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
서문 공관병수와 실사구시 핵심저작 [ 홍대용 ] 1장 학문론 2장 실학적 사고 3장 공관병수 4장 경세론 5장 새로운 세계관의 정초 [ 김정희 ] 1장 경세론 2장 서양 인식 3장 미학 4장 고증학 5장 불교 홍대용 연보 김정희 연보 찾아보기 |
Hee-Byung, Park,朴熙秉
박희병의 다른 상품
|
공관병수의 사상가 홍대용
담헌 홍대용은 1731년(영조 7)에 충청도 천안에서 태어나 청년기 내내 성리학을 공부하는 와중에도 30세가 되던 해에 혼천의(천체관측기)와 자명종을 제작할 정도로 당대 과학에 능통했다. 홍대용은 당시의 주자학에 대해 깊이 회의했다. 동아시아 전반을 장악한 주자학을 전적으로 부정할 순 없었지만, 그는 주자학을 정통으로 보고, 나머지 학문을 이단으로 보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를 화두로 삼고 정진했다. 홍대용은 주자학이 이단으로 규정한 양명학, 노자·장자, 불교 등이 갖고 있을 진리를 규명하고자 끊임없이 책을 파고들었다. 이러한 탐구는 결국 그만의 사고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공관병수’ 개념을 정립하는 기반이 되었다. 공관병수는 이단의 장점을 두루 받아들인다는 개념으로, 홍대용은 이 개념 아래에서 다양한 이단 학문들을 섭렵하고 ‘주자학으로부터의 탈피’를 감행한다. 그는 자신의 대표 저술인 『의산문답』에서 장자와 묵자 사상을 두루 반영하는 반면 주자학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라 할 수 있는 고대 중국의 삼대(하·은·주) 성인(우왕·탕왕·문무) 등을 비판한다. 가히 전근대 중화문명에 대한 발본적 문제제기가 아닐 수 없다. 홍대용은 부친이 누명을 써 유배되는 고초를 겪고 난 뒤인 35세에 숙부를 따라 북경 연행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만난 중국 선비들과의 교류는 홍대용의 말년까지 끊이지 않았고 그의 사상적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와 동시에 조선 유학자들로부터는 중국 지식인들의 이단 사상에 물들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조선 유학자들이 이단과 오랑캐를 꺼리는 것을 목도한 홍대용은 “이단은 주자학이라는 동일성 바깥의 비동일성이며, 오랑캐는 중화라는 동일성 바깥의 비동일성”(31면)이라는 점을 깨닫고 남은 평생 이 두가지 의제를 화두로 삼았다. 다시 말해 홍대용은 비동일성의 존재(이단의 사상, 청/오랑캐 등)가 동일성의 존재(주자학, 명/중국)과 다를 바 없이 균등하다는 명제에 도달한 것이다. 홍대용의 이 같은 평등에 대한 감수성은 진리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되었다. 일찍이 천체관측기를 손수 제작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자연과학에 대한 그의 탐구정신은 남달랐다. 대표 저술인 『의산문답』의 절반 이상이 천문과 지구, 자연 현상에 할애되었을 정도인데, 그 내용 또한 대단히 혁신적이다. 지구를 우주의 중심이 아닌 행성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인 존재로 본 것이나, 비인간 존재인 생물과 공기, 하늘 등과의 유기적 연관을 중시한 것 등은 현대적 관점에서도 무척 신선한 접근으로 볼 수 있다. 실사구시의 학자 김정희 한편 추사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 한양에서 고위 관료의 자제로 태어나 24세가 되던 해에 홍대용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자제군관으로 북경 연행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당대 고증학의 대가들을 만나 오랜 시간 교류했다. 그렇지만 당시 조선에 고증학을 들여오는 문제는 별개였다. 17세기 정제두(창비사상선 9권에서 소개) 등이 양명학을 받아들이고 18세기 이덕무 등이 고증학을 일부 도입하긴 했지만, 고증학은 여전히 낯선 학문이었다. 불모지와 다를 바 없는 조선에 고증학을 들이고자 한 것은 대단한 용기라 할 수 있다. 중국 연행길에서 귀국한 뒤 발표한 글 「실사구시설」은 그의 대표 저술이라 할 수 있는데, ‘사실에 의거하여 진실을 찾는다’는 이 명구는 그의 평생 화두로 자리매김한다. 그가 중국의 옹방강과 완원을 스승으로 각별히 섬기긴 했지만, 김정희는 스승들의 사유와 당대 조선의 학풍을 절충하여 자기만의 사상을 축적해간다. 즉, 청나라 고증학을 수용하되 기존 주자학(정주학)을 그것과 융합하여 사고하려 했고, 여기에서 불가피하게 갈등하는 양 극단의 충돌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그것에서 자기 사상을 도출해낸 것이다. 대개 김정희 하면 ‘금석학의 대가’를 떠올리며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한 것을 첫째 성과로 꼽는다. 