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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정인보
조선적인 것의 재구성
창비 202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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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

[홍명희]

서문
진보적 민족주의자의 행로

핵심저작
1장 반일애국사상
2장 진보적 민족주의
3장 과학과 계몽
4장 차별 비판과 평등사상
5장 조선학운동과 진보적 역사관
6장 리얼리즘과 중도적 문학관

[정인보]

서문
길을 잃은 시대의 윤리와 실심실학

핵심저작
1장 현실 돌파의 윤리
2장 윤리적 철학의 기반
3장 윤리적 학술의 전통
4장 식민지 지식인의 학술윤리
5장 윤리적 문학의 전통과 실천

홍명희 연보
정인보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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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4

洪命熹, 벽초(碧初), 가인(可人)

일제한민족운동의 지도자격인 인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괴산에서 이를 주도하였고, 1927년 항일 민족 협동전선인「신간회」의 창립과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1929년 민중대회사건으로 1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이 기간을 전후하여 천민계층의 반봉건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생활양식을 다룬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10여 년 동안 연재했다. 그는 이 단 한 편의 소설 『임꺽정』으로 작가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조선 명종(明宗) 때의 도적 임꺽정의 이야기를 허구화한 이 소설은, 천민계층의 반봉건적
일제한민족운동의 지도자격인 인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괴산에서 이를 주도하였고, 1927년 항일 민족 협동전선인「신간회」의 창립과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1929년 민중대회사건으로 1년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이 기간을 전후하여 천민계층의 반봉건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생활양식을 다룬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10여 년 동안 연재했다.

그는 이 단 한 편의 소설 『임꺽정』으로 작가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조선 명종(明宗) 때의 도적 임꺽정의 이야기를 허구화한 이 소설은, 천민계층의 반봉건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생활양식을 다룬 데 그 특징이 있다. 또한 천민계급을 우상화함으로써 계급의식과 집단의식을 드러낸 작품이기도하다.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다가 월북하였고, 북한에서 1949년 부총리, 1961년 조국평화통일 위원장을 지냈으며 1968년 3월 5일 작고했다. 손자 홍석중, 홍석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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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寅普

근대 국학자, 민족사학자, 독립운동가, 시조시인, 언론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동래, 호는 담원(?園), 위당(爲堂). 1893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한학 수학 후 1910년 조선 강화학파의 거두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의 제자가 되었다. 1910~1914년 중국 안동, 봉천, 서간도, 상해 등을 수시로 다니며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문일평, 홍명희 등과 교유. 독립운동 비밀결사조직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1920년대 연희전문 교수와 동아일보, 시대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발한 저술활동 벌였다. 1930년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역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일제
근대 국학자, 민족사학자, 독립운동가, 시조시인, 언론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동래, 호는 담원(?園), 위당(爲堂). 1893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한학 수학 후 1910년 조선 강화학파의 거두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의 제자가 되었다. 1910~1914년 중국 안동, 봉천, 서간도, 상해 등을 수시로 다니며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문일평, 홍명희 등과 교유. 독립운동 비밀결사조직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1920년대 연희전문 교수와 동아일보, 시대일보 논설위원으로 활발한 저술활동 벌였다. 1930년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역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우리고대사 왜곡과 말살에 분노, 1935년~1936년 동아일보에 〈오천년간 조선의 얼〉 제목으로 우리역사를 집필, 연재하였다. 위당은 고조선의 전역사를 우리민족사로 체계화하였으며, 단재(신채호)사학을 계승, 발전시켰다. 해방 후 국학대학 초대학장, 대한민국 초대감찰위원장을 지냈다.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제헌절 등 주요 국경절의 노래말을 지어주신 분이다. 1950년 6.25동란으로 납북.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저서로는《조선고서해제》(1931), 《양명학연론》(1933), 《조선사연구상하권》(1946-1947), 《담원시조집》(1948), 《담원국학산고》(1955), 《담원문록》(1967), 《담원정인보전집》(1983), 《담원문록(번역본)》(2006)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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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강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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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玲珠

1952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비교문학과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상명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에 『한국역사소설의 재인식』(1991), 『벽초 홍명희연구』(1999), 『벽초 홍명희평전』(2004)이 있으며, 『벽초 홍명희 『임꺽정』의 재조명』(공편, 1988),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자료』(공편, 1996)를 엮었다. 논문으로는 「1930년대 평단의 소설론」, 「국학자 홍기문연구」, 「『임꺽정』의 창작과정과 『조선왕조실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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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錫武

