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시인의 말
제1부 닥나무 벚나무 오렌지나무에게로 유월 - 11 첫사랑 - 13 땅콩을 위하여 - 15 식탁의 동물성 - 17 오렌지 - 19 이불의 감정 - 21 내가 버린 여름 - 23 불을 켜는 창문 - 25 파피루스 - 27 구름의 이복들 - 29 꽃병과 트렁크 - 31 룰렛 이벤트 - 33 바구니에 담기 좋은 계절 - 35 간행물 - 37 머리를 흔드는 사람 - 39 그 시인 - 42 밀거나 밀리거나 - 44 겨울 1 - 46 제2부 데미안 비틀즈 소크라테스에게로 장미 - 49 먹구름 속을 나는 새 - 51 비틀거리며 비틀즈에게 - 53 용의자 - 55 어항 - 57 달콤한 삼십 년 - 59 가장 작은 아치 - 61 월요일의 이유 - 63 기분 - 65 터널 - 67 산책 - 69 꽃무늬 원피스 - 72 필경사 - 74 안녕, 요들송 - 76 와이파이 목동 - 78 에펠탑이 보이는 전망 - 80 흰색의 안부 - 82 겨울 2 - 84 제3부 용대리 문래동 페르시아에게로 겨울 3 - 89 불면 - 91 페르시아의 문장 - 93 혁명 - 95 양털을 감으며 - 97 구독 시대 - 99 수금 시대 - 100 연애라는 문명 - 101 스웨터 가족 - 103 사랑이 펴지는 사이 - 105 샵# - 107 사바나식 옥상들 - 109 관리사 - 111 구글 정부 - 114 창업 - 115 방향 - 117 유언 - 118 겨울 4 - 120 해설 신수진 ‘에게로’라는 벡터 - 122 |
임경남의 다른 상품
|
연애라는 문명
수메르로 가자 티그리스강처럼 깊고 푸르러져서 한 삼천 년 동안 나란히 흘러가자 진흙을 구워서 밥그릇을 만들고 진흙을 구워서 아이를 만들고 진흙을 구워서 점토판을 만들자 사랑이 사라지기 전에 점토판에 사랑 이야기를 새겨 두면 삼천 년 후의 아이들이 우리의 사랑을 읽겠지 쐐기문자로 발굴되겠지 사랑은 초승달 지대에서 더욱 비옥해지고 그것이 사랑의 기원이라고 다시 삼천 년이 흐른 후에 사람들은 박물관처럼 신기해하겠지 티그리스강을 따라 삼천 년을 더 흘러가면 그때는 결혼 같은 건 하지 말고 연애만 하자 그래야 연애가 문명이 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여전히 진흙으로 발견될 테니까 인스타에 육천 년 전의 노을을 남기고 우리는 우리에게 새벽이 되자 삼천 년 동안 지구는 낡고 사랑은 고유명사가 되었지만 티그리스강은 여전히 푸르고 정복보다 긴 사랑이라는 문명 삼만 년은 더 흘러가 보자 ■ 겨울 3 기차는 얼마나 길어야 기차가 되나 하나의 역을 기차 첫 칸부터 마지막 칸까지 한 석 달 지나갈 수 있어야 기차지 겨울을 다 사용해야 기차지 겨울에서 봄까지 승차도 하차도 할 수 없는 기차가 하얀 목도리를 두르고 폭설 속으로 떠났다 사이다와 계란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시속 3㎞로 달리는 기차를 향해 손 흔드는 사람은 없어 손 흔드는 사람이 없는 철길을 옥수수밭은 더 이상 지켜 주지 않지 겨울 해는 게을러 하지만 기차는 더 길고 더 느려 용대리 황태 덕장을 지나 민통선을 지나 한 석 달 허연 입김 앞세우고 김 오른 우동 한 그릇 나눠 먹으며 나무가 나무 앞에서 사라지고 길은 길 뒤에서 사라지는 풍경만 계속되어야 기차지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던 계절이 있기나 했나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던 키스가 있기나 했나 생각하는 사이 기차는 느릿느릿 겨울에서 봄까지 머리에서 꼬리까지 터널을 다 지나는데 한 주일은 써야 기차지 벙어리장갑처럼 얼어 버린 세계를 다 지나가야 기차지 ■ 수금 시대 시화공단 가로수 길을 지나갑니다 