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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돌 하나를 집어 드니 돌 하나를 집어 드니 손맛 변소를 화장실로 부르기 시작했을 때 고둥 능숙한 수리공 라디오 여왕 방아쇠를 당긴 여자 가슴이 쿵쿵거리는 까닭 즐거운 감옥 장마 동백 웃음은 모음이 맞네 夢돌 오래된 책 나 혹은 낯선 폭설 2부 맛있다! 오아시스 그녀 화살표를 따라 걸어요 벌초 내 몸 개펄 얼음을 깨물다 나무의 이사 운수 좋은 날 맛있다! 발 항아리 달집이 탄다, 숙아 지게 평화시장 뒷골목에 비가 내린다 3부 수화기 속의 여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꽃게여자 민방위 대원 김길덕 씨 부탁해, 라는 구름 풀 1 눈치 서바이벌 게임 홍합 타래난초 수화기 속의 여자 일용직 정씨의 봄 항남우짜 동화 속 잘려나간 페이지 충무교 위의 여자 날아라 가오리 가을을 보내는 법 4부 그 동네 신발들은 공손하지 않다 수인번호 불안 적색경보 지루한 식사 위험한 골목 번지점프 풀 2 장승 악수의 추억 팽팽히 돌던 일상이 깨어지다 안녕, 치킨 방울토마토 벽 숲이 베어지고 없는 날에 새는 어느 가지 위에서 우는가 그 동네 신발들은 공손하지 않다 해설 날아라 가오리 | 고봉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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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맛
식당에서 찌개를 먹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누군가 이십 년 된 손맛이라 일러주었다 끄덕끄덕 주방 아주머니 손을 훔쳐보았다 식당 마루에 세 살 남짓 아이가 걸어가더니 화분의 몽돌을 집어든다 누구 손맛인지 예쁘게 키웠다 매일 기저귀 갈아주고 이불 덮어 주고 먹여 주고 닦아 주고 업어 주고 쓰다듬으며 키웠을 손을 생각해 보는 것인데 몽돌이 떼굴떼굴 구른다 부드러운 저 몽돌은 어느 바닷가 파도의 오래된 손맛이다 후식으로 나온 사과도 비와 바람과 햇빛의 손맛이고 사과나무 돌보던 농부의 손맛이다 손바닥을 펴 본다 손 안의 세상이 미지의 눈으로 꿈틀거린다 길가 벚나무의 수많은 손가락이 꽃눈을 밀어 올리던 맛있는 봄날 전화가 왔다 바빠도 밥은 꼭 챙기 묵그라 수화기에서 나온 어머니 손이 물비늘처럼 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p.14 수화기 속의 여자 어디서 잘라야 할지 난감합니다 두부처럼 쉽게 자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어딘지 서툰 당신의 말, 옛 동네 어귀를 거닐던 온순한 초식동물 냄새가 나요 내가 우수고객이라서 당신은 전화를 건다지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수고객이었다가 수화기를 놓는 순간 아닌 우린 서로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선생님, 듣고 계세요?’ ‘……네’ ‘이번 보험 상품으로 말씀드리면요’ 나와 처음 통화하는 당신은 그날 고개 숙이던 면접생이거나 언젠가 식당에서 혼이 나던 종업원이거나 취업신문을 열심히 뒤적이던 누이 당신은 열심히 전화를 걸고 나는 열심히 전화를 끊어야겠지요 어떡하면 가장 안전하게, 서로가 힘 빠지지 않게 전화를 끊을 수 있을까요? 눈만 뜨면 하루에게 쉼 없이 전화를 걸어야 하는 당신 죄송합니다 지금 저 역시 좀처럼 대답 없는 세상과 통화 중입니다 뚜뚜뚜뚜 --- p. 92 날아라 가오리 자갈치역 지하도 납작 엎드린 등. 쏟아지는 눈길. 껌처럼 달라붙은 저 눈빛을 어디서 보았더라? 며칠 전 어시장 좌판, 큼직한 날개를 펼치고 엎드려 있던 더 할 말 없다는 듯 아랫배에 입을 숨기고 있던 가오리, 버스가 서지 않는 오지의 지명처럼 쓸쓸히 지나쳤던 그때 그 가-오-里, 바람 부는 날 십리를 달고 온 가방을 던져 놓고 팽팽한 연줄에 가오리를 달면 갯바람은 손을 쥐락펴락 둘둘 얼레를 풀고 가오리 한 마리 꼬리를 흔들며 하늘바다를 헤엄쳐 올랐지 하늘은 제 몸에 얼마나 많은 칼날을 숨기고 있었던가 어지럽게 돌다 바닥에 머리를 처박던 가오리 뒤돌아보았을 때 가재미눈을 닮은 생선가게 그 여자 도마 위에 펼쳐진 가오리의 날개를 냉큼 잘라 버렸었지…… 지하철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에 씁쓸히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긴 통로를 숨 가쁘게 달려온 바람, 죽은 듯 엎드린 그의 등에 펄럭, 손을 얹는다 --- p.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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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건져 올려낸 우리 시대의 음화陰畵