1942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전남대 법과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71년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나 신원특이자라는 이유로 대학에서 강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후 오랫동안 중·고교사로 근무했다. 유신반대 유인물 사건인 전남대학교 <함성(喊聲)>지 사건으로 수감되어 1년을 감옥에서 지냈다. 당시 복역 중 다산 저술에 대한 연구를 한 결실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이며, 5.18 민주화 운동 이후 내란죄를 피해 은신하면서 다산의 문집들을 번역한 것이 바로 『다산산문선』과 시선집 『애절양』이다.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며 이어진 복역과 수감생활
1942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전남대 법과대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71년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나 신원특이자라는 이유로 대학에서 강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후 오랫동안 중·고교사로 근무했다. 유신반대 유인물 사건인 전남대학교 <함성(喊聲)>지 사건으로 수감되어 1년을 감옥에서 지냈다. 당시 복역 중 다산 저술에 대한 연구를 한 결실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이며, 5.18 민주화 운동 이후 내란죄를 피해 은신하면서 다산의 문집들을 번역한 것이 바로 『다산산문선』과 시선집 『애절양』이다.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며 이어진 복역과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와 본격적으로 다산 연구에 전념했다. 한중고문연구소장과 제 13·14대 국회의원,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 5·18기념재단 이사장, 단국대 이사장, 한국고전번역원장, 단국대 석좌교수, 성균관대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고, 다산학술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현재 다산연구소 이사장, 우석대 석좌교수로 있으면서 다산학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저서로는 『다산기행』,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풀어 쓰는 다산 이야기』, 『새벽녘 초당에서 온 편지』, 『조선의 의인들』, 『다산 정약용 평전』, 『다산에게 배운다』 가 있고, 편역서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다산산문선』, 『애절양』, 『다산시정선 상, 하』, 『다산논설선집』, 『다산문학선집』(공편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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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2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356쪽 | 618g | 152*225*21mm
ISBN13
9788936481186

출판사 리뷰

좌우파 대립 속에서 피워낸 진보적 민족주의

1888년 충북 괴산의 노론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홍명희는 20세에 일본으로 유학한 뒤 십여년간 서울과 토오꾜오, 상하이, 싱가포르를 오가며 여러 근대 문물을 접했다. 이 다채로운 여정 속에서 민족주의와 계몽주의를 거쳐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근대 사상을 공부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가 근대 서구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기본 토양이 되었던 것은 어린 시절 명문가의 자손으로 전통 한학을 배우며 갖춘 조선의 선비정신이었다. 홍명희의 다음과 같은 열변이 그의 삶을 간명히 압축해준다.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이다. 일생 동안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17면)

홍명희가 일본 유학을 떠난 때는 공교롭게도 을사조약부터 경술국치에 이르는 5년간이었다. 유학하는 동안 날카롭게 민족 정체성을 다져온 그는,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아버지 홍범식이 비분하여 자결한 것을 보고 반일 정서를 더욱 투철히 다지게 되었다. 그의 이 같은 반일 애국사상은 상하이에서 동제사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근대 민족주의로 전환되었다. 민족해방을 위해서는 반일을 넘어선 좀더 실천적 대안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1919년 3·1운동 만세시위 주도 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소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자로 활동한다. 그리고 1927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협동전선체인 신간회 창립을 주도하면서 「신간회의 사명」을 발표한다. 당시 발표문에서 홍명희는 사회주의 사상을 각 나라마다 자기 현실에 맞게 수용해야 할 것을 주문했다. “신간회의 나갈 길은 민족운동만으로 보면 가장 왼편 길이나, 사회주의운동까지 겸(兼)치어 생각하면 중간 길이 될 것이다.”(49면)

홍명희는 1920년대 『동아일보』에 ‘학창산화’ 등의 제목을 건 칼럼을 써서 전세계의 다채로운 지식을 소개했다. 특히 자연과학·사회과학·역사·철학·언어학 등의 분야에 대한 지식을 항목별로 흥미롭게 소개했다. 이 같은 지적 편력은 홍명희가 민족주의, 사회주의 어느 것에도 편향되지 않고 합리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당시의 지정학을 폭넓게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과학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당시 횡행하던 여러 미신과 유사 종교의 발흥을 우려한 점은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구습을 퇴치함으로써 근대 민주주의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1930년대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조선학운동’에 공감하고 함께 참여했다. 조선학운동의 선두에 있던 정인보 등과 절친했고 신채호의 이론을 국내에 적극적으로 소개했던 홍명희는 본인 스스로도 고전문학을 정리하는 데에 앞장서서 김정희와 홍대용, 서유구 등의 저서를 교열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시대 양반계급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양반의 생활이념 중 ‘지조’에 대해서만은 높이 평가했다. 사대부의 지조가 당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양심과 통한다고 본 것이다.

8·15해방 후에 홍명희는 다시 정치 현장에 나서서 중간파 정치노선을 자처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당시 그가 “우리의 민족 문제는 세계적 계급 문제의 일부분”(56면)이라고 일갈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홍명희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긴장 속에서 두 사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다. 홍명희 편의 엮은이 강영주는 홍명희의 이 같은 노선을 두고 “진보적 민족주의”라고 명명했다.