은행잎이 떨어집니다 나무가 은행잎을 떨구어 내는 행위를 송금이라 하고 내가 은행잎을 줍는 행위를 수금이라고 정의해 보는 십일월입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잎을 어떤 사람은 책갈피에 남기고 어떤 사람은 김소월의 시처럼 사뿐히 즈려밟고 갑니다 그렇게 남편이 거래처 사무실로 올라간 후 나는 미완성의 문장을 완성하려 은행잎 한 장을 고르는 중입니다 미뤄 둔 문장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천지에 쌓인 은행잎처럼 남편은 밀린 수금을 할 수 있을까요? 남편이 수금하는 방식이나 시인이 문장을 거래하는 방식은 같아서 한 장 한 장 성실하게 주워 모아야 합니다 남편은 어떤 방식으로 거래처 책갈피를 뒤져 숨긴 은행잎을 찾아낼까요? 나는 어떤 방식으로 책갈피 사이에서 숨은 은행잎을 날려 밤을 뒤척이게 할 나비를 묘사할 수 있을까요? 수금을 잘하는 어떤 시인은 시집 한 권으로 큰 상을 받았고 남편은 수금하느라 청춘을 다 써 버렸습니다 나는 은행나무 아래를 서성이며 어느 쪽의 수익률이 더 좋았는지를 계산해 보는 중입니다 남편은 아직 사무실에서 내려오지 않고 노란 길이 다 사라지기 전에 노란 길을 수금하며 나는 가로수 길을 걷고 ■ |
|
[시인의 말]
가끔 사랑하는 동안 여러 번 이별하는 동안 |
|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삶과 함께 던져진 시공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롭게 이동하고 움직일 수 있는가. 문학은 우리에게 공상적 이동 경로를 제공한다. 새롭게 구성된 삶의 지도 입구에서 “의자는 달콤한 과일나무가 되어/서른두 마리의 갈매기”가 열린다(「오렌지」). ‘나’는 의자가 과일나무가 되고 과일이 갈매기가 되는 세계로 모험을 떠난다. 비극이나 서사시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우리는 인간성을 증명하기 위해 끝없이 여행을 떠난다. 고난과 고통을 껴안고서라도 온전한 삶을 살아 내기 위하여, 비루한 삶의 정수를 채취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우리가 결국 신이나 괴물과는 다른 문명과 문화가 있는 인간임을 재현한다. 우리는 “승차도 하차도 할 수 없는 기차가 하얀 목도리를 두르고 폭설 속으로 떠”난다(「겨울 3」). 먼 미래와 공백으로 남은 페이지가 우리를 공상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이유는 지금-여기에서 ‘당신’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손잡이가 없는 당신”을 잡으려고 할 때마다 흘러내리고 “물방울”로 변한다(「겨울 2」). ‘나’와 ‘당신’의 어긋남. 비춰 볼 순 있지만 영원히 만질 수 없는 거울. ‘나’는 ‘나’의 도플갱어이다. ‘내’가 ‘당신’을 생각하며 문장을 쓰려고 하면 “다닥다닥 닥나무가 열리고”(「파피루스」) “미래는 마리화나 같아서/현재는 연기처럼 사라”진다(「비틀거리며 비틀즈에게」). 인간은 모험을 떠난다. 자유의 자유를 찾는다. ‘나’는 가시 가득한 장미꽃을 결국 두 손으로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운명과 사랑의 힘을 기어코 확인하기 위해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 [비틀거리며 비틀즈에게]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꿀처럼 흘러넘친다. - 정우신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