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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세 가지 은유 - 11 영역 - 12 빛나는 워터멜론 - 14 세수 - 18 초록 그늘 - 19 놀이공원 - 20 제로섬 넌 제로섬―디디에게 - 21 수어 - 24 데카르트 악마 - 26 여섯 시 - 28 목장원 - 30 For a few emotions more - 32 처럼과 처음 1992 - 36 조깅 - 38 제2부 눈 - 43 운다고 옛사랑이 - 44 분홍 살점의 미래 - 46 플루트 - 48 리바이어던 - 50 전시회 - 52 저글링 - 54 몰타, 크리스마스 - 56 가정법원 - 58 다른 미래 - 60 매직 2100 - 62 자몽 - 64 비극 - 66 오늘 밤 - 68 클레이 사격장 - 70 스트리밍 - 72 제3부 투 셰프 - 77 능선 - 80 침묵의 나선 - 82 광안대교 - 84 티비 - 86 구름의 사회학 - 88 그림자를 넘기는 북극곰 - 90 첫눈의 에픽테토스 - 92 사월 이십 일 - 96 혜화동 물리학 - 98 스포츠 - 100 현형에게 - 102 제4부 헬스클럽 - 107 Pinch is Chance - 110 팔월 이십사 일 - 112 라이트 플로럴 이퓨션 - 114 시 - 115 춤 - 116 하이 스퀘어 - 118 위치 - 120 기쁨이 자라난 얼굴로 - 122 해설 박동억 불확정성의 시학 - 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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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은유
얼음이 채워진 컵을 든 그 시인과 공원에서 만났다 얼음이 녹고 있는데 다시 얼음이 생겨날 것 같은 눈빛으로 매미 울음마저 얼려 버릴 것 같은 질문으로 몇 시간이 흘렀다 시인이 말했다 풍경을 지배하고 제압하는 우주선이 날았나요 아니요 과잉 금지의 우주선이 날았나요 아니요 지구인들을 완벽히 설득시켰나요 아니요 얼음이 녹여 준 아니요를 다 받아 마시고 나면 굴러다니는 동그란 고요 우거진 공원에 비스킷을 쪼아먹는 비둘기 쥐똥나무 잎에 묻어 있는 새똥들 텅 빈 벤치 위 세 가지 은유가 차이 나는 그가 기다리는 문장이 오지 않는다 다시 올 모든 문장은 벤치에 이미 엎질렀으니까 칠월에서 팔월까지 얼룩진 벤치는 버려야 했으므로 컵 밖으로 몇 방울의 물이 도망치고 남아 있는 질문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우리의 시적 취향은 세 가지로만 존재해요 컵 하나로 모든 비문들이 씻겨 내릴 것만 같았다 what? where? whom? whose? 그는 수많은 말을 했고 그때마다 나는 뒤뚱거리는 비둘기와 새똥 묻은 쥐똥나무를 쳐다봐 주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번들용 맛동산을 먹었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자꾸 빠져나갔다 ■ 매직 2100 겨울을 지우자 다른 겨울이 나타났다 차 한 대 너머 차 한 대 너머 차 한 대 끝없이 줄지어 서 있고 거리엔 생소함이나 우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빡빡머리 신호등 너머 과일 가게 썩은 사과 상자 너머 AI 털모자 속 비둘기 눈물 너머 반복은 서로를 알게 하고 이해하고 쓰다듬고 눈이 내리네 하면 같은 얼굴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우측통행으로 계단을 올라간다 그 계단 위로 사람을 추억하며 눈이 내린다 바코드를 찍는 사람들마다 더욱 훌륭해졌다 겨울은 아름답고 질서 있게 확인되고 카페 의자는 혼자 시를 쓴다 이해가 안 되는 세상에 없는 시를 이 층으로 가세요 진동 콜 벨을 건네준 로봇 점원은 나를 쳐다보며 중요하지 않은 감정 하나를 쌓듯 차곡차곡 꿀통을 쌓는다 ■ 침묵의 나선 선거는 승리가 예상되는 쪽으로 막판에 투표 의사를 바꾼대 애가 셋이나 딸린 홀아비에게 간다고, 미친 거 아냐? 아무리 취직이 어려워도 그렇지 저건 아니지 오레오 바닐라와 그란데 라떼를 시킨다 허기를 달래는 국적 불명의 얼굴로 우리의 식감은 너무나 형편없어서 나는 신영배 시를 속으로 읽는다 말의 색은 물처럼 분명하다 시간이 갈수록 검은색은 더 검게 흰색은 더 희게 구분되어진 채 빙빙 돌아오는 말의 색 숨겨진 의도가 클수록 침묵하는 나선의 밤 변덕스러운 천사가 슬픔과 기쁨을 번갈아 넣고 휘젓는다 돌풍 속에서도 별들은 흔들림이 없다 *침묵의 나선: 노엘레 노이만의 침묵의 나선 이론. 인간에게는 고립의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소수의 의견에 속한다고 느낄 때에는 자신의 의견을 감추어야 한다고 압박을 느껴 침묵의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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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그러니까 이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질문은 누구에게 유리한가 대답 말고, 질문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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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나아가는 일은 다른 병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알약의 이름을 되뇌는 일은 스스로에게 믿음이 필요한 일이다. 알약을 삼키는 사람을 보는 일은 고통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이다. 고통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때 그 감각은 비로소 전이된다. 고통받는 자의 시선이 문장에 맺힌다. 안규봉 시인이 신산한 삶을 선명히 비출 방법으로 택한 것은 아침을 맞이하는 태도일 것이다. 매일 다른 얼굴들을 맞이할 수 있는 공간으로 다가가기. 그래서 시인은 아침부터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간다. “기쁨이 자라난 얼굴로” 다른 얼굴들을 맞이하기 위해서이다(「기쁨이 자라난 얼굴로」).
그러나 모든 풍경은 칼날이고, 그 유리된 풍경의 단면에서 흘러나오는 감각은 모두 혈액이 될 것이다. “폭설 위에 완치라는 나라가 있어”라고 말하며 풍경을 견디는 동안 시인은 많은 약과 많은 시구절을 삼켰을 것이다(「첫눈의 에픽테토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이잖니”라고 말하면서도 응시해야 하는 세상은 버겁다(「빛나는 워터멜론」). 시인은 풍경의 덧없음을 알면서도 “이렇게도 사는 거야”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혜화동 물리학」). 위로하듯 말하면서 풍경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유난히 시인이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연유를 시에서 살핀다. “나는 이식받은 신장을 쓰다듬는다/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기증자의 세련된 감각으로”(「조깅」), “내 안에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사람”과, “둘 중 하나를 잊어야 살 수 있”는 삶을 살아 내는 시인이 있다(「첫눈의 에픽테토스」). 이식받은 장기를 품고 사는 일과 함께 다른 시인의, 다른 예술가의 시선을 이식받으면서도 그 균형을 고민하는 것의 무거움을 우리는 함께 고민하게 된다. 삶에 대한 진술들이 교조적 태도로 읽히기보다는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 진중한 말들을 더 깊이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눈물은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되고/눈물이 새로운 길로 흘러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기쁨이 자라난 얼굴로」). 이렇게 시인은 삶의 비의(悲意)가 비로소 비의(秘義)가 된다는 것을 알고 우리에게 속삭여 준 것이다. - 김건영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