좌파와 우파의 대립을 지양한 홍명희만의 중도적 문학관은 본인 문학이 추구하는 예술성에 다분히 담겨, 프로문학과 민족주의문학의 장점을 고루 갖춘 『임꺽정』을 탄생시켰다. 그는 문학을 정치에 예속된 것으로 보는 일부 프로문학가들에 대해 단호하게 비판하는 한편, 우파 문인들의 순수문학을 더욱 거세게 비판했다. 그의 민족문학, 민중문학에 대한 애정은 1941년 여름에 현상윤과 치른 대담의 한 문장에서 엿볼 수 있다. “문학은 문학을 통해서 도달하는 길이 있을 뿐이지 살림살이를 떠나서야 있을 수 없지.”(29면)


조선학의 부흥을 통해 정립하고자 한 민족의 자아상

서울에서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난 정인보(1893~1950)는 어린 시절 한학을 충실히 공부하다가 경술국치의 해인 1910년 당시 강화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이건방의 제자가 되었다. 강화학파는 조선 후기 주자학이 유명무실해지면서 실심실학(實心實學)을 통해 인간 내면의 본질을 탐구하고 실천에 나서야 한다고 보는 선진적 학파였고, 이때 이건방에게서 배운 학문은 훗날 정인보가 조선학운동을 펼치는 데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정인보는 1911년부터 중국과 서울을 오가면서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21세이던 1913년에는 상하이에서 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 동제사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그 뒤 주로 국내에서 활동하며 연희전문학교 교수, 『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양명학 연론」은 1933년 한해 동안 『동아일보』에 연재한 글로, 정인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이 망한 이유 중 하나로 주자학의 도입을 든 정인보는, 주자학을 대체하는 학문으로 양명학을 제안했다. 기존의 학술이 ‘허(虛)와 가(假)’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양명학을 통해 실(實)과 진(眞)으로 돌아와 실심(實心)을 지녀야 한다고 본 것이다.

1934년에는 다산 정약용의 모든 저작을 간행하는 일을 도맡아 5년여 만인 1938년 76책, 권수로는 500권이 넘는 방대한 『여유당전서』로 출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의 탄압과 폭정이 이어지자 서울을 떠나 전북 익산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전조선문필가협회장을 맡는 등 새 정부 수립을 비롯한 다양한 국가적 사업에 헌신했다. 이 시기 그가 만든 노랫말들은 개천절, 제헌절의 노래 등으로 지금도 여전히 여러 경축일에서 불리고 있다. 이렇게 왕성히 활동하던 때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평양으로 끌려가던 중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 비운의 죽음을 맞았다. 조선학의 부흥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여 새로운 공동체의 윤리를 제시하고자 했던 그의 꿈 또한 좌절하고 말았다. 21세기 우리가 누리는 일상이 갈수록 개인화되어가는 때에, 실심실학의 지식인으로서 일제강점기 내내 민족의 자아상을 만들고 이를 독립 한국의 민주주의에 접목하고자 한 정인보의 뜻을 다시금 새겨보길 권한다.

문명전환의 과제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의 도전적 기획

지구기후와 자본주의가 불가분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각종 갈등이 팽배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떠맡은 과제는 결코 가볍거나 단순하지 않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을 필두로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위원회는 이 모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환’이라는 강력하게 실천적인 과제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삶의 전망과 지침이 필요하며, 전망과 지침으로 살아 작동할 사상이 절실함을 뜻한다. 그런 사상을 향한 다급하고 간절한 요청에 공명하려는 기획으로서, 창비 한국사상선은 한국사상이라는 분야를 요령 있게 소개하거나 새롭게 정비하는 평시적 작업을 넘어 어떤 비상한 대책이기를 열망하며 구상되었다.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에서)

서구사상은 오랜 시간 세계 지성계에서 압도적 발언권을 유지하는 한편 오늘날의 위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대응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그 강력한 위상의 이면에 강고한 배타성과 편견이 작동하고 있음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서구가 가진 위상은 돌이킬 수 없이 상대화되었고 보편의 자리는 진실로 대안에 값하는 사상들의 분투에 열려 있다. 이 시점이야말로 유·불·선의 회통이나 개벽사상 등 한국사상 특유의 사상적 기획이 한국사상이 전지구적 과제를 향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태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일 것이다.

창비 한국사상선 사상가들의 사유에는 역사와 현실을 탐문하며 새로운 삶의 보편적 전망을 구현하려 한 강인한 실천성, 그리고 사회를 변혁하는 일과 개개인의 마음을 닦는 일이 진리를 향한 단일한 도정에 있다는 깨달음이 깊이 새겨져 있다. 한반도의 경험과 지혜가 응축된 사상적 활력을 드러내는 창비 한국사상선이 문명전환의 개벽적인 사유와 실천의 지평을 열어가는 데 의미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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