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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생각을 훔치다 늙은 밥솥을 위하여 낮술 쉰 …그냥…지난번처럼 과속방지턱 고등어를 굽다가 사람이 시보다 크다 시를 쓴다는 일 다모아마트에 가야 한다 풀독 뒤늦게 니우스 신호 대기 꼬리 마라도 유람선 생각을 훔치다 2부 시가 사라졌다 새 내리사랑 어머니의 전화 밤고냉이 매제 고맙다, 는 말 유언 달과 박 시가 사라졌다 내 마음의 지도부 슬프지 않다 T11 샌들 그 손의 이름을 물을 수 없었다 비 오는 날 깨밭 할망 하르방 그래도 믿어야지요 여름날 오후 3부 차르륵! 차르륵! 산벚나무 그늘 아래서 봄길에서 억새에 관한 망상 따라비오름에서 낙엽 초가 나무는 겸손하다 곶자왈 동백 절물 까마귀 수선화 해안 도로에서 겨울산 대맹일 써사 헌다 풀빛 차르륵! 차르륵! 서모봉 쑥밭 잔칫날 판결 일강정이 운다 모를 것이다 이제는 함께해야지요 해설 지천명의 인식적 전회, 그 시적 성취 |고명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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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훔치다
꽃은 하늘 올려다보면서 올까 말까 비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갈까 말까 --- p.32 늙은 밥솥을 위하여 한땐 그랬다 저 밥솥처럼 씩씩거리다가 더 내지를 소리 없어 숨이 막힐 즈음이면 마지막 탄성으로 뜨거운 콧김 길게 내뿜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소곳해졌다 이젠 늙은 밥솥을 이해할 나이 겉은 제법 번지르르하나 속내 들여다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다 콧김은 잦아들고 잠잠한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고슬고슬한 밥은 간데없고 늘 타거나 설었다 늙은 밥솥 하나 흐린 정물처럼 고즈넉하다 --- p.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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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시인 김수열의 네 번째 시집 『생각을 훔치다』가 출간됐다. 시집에는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서며 얻은 삶의 오묘함과 비의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역사의 굴곡에 맞서며 “쉰”에 이른 개인의 내면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시 쓰기에 관한 인식 또한 이전과 달라진다. 시인은 이제 조바심 내지 않고, 낮은 자세로 지천명의 참뜻을 시 쓰기로 실천한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쉰”을 넘어선 길목에서 이번 시집은 앞으로 시 세계에서 이룰 시적 성취와 행보를 기대하게 만든다.
성찰과 깨달음, 지천명의 시 쓰기 『생각을 훔치다』에서 “쉰”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너무 아득하여 누군가/ 손잡아주지 않으면 못 닿을 줄 알았”(「쉰」)던 ‘지천명’을 맞이한 시인은 삶의 진실의 가치에 주목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적으로 성찰한다. 시인은 고등어를 굽다가 잘못 구워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생선을 보며 자신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고등어처럼 막 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근심하기도 하고(「고등어를 굽다가」), “인생에게 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낮술」)이 낮술의 참맛을 알게 된다고 함으로써 애써 인생을 이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지천명에 얻은 깨달음은 시 쓰기에 대한 인식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시에 대한 관점을 기존 통념에서 획기적으로 전회(轉回)시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도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전까지 가졌던 반드시 ‘좋은 시’를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시의 구속에서 벗어나 시 쓰기에서 자유자재의 경지에 이르기를 원한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선배(아니, 선생뻘 되는) 시인과 우연히 통화하다 한 말씀 듣는다 많이 써 되든 안 되든 많이 써 요즘 시인들 너무 안 써 쥐어짠다고 시가 되나 쓰다가 안 되면 그것도 시야 -「시를 쓴다는 일」부분 또한 쉽지 않은 시적 깨우침을 실천하기 위해 “‘진정한 시인이란 시를 버릴 줄도 아는 사람”(「내 마음의 지도부」)이 되고자 한다. 결국 시인에게 ‘진정한 시인’이란 관념과 추상을 벗고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삶의 정치성과 시적 정치성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낮은 자세로 품어 안는 겸허함 김수열의 시들은 제주의 돌담을 연상하게 한다. 현무암의 숭숭 뚫린 구멍의 몸으로 바람의 길을 내주듯 모든 것을 품어 안기 때문이다. “잠시 몸을 낮추고 들여다보면/ 붉은 그 마음 거기 있”(「곶자왈 동백」)다거나 “겨울산을 오른다는 건 나무가 되”고 “겨울산을 내린다는 건 바람이 되는 것”(「겨울산」)이라며 자연에 자신의 시선을 맞춘다. 일상을 바라보는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특히 험한 풍파를 견뎌온 이들의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을 보여준다. “파치 할머니”와 “고구마 할아버지”(「여름날 오후」)가 투닥거리는 모습이나 미역을 캐러 새벽일을 나간 할머니가 돌아올 때면 “빈 비료 포대 실은 경운기 탈탈탈 끌고 와/ 망사리 끈 풀어 메역을 담”는 (「할망 하르방」) 할아버지의 고단한 일상을 묵묵히 관조하되, 어떻다는 가치판단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물오른 가지마다 새순 돋고 크고 작은 잎사귀들은 밥 짓는 소리 다투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에 마음 열고 지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귀 기울인다 까치밥 남기고 무성한 잎사귀들을 내려놓을 즈음 그리움도 외로움도 안타까움도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나무는 한때 세상을 향해 열어두었던 귀 닫고 동안거에 들어 묵언정진한다 -「나무는 겸손하다」부분 나무가 “동안거에 들어 묵언정진”하듯, 시인의 묵언정진은 “마음 열고 지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귀 기울”이는 일이다. “살아 있는/ 온갖 것들 품고”(「강」) 있는 “강”을 닮은 포용의 정신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그의 시들은 겸허한 자세를 밑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하여 어떤 꾸밈과 겉치레도 없이 담백하며 진솔하다. 이원규 시인은 이를 일컬어 “실로 오랜만에 인공 조미료를 치지 않은 시의 진경, 원석(原石)을 보았다”고 말한다. 시인은 지금까지 꾸준히 천착해온 제주와 제주어에 관한 애정 역시 놓지 않는다.「풀빛」「차르륵! 차르륵!」처럼 4?3의 폭력적 실상과 “막 울렌허라 울어부러사 애산 가슴 풀린다”(「어머니의 전화」)에서 보듯 제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오묘함을 제주어를 통해 낱낱이, 섬세하게 드러낸다. 이로써 새로운 시적 태도를 갖고 세계악에 맞서려는 시적 쟁투 또한 포기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