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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김민정
문학과지성사 200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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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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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저자 소개 1

1999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산문집으로 『읽을, 거리』 『역지사지』가 있다. 박인환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이상화시인상, 올해의 젊은 출판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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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12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30쪽 | 208g | 130*204*20mm
ISBN13
9788932020204

책 속으로

별의별

오줌이 마려워 절로 눈을 뜨는 아침입니다 어제 나는 똥을 참았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그이처럼 문틈 너머 엿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벼운 노크가 두어 번 반복될 적마다 그녀의 향수가 두어 번 코를 쳤습니다 냄새를 들키면 평생을 져야 합니다 작별의 키스 직전 it's time, 이도 실은 이를 닦기 위해서였다나요 똥을 밀어 올리고 오줌을 끌어내리는 수축과 팽창의 피스톤 놀이 속에 별의 안부는 바야흐로 산란기였습니다 어린 날 나를 때린 한 소년의 눈에서 별이 사라질 때, 얻어맞은 내 눈에서 무지개떡 색동으로 그 별이 와 빛날 때, 별 본 일 없음보다 별 본 일 있음으로 나는 위풍당당 행진곡에 홀로 발맞출 수 있었습니다 가끔씩 출근길에 넘어져 지각 대신 푸른 멍을 연유 삼는 이유, 그거야 뭐 이따금씩 문어발 식 댄스가 땅길 때도 있는 거니까요 오줌을 누고 밑을 닦은 휴지에 빨간 고춧가루 한 점 하마터면 별인가, 콕 집을 만큼 반짝거렸습니다 변비에는 역시 비코그린보다 알알이 다시마 환이 최고라는 생각입니다

--- p.19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천안역이었다
연착된 막차를 홀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톡톡 이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플랫폼 위에서 한 노숙자가 발톱을 깍고 있었다
해진 군용 점퍼 그 아래로는 팬티 바람이었다
가랑이 사이로 굽슬 빠져나온 털이 더럽게도 까맸다
아가씨,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이거 말고 자판기 커피 말이야 거 달달한 거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서울행 열차가 10분 더 연착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전광판 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천안역두리인력파출소
안내시스템 여성부 대표전화 041-566-1989
순간 다릅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졌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였던가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던 밤이었다

--- p.95


어느 날 가리노래방을 지날 때

‘양서점’이나 ‘님짜장’*처럼 글자 하나 툭 떨어진 의외의 간판으로 마음 쿵 하는 경우야 참 흔하다지만 그래도 발견하는 재미 꽤 쏠쏠하여 길 가다 우뚝 멈춰 설 때가 있지 대낮이라 더 깜깜한 거기 그 가리, 가리노래방 아래 나는 서 있었고 그건 배호나 고복수를 불러젖힐 때의 아버지처럼 비장을 건드리는 것이어서 나는 씁쓸과 쓸쓸 사이에서 적확이나 가늠하는데

그때 들리는가, 모래바람이 인다고 했지 모래 알갱이도 잘근잘근 씹힌다고 예가 사막인가 신발 벗으니 모래 발도 탈탈 털린다고 누군가는 말하였고 어떤 분은 말씀하셨는데 그게 무슨 멍게 여드름 짜는 소리래요 닭살이나 긁는 나는 뱀살이나 비비는 나는 모레도 아니고 모래라니까 매일 아침 이 거리를 조깅하는 아가씨 발목에 찬 모래주머니라도 찢어볼 요량으로 칼이 좋을까 모종삽이 좋을까 펜을 고르는 재미로다 詩라 하였는데

그건 아니라 하고 그건 틀렸다 하고 초 없이도 굳은 심지를 토하는 그분께선 부르면 답이요 받아 적으면 詩라 하였는데 초인이신가 만주 벌판에서 말 타고 오신 선구자신가 농담인데 장난도 인생인데 왜 버럭 성을 내고 그러실까 이런 데서 화내시면 얼어 죽는다는 노래나 아실랑가 내 썰렁함의 전언은 바라건대 유머 일번지의 최양락처럼 안 괜찮아도 괜찮아유 하는 것일진대 목도리는 왜 겹겹으로 싸고 그러실까 가리 하면 오리도 있지 않을라나 내 썰렁함의 두 번째 전언은 바라건대 일밤의 김정렬처럼 안 당당해도 숭구리당당으로 힘없으면 다리 풀면 될 것일진대 이빨은 왜 앙다물고 그러실까