이로써 진흥왕 대에 신라의 영토가 한강 이북에까지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대단한 성취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편저자 박희병은 김정희를 단지 금석학자로만 봐서는 안 되고 경학 즉 경전 연구의 측면에서도 큰 성취를 이루었다고 본다. 김정희가 중국 고전 훈고학을 집대성한 정현을 높이 샀던 점, 『주역』 연구에 특별히 열중했던 점, 주자뿐 아니라 왕양명 등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피력한 점 등은 경학에 대한 그의 열의, 즉 경전의 본래 뜻을 찾아 도를 궁구하고자 했던 열정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독특한 입장은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김정희를 정가운데에 놓이게끔 하는데, 다시 말해 그는 오른쪽의 주자학(이원조)과 왼쪽의 실학(정약용) 사이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가히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중도를 걸었다’라고 해도 좋을 법하다. ‘탈중화’의 홍대용과 ‘중화 회귀’의 김정희 홍대용과 김정희의 공통점 중 첫째를 꼽자면 ‘중국 경험’을 들 수 있다. 그 경험은 단지 그들이 자제군관으로서 중국 연행길에 동행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중국을 다녀온 뒤에 중국 지식인들과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을 위주로 살펴야 한다. 이 같은 소통은 이 두 사람의 지적 토양을 넓히고 이들이 자신 고유의 사유를 발전시키는 데에 큰 보탬이 되었다. 다만 이 같은 공통점과는 별개로 그들은 각자만의 방식으로 중국발 지식을 소화해냈다. 홍대용은 외래 지식을 배움에 있어 내적 조건이 외적 매개보다 더욱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에 반해 김정희의 사상 습득에서는 외적 매개가 더욱 큰 역할을 했다. 이 책의 편저자 박희병은 이에 대해 “홍대용이 외인을 잘 활용해 주체적이고 창의적으로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만들어나간 학인이라고 한다면, 김정희는 외인을 선차적인 것으로 중시함으로써 18세기에서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중국 학계가 이룩한 학문적 성취를 따라잡는 방향에서 자신의 사상 행위를 한 학인”(14~15면)이라고 평가한다. 문명전환의 과제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의 도전적 기획 지구기후와 자본주의가 불가분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각종 갈등이 팽배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떠맡은 과제는 결코 가볍거나 단순하지 않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을 필두로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위원회는 이 모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환’이라는 강력하게 실천적인 과제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삶의 전망과 지침이 필요하며, 전망과 지침으로 살아 작동할 사상이 절실함을 뜻한다. 그런 사상을 향한 다급하고 간절한 요청에 공명하려는 기획으로서, 창비 한국사상선은 한국사상이라는 분야를 요령 있게 소개하거나 새롭게 정비하는 평시적 작업을 넘어 어떤 비상한 대책이기를 열망하며 구상되었다.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에서) 서구사상은 오랜 시간 세계 지성계에서 압도적 발언권을 유지하는 한편 오늘날의 위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대응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그 강력한 위상의 이면에 강고한 배타성과 편견이 작동하고 있음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서구가 가진 위상은 돌이킬 수 없이 상대화되었고 보편의 자리는 진실로 대안에 값하는 사상들의 분투에 열려 있다. 이 시점이야말로 유·불·선의 회통이나 개벽사상 등 한국사상 특유의 사상적 기획이 한국사상이 전지구적 과제를 향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태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일 것이다. 창비 한국사상선 사상가들의 사유에는 역사와 현실을 탐문하며 새로운 삶의 보편적 전망을 구현하려 한 강인한 실천성, 그리고 사회를 변혁하는 일과 개개인의 마음을 닦는 일이 진리를 향한 단일한 도정에 있다는 깨달음이 깊이 새겨져 있다. 한반도의 경험과 지혜가 응축된 사상적 활력을 드러내는 창비 한국사상선이 문명전환의 개벽적인 사유와 실천의 지평을 열어가는 데 의미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