이 생각을 강조한 것도 정보를 많이 갖추거나 논리를 정교하게 세우라는 뜻에 그치지 않았다. 스스로 묻고 깨달아 자기 삶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생각의 역할이었다. 이러한 사유는 우리말을 통해 더욱 생생해졌다. 함석헌은 삶에서 생각이 생겨나고 그것이 말과 글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민중이 일상에서 쓰는 언어로 철학하는 일은 민중 자신의 경험을 사상의 출발점으로 삼는 일이었다. 그의 글에 농사와 씨앗, 불과 풀무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4장에 실린 「새 삶의 길」은 몸으로 겪고 행하는 가운데 진리를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글이다. 이 책은 개념만으로는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함석헌의 철학을 그의 생생한 문장으로 만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함석헌은 ‘나’의 주체성을 강조하면서도 타인과 사물을 나의 지식을 위한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았다. 편저자는 이러한 사유를 ‘서로 주체’라는 관점으로 읽는다. 상대의 삶과 고통에 참여하며 알아갈 때 나 자신도 변화하고, 그 변화를 통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앓음을 통해 앎에 이른다는 함석헌의 통찰은 아픔을 약점으로만 여기지 않게 한다. 잘났다는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존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데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수 있음을 일러준다. 종교의 경계를 넘어 비폭력의 문명으로 함석헌은 기독교에 깊이 뿌리내린 사상가였지만, 신앙을 특정 교단의 울타리에 가두지 않았다. 그는 성서와 함께 동양 고전을 읽고 종교의 가르침이 오늘의 삶을 어떻게 새롭게 할 수 있는지 물었다. 이 책 3장의 「옛글 고쳐 씹기」 「들사람 얼」 「진리는 더 위대합니다」 등은 전통을 그대로 따르거나 바깥의 가르침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태도를 넘어 스스로 생각하며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종교가 권위와 교리를 지키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살아 있는 사람의 자유와 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비판이 그 바탕에 있다. 그렇다고 이성과 과학의 성과를 외면하고 신앙만을 앞세운 것도 아니었다. 함석헌은 이성이 충분히 활동하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그 과정을 통과하여 삶과 생명의 의미를 더 깊이 묻고자 했다. 「인간혁명」과 「새 교육」에서 드러나는 교육관 역시 지식의 주입보다 인간 스스로의 변화와 성장을 중시한다. 학교와 종교가 해야 할 일은 기존 질서에 순응할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양심에 따라 살아갈 주체를 깨우는 것이었다. 이 같은 생명철학은 함석헌의 비폭력사상으로 이어진다. 그는 폭력으로 지탱되어온 문명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전쟁과 억압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비폭력 혁명」에서 “우리 생각과 행동과 살림을 근본적으로 전체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아니 되는 대목에 이르렀습니다”(253면)라고 말한 것은 비폭력이 저항의 한 방법을 넘어 삶 전체를 바꾸는 원리임을 드러낸다. 낡은 제도와 특권을 보존하려는 집착을 내려놓고, 새 생명이 자라날 수 있도록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 혁명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촛불혁명 과정도 성찰하게 한다. 편저자는 함석헌의 생명철학을 “생명을 사는 삶의 철학, 생활철학”(34면)이라고 표현한다. 기술과 물질의 힘이 커질수록 인간이 무엇을 위해 생각하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는 더욱 절실한 질문이 된다. 함석헌의 글은 그 답을 전문가나 권력자에게만 맡겨두지 않는다. 이름 없는 씨알이 자기 삶을 성찰하고 이웃의 아픔에 응답하며 세계의 책임 있는 주체로 서기를 촉구한다. 문명전환의 과제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의 도전적 기획 지구기후와 자본주의가 불가분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각종 갈등이 팽배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떠맡은 과제는 결코 가볍거나 단순하지 않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을 필두로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위원회는 이 모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환’이라는 강력하게 실천적인 과제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삶의 전망과 지침이 필요하며, 전망과 지침으로 살아 작동할 사상이 절실함을 뜻한다. 그런 사상을 향한 다급하고 간절한 요청에 공명하려는 기획으로서, 창비 한국사상선은 한국사상이라는 분야를 요령 있게 소개하거나 새롭게 정비하는 평시적 작업을 넘어 어떤 비상한 대책이기를 열망하며 구상되었다.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에서) 서구사상은 오랜 시간 세계 지성계에서 압도적 발언권을 유지하는 한편 오늘날의 위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대응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그 강력한 위상의 이면에 강고한 배타성과 편견이 작동하고 있음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서구가 가진 위상은 돌이킬 수 없이 상대화되었고 보편의 자리는 진실로 대안에 값하는 사상들의 분투에 열려 있다. 이 시점이야말로 유·불·선의 회통이나 개벽사상 등 한국사상 특유의 사상적 기획이 한국사상이 전지구적 과제를 향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태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일 것이다. 창비 한국사상선 사상가들의 사유에는 역사와 현실을 탐문하며 새로운 삶의 보편적 전망을 구현하려 한 강인한 실천성, 그리고 사회를 변혁하는 일과 개개인의 마음을 닦는 일이 진리를 향한 단일한 도정에 있다는 깨달음이 깊이 새겨져 있다. 한반도의 경험과 지혜가 응축된 사상적 활력을 드러내는 창비 한국사상선이 문명전환의 개벽적인 사유와 실천의 지평을 열어가는 데 의미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