‘용’이라는 붉은 간판 이고 나오시는 주인아저씨는 ‘가리’와 ‘용가리’ 사이에서 아슬아슬 시소를 타는 우리들의 詩 를 알까나 모를까나 어쨌거나 우리들의 詩는 오늘도 우리들의 오버로만 돌고 돌아 빙고!

*‘양서점’은 유강희 시인, ‘님짜장’은 이규리 시인의 시 제목에서 빌려옴.

--- p.98

출판사 리뷰

언어유희로 빚어낸 감각의 깊이,
그 속에서 흐르는 그녀의 위풍당당 행진곡


악몽 속을 날아온 고슴도치 아가씨
예컨대 그녀는 “미친년 널 뛰듯이”라는 말로 표현된 시인이다. 그녀의 첫 시집을 “상처를 무대에 올려 집요하게 반추하고 이를 감각적으로 재구성하여 독하게 극복한다”라고 평한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그녀가 한국 여성시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선배들이 간혹 매달렸던 원한과 신파가 없는, 힘이 센 변종이라고 역설하면서 한 말이다.
2005년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를 펴내며 2000년대 한국 시단에 반가움과 난감함을 동시에 던져주었던 김민정.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금, 많은 기대와 궁금증 속에, 두번째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날 세운 고슴도치가 되어야 했던 한 아가씨가 “여기저기 날아든 담뱃불로 지져진” 채 “폭죽처럼 하늘을 향해 쏘여”져, 저 끔찍한 악몽을 지나 도착한 여기는, 한 여자가 발목과 발목 사이에 팬티를 걸치고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서 우뚝 서 있는 곳이다. 삐죽삐죽한 가시는 불이 붙어 악몽 속 주인공들에게 발사되었고, 가시에 감춰졌던 그녀의 여린 속살이 드러났다. 이제, 민감한 그 속살의 감각들이 시가 되어 찾아온다.
원한과 신파도 끼어들 틈이 없는 김민정 시인의 힘은, 누군가에게는 거북하고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짜릿하고 통쾌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솔직한 언어에서 나오는 듯하다. “많은 경우 구어체를 이루고 있으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비어와 속어와 육두문자를 제 것으로 감싸 안는”(이장욱) 그녀의 언어는 이번 시집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또한 “기표와 기의의 간극을 최대한 확장해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기표 놀이와 “흡사 아이의 그것처럼, 지독하리만치 철저하게 유희를 수행”(강계숙)하는 언어도 이번 시집에서 여전히 빛을 발한다. 그런데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도 그럴 것이, 시인도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고.

가벼움과 천진함에 담긴 감각적 깊이
전작에 수록된 작품들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와 “악몽 자체를 현현하는 문장들”(이장욱)로 “희극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유희가 아니라 그러한 웃음을 거세하고 차단하는 ‘검은 유희’”(강계숙)를 담고 있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꿈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현실”(김인환)을 농담과 익살을 더해 펼쳐놓는다.
이번 시집에 수록되기도 한 2007년 제8회 박인환문학상 수상작 「어느 날 가리 노래방을 지날 때」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를 “농담”이라고, “장난도 인생”이라고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 상의 심사를 맡은 최승호 시인은 “희망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는 농담, 넉살, 패러디, 난센스, 해학, 언어의 유희, 동화적인 환상 같은 것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끌어다가 시 속에 집어넣으면서 비빔밥처럼 맛깔스러운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만들어낸다”는 평으로 그녀의 변화에 힘을 실어주었다. 또한 그는 “입심이 좋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제멋대로인 시인이다. 그만큼 자유롭고 개성이 있다. 시 속의 장난기는 의식의 가벼움이자 천진성이기도 하다”는 말로 김민정 시인에 대한 인상을 밝히기도 했다. “제멋대로인 시인”이라는 혐의는 우리가 흔히 시에서 기대하는 질서와 형식을 거부하는 데에서 연유된 것일 테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분방한 시인의 개성이 가진 힘은, 그녀의 시가 결코 가벼운 농담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 힘은 바로 ‘깊이’이다.
문학평론가 김인환은 “김민정의 시에는 질서가 없는 대신에 깊이가 있다. 그녀는 심연을 보고도 용기가 헌앙한 탐험가이다”라고 이번 시집의 해설에 적고 있다. 문학평론가 고 김현의 글이 2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김민정의 시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다.