이명윤의 시는 ‘일상’에서 출발한다. 그의 시에서 ‘일상’은 그저 반복되는 권태의 시간이 아니라, 매순간 경험하는 상처(傷)의 시간이다. 그의 시편에서 삶의 풍경들은 자본주의의 가치법칙에서 소외된 곳에서 펼쳐지고, 이 사회의 변방으로 내몰린 인간들의 삶은 ‘상습침수지역’ 같은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전개된다. 그곳에서의 삶은 “정착할 수 없는 날들”(「꽃게여자」)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이명윤의 시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들의 삶은 가파르고 고되다. 세 아이의 엄마이지만 밤이면 ‘미스 홍’으로 불리는 여자(「꽃게여자」), 질서와 권위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자행된 국가폭력의 희생자 “민방위 17년차 김길덕 씨”(「민방위 대원 김길덕 씨」), 근무 도중 척추를 다쳤으나 산재 판정도 받지 못해 옛 동료들을 찾아다니며 살아가는 사내(「부탁해, 라는 구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하는 “음지에 사는 눈치들”(「눈치」), 전화를 걸어야 사는 여자와 그 전화를 끊어야 하는 남자(「수화기 속의 여자」), 밤마다 매춘의 대상을 찾아나서는 열일곱의 소녀(「방울토마토」)……. 자갈치역 지하도 납작 엎드린 등. 쏟아지는 눈길. 껌처럼 달라붙은 저 눈빛을 어디서 보았더라? 며칠 전 어시장 좌판, 큼직한 날개를 펼치고 엎드려 있던 더 할 말 없다는 듯 아랫배에 입을 숨기고 있던 가오리, 버스가 서지 않는 오지의 지명처럼 쓸쓸히 지나쳤던 그때 그 가-오-里, -「날아라 가오리」부분 시인은 우리 사회의 낮은 곳에서 한 시대의 음화(陰畵)들을 건져 올린다. 화자는 자갈치역 지하도에서 납작 엎드린 채 살아가는 한 생과 마주한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생선가게 여자가 가오리의 날개를 자르는 장면에서 우리는 잠시 동안의 전율을 경험한다. 세상의 법칙은 “날아라 가오리”라는 시인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오리의 날개를 절단한다. 시인은 항상 낮은 곳, 변두리의 삶에 시선을 던지고 있지만, 인간적 위로나 근거 없는 희망에 기대지 않은 채 현실을 직시한다. ‘불안과 공포’라는 도시의 표정들 이명윤의 시에서 도시는 불안과 공포의 장소이다. 또한 도시는 가난한 삶들이 더욱 가난하게 되는 불행의 공간이면서, 그 불행 속에서나마 비루한 일상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삶의 공간이다. ‘공포’와 ‘불안’은 도시의 표정이다. 이 공포와 불안의 심리 상태는 도시에 거주하는 인간들에게, 우리 모두에게, 일상적으로 경험된다. 은행에서 목돈을 찾아 나오는데 누군가 뒤를 밟는 느낌이 있었다 불안은 밤색 모자를 눌러쓰고 봄날에 어울리지 않는 점퍼를 걸쳤으며 가슴은 뭔가로 부풀어 있었다 -「불안」 부분 화자는 ‘목돈’을 찾으면서부터 ‘불안’에 시달린다. 그러므로 불안은 부재, 즉 없음에 대해 느끼는 결핍감이 아니라 현존하는 무엇이 불현 듯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에서 촉발되는 심리이다. 우리의 경험이 증명하듯이, 이러한 이상심리는 화자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대적인 징후이다. 한편 「위험한 골목」에서는 ‘구멍’ 이미지를 통해 도시적 삶의 암울함을 타전한다. 그러나 자본이 지배하는 일상에서 이 공포와 불안으로부터의 탈출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동차가 고양이를 먹고, 스승이 제자의 치마를, 어린 소녀를, 수험생을, 남편을, 신용불량자를 삼키는 곳, 시인은 그 세계를 “참혹한 도시”(「적색경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시집 『수화기 속의 여자』는 ‘비판’보다는 ‘긍정’, 도시적 일상보다는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모색이다. 그렇다. “봄은 모든 곳에서 피어날 권리가 있다”(「풀 2」). “해마다 망각을 찢고 불쑥 불쑥 세상을 겨누는/ 저 붉은 총구”(「동백」) 같은 ‘동백꽃’이나 “그래 뿔이었다/ 뿔이 힘이었다”(「지게」)에서 ‘뿔’의 형상은 그 긍정과 모색의 환유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