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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쥐눈이별 어린 나무의 발등 의자 목련나무엔 빈방이 많다 딱 한 상자 햇살의 經文 웅덩이 지금 저 앞산 나뭇잎들이 반짝반짝 뒤집어지는 이유는 비 그친 뒤 꽃물 고치 산 하나를 방석 삼아 반달 햇살은 어디로 모이나 신의 뒤편 뒷짐 쥐눈이별 제2부 머리맡에 대하여 촛불들 물끄러미에 대하여 잠자리의 지도 옻나무 젓가락 겉봉에만 쓰는 편지 옷 여린 나뭇가지로 고기를 굽다 머리맡에 대하여 좋은 술집 나무젓가락의 목덜미는 길고 희다 결 푸른 욕 산굼부리 못 자국을 따라서 유모차는 힘이 세다 제3부 더딘 사랑 더딘 사랑 구부러진다는 것 꽃벼슬 나무도 가슴이 시리다 해삼의 눈 소똥 이야기 울컥이라는 짐승 폐경기 우표 첫눈 여인숙에서의 약속 애인 나무의자 겨울밤 고드름 제4부 햇살의 손목 콩나물 황태 回春 天葬 세숫대야 주름살 사이의 젖은 그늘 졸음 단무지 개도 브래지어를 찬다 햇살의 손목 열매를 꿈꾸는 새 대통밥 손님 가을비 行山에 가면 풀뿌리의 힘 해설|따뜻한 구상(具象)·이혜원 |
Lee Jeong 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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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한 관찰, 섬세한 묘사로 삶의 본질을 포착해온 시인은 『의자』에서는 이에 더하여 상처 입은 것들에 대한 애정과 일상에 지친 모든 이들에게 아픔들을 내려놓고 쉴 자리를 마련하려는 유난한 마음을 곳곳에서 드러낸다. 그동안의 시집 제목에서 알 수 있듯(『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풋사과의 주름살』 『제비꽃 여인숙』) 자연과의 교감 속에 우리의 삶을 통찰해내던 시인의 시각은 표제작 「의자」를 통해 그 지평을 사물에까지 넓히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상 만물이 지탱하는 저마다의 힘겨운 삶에 대한 공감과 연민은 타자와 함께 조화로운 삶을 모색하는 데로 나아가며 따라서 ‘의자’라는 평범한 사물은 고달픈 삶을 지켜주는 안식처로 화한다.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의자」전문 고달픈 삶에 대한 공감과 연민은 고통에 민감할수록 더욱 깊어지는 법이다. 세상 만물은 저마다 쓰라린 상처를 딛고 성장하고, 시인은 ‘올곧은 열정으로 인해 구부러지는 고통’(「구부러진다는 것」)의 체험을 삶의 스승으로 여긴다. 고통과 비애를 인간뿐 아니라 만물에 편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그의 시에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교감, 인간과 사물 사이의 교감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고장 난 보일러를 뜯었다 쥐똥이 수북했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제 심장 박동 소리와 비슷했을까 절약 타이머에 맞춰 불길이 멎을 때마다 고 까만 눈동자는 뭐라고 깜박였을까 어미를 우러르는 새끼들의 눈망울도 별처럼 새록새록 젖어 있었으리라 쥐 죽은 듯이란 얼마나 한심한 말인가 작은 창 너머로 그가 물어 날랐을 차가운 양식과 시린 앞 이빨이 떠올랐다 세간의 전부였던 똥 한 줌 남겨놓고 어디로 갔을까 세상 어딘가에 분명 사람 다 죽은 듯이란 말도 있으리라 불씨를 살리고 있는 추운 별들 점검해야 할 것이 하늘뿐일까 파르라니, 작은 눈망울들 ─「쥐눈이별」 전문 그러나 시인은 고통과 비애, 그리고 이에서 비롯하는 연민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시인은 힘겨운 삶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웃음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명확히 인식하고 여기에서 힘을 얻는다. 조화롭고 충만한 자연의 본성과 호응하는 그의 시에는 따뜻한 웃음과 해학이 넘친다. 자연 상태라 할 수 있는 동심의 시선이 맑고 천진한 웃음을 낳는다. 자연에 소박하고 친근하게 접근하는 이와 같은 방식이야말로 자연의 본성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그대여/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달은 윙크 한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더딘 사랑」)라든지 “천이백세 살 먹은/내 애인 용봉사 마애불은/천 년 넘게 돌이끼를 입고 서 있다/돌이끼의 수명이 삼천 살 정도라니/내 생애에 옷 한 벌 해 입히기는 글렀다”(「애인」)는 식의 능청스러움과 장난기는 어떤 권위나 차별도 인정하지 않고 대상과 대등하게 눈높이를 맞추는 자유로운 사유에 의해 가능하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혜원은 이러한 이정록의 시를 ‘따뜻한 구상화’에 비유한다.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변모해가고 있는 오늘날의 삶을 차갑고 난해한 추상화와 유사한 것으로 보고 그로테스크한 상상이나 초현실적인 이미지가 증대하고 있는 우리 시의 한 경향을 ‘차가운 구상’의 시로 명명한다. 이와는 반대되는 보다 고전적인 기풍이 흐르는 이정록의 시를 ‘따뜻한 구상’의 시로 칭하면서 차가운 세상 속에 온기와 웃음을 전시인의 시야말로 매우 소중한 존재로 평하고 있다. 평화롭고 풍요로우면서도 소박한 삶, 누구나 알고 있고 꿈꾸는 것이지만 좀처럼 다가가지 못하는 그 세계에 이정록의 시들은 명료하고 단순하게 접근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세상을 그려 보여주고 있다. 내 꿈 하나는 방방곡곡 문 닫은 방앗간을 헐값에 사들여서 술집을 내는 것이다 내 고향 양지편 방앗간을 1호점으로 해서 ‘참새와 방앗간’을 백 개 천 개쯤 여는 것이다 그 많은 주점을 하루에 한 곳씩 어질어질 돌고 돌며 술맛을 보는 것, 같은 술인데 왜 맛이 다르냐? 호통도 섞으며 주인장 어깨도 툭 쳐보는 것이다 아직도 농사를 짓는 칠순 노인들에겐 공짜 술과 안주를 올리고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들에겐 막걸리 한 주전자쯤 서비스하는 것이다 밤 열 시나 열두 시쯤에는 발동기를 한 번씩 돌려서 식어버린 가슴들을 쿵쾅거리게도 하고, 조금은 슬프기도 하라고 봉지 쌀을 나눠주는 것이다 마당엔 소도 두어 마리 매어놓고 달구지 위엔 볏가마니며 쌀가마니를 실어놓는 것, 몰래 가져가기 좋도록 쌀가마니나 잡곡 가마니에 왕겨나 쌀겨라고 거짓 표찰도 붙여놓는 것이다 하고많은 꿈 중에 내 꿈 하나는, 오도독오도독 생쌀을 씹으며 돌아가는 서늘한 밤을 건네주고 싶은 것이다 이미 멈춰버린 가슴속 발동기에 시동을 걸어주고, 어깨 처진 사람들의 등줄기나 사타구니에 왕겨 한 줌 집어넣는 것이다 웃통을 벗어 달빛을 털기도 하고 서로의 옷에서 검불도 떼어주는 어깨동무의 밤길을 돌려주고 싶은 것이다 논두렁이나 자갈길에 멈춰 서서 짐승처럼 울부짖게 하는 것이다 ─「좋은 술집」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