세상이 더럽고 추하고 짐승스럽다고 하더라도, 더러움이, 추함이, 짐승스러움이 세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 더럽고 추하고 짐승스럽다면, 우선, 세상이 더럽고 추하고 짐승스럽다고 말해야 한다. 아니다, 우선, 세상은 더럽고 추하고 짐승스럽다.

세상이 깨끗하고 맑고 고귀하다고 하더라도, 깨끗함이, 맑음이, 고귀함이 세상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 깨끗하고 맑고 고귀하다고 말해야 한다. 아니다, 우선, 세상은 깨끗하고 맑고 고귀하다.

그러나 시는 세상이 아니다. 시는 언어가 매개한 세상이다. 그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언어가 매개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들어가 보면 언어도 세상도 없고, 거북함, 불편함, 편안함, 즐거움의 감각적 깊이만이 있다. 그것들을 논리화하게 되면, 우리는 때로 시의 세계에 있고, 때로 세상에 있다.
-김현, 문학과지성 시인선 48 『앵무새의 혀』

김현이 위의 글에서 밝히고 있는 시의 모습은, 이번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김민정 시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녀의 언어가 매개가 된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언어도 세상도 사라지고 불편함, 씁쓸함 등의 감각만이 남는다. 그 감각의 깊이가 이번 시집이 갖는 가장 큰 힘인 것이다.

始作이라는 이름의 詩作
첫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로 돌아가보자. 그 시집의 마지막에 놓인 시는 「陰毛 한 터럭 속에 세상 모든 陰謀가 다 숨어 있듯이」이다. “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의 ‘단추’를 위하여”라는 부재를 달고 있는 이 시는 마치 시인의 다음 시집을 향한 예언처럼 보인다.
“벙어리의 합창 속에서 유일한 목소리가 되어” “꿋꿋이 버”틴 “외투와 제복에 붙어 있던 그 단추”(즈비그니에프 헤르베르트, 「단추들」)처럼 “미처 다 안 뽑혀버린” “陰毛”에 숨은 “陰謀”(「陰毛 한 터럭 속에 세상 모든 陰謀가 다 숨어 있듯이」)를 드러내기 위한 유일한 목소리로 그녀는 또, 태어난다. 그리하여 이번 시집에 이르러, “陰毛”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세상이 규정한 아름다움의 결격사유가 될 수밖에 없는, 마르크스도 미처 예상치 못했을 불평등이 바로 그 “陰謀”였음(「陰毛라는 이름의 陰謀」)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번 시집 마지막에 놓인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에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인에게 그 여자 육상 선수는 단순한 세계 신기록 보유자가 아니다.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그녀의 기록은 시인에게 “죽어서도 살아 있는” 詩다. 그녀가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 1998년. 다음 해인 1999년에 김민정은 시단에 데뷔했다. “초콜릿색 피부에 컬러풀한 경기복, 마른 미역단 같은 머리칼에 짙은 색조 화장, 길게 이어 붙인 색색의 이미테이션 손톱”을 하고 출발선에 선 플로렌스 그린피스 조이너의 모습에 시인 김민정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 둘은 소실점이 되어 하나로 만난다. 하여 “세상에서 가장 빠른 여자의 역사”는 죽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김민정 시인은 늘 시집의 마지막에 다시, 태어나거나 출발선에 선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詩作은 늘 始作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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