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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를 발간하며 / 김찬동
둥지의 예술철학 / 박이문 강의를 시작하며 1강│미학과 예술철학 1. 미학과 예술학 2. 미학의 문제 3. 예술의 문제 2강│예술의 전통적 정의 및 단토의 예술정의 비판 1. 전통적·전형적 정의 2. 근대적 예술관 3.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아서 단토의 예술의 정의 4. 단토의 정의에 대한 비판 3강│예술작품의 양태적 정의 1. 예술작품의 비시각적 존재론적 구조 4강│예술작품의 구조적 모델로서의 둥지 1. 순수예술과 비순수예술 2. 좁은 뜻 즉 순수한 예술의 특수성 3. 영원한 둥지 리모델 작업으로서의 예술작업 강의를 마치며 예술적 상상력과 동양의 사고 / 임태승 1,2강│동아시아 미학의 구조와 성격 1. 동아시아 미학범주 2. 사의상징 3. 도상해석학아이콘과 코드시각 이데올로기 3,4강│동아시아 미학의, 디지털 미학을 위한 제언 1. 디지털 미학의 특성 2. 디지털 미학의 문제와 한계 3. 동아시아 미학의 알고리즘 4. 동아시아 미학이 디지털 미학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현대미술과 철학의 이중주 / 이광래 1강│미술과 동일성 신화 1. 동일성, 그 신화와 역사 2. 미술과 동일성 신화 2강│차이의 철학과 차이의 미술 1. 차이의 발견 2. 차이의 생산 3강│엔드게임으로서 현대미술 1. 엔드게임하는 미술사 2. 엔드게임의 방법적 특징 4강│미술의 종말과 그 이후 1. ‘이게 미술이야!?’ 2. 미술의 종말과 그 이후 철학의 눈으로 본 매체 / 조광제 1강│근대의 매체 변화와 의식 및 사회 변화 1. 거울 2. 구텐베르크 은하계 _ 책의 시대 2강│매체로 본 탈근대의 시작 1. 사진술 2. 영화 3강│고도과학기술에 나타난 매체의 혁명 1. 가상현실 2. 유비쿼터스적인 제3공간 4강│전자공간의 형이상학 1. 디지털 _ 컴퓨터 세계의 형이상학 2. 존재 질서의 재편 _ 사이버 전자공간의 등장 3. 인터넷의 지배와 정체성 변화 4. 인터넷 전자공간과 포스트모더니즘 찾아보기 |
PARK, EEE-MOON,朴異汶, 본명:박인희(朴仁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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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년 시절부터 ‘예술’을 정의내릴 수 없었고, 철학적으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것을 다만 ‘좋은 것’, ‘멋있는 것’, ‘아름다운 것’으로 믿어왔었고, ‘시’를 정의할 수 없었지만 무엇인가를 써서 그것을 ‘시’라고 불렀다. 나는 어떤 글을 시라고 부르고, 어떤 그림이나 사진이 미술인지를 구별해왔었고, 어떤 소리를 ‘음악’이라고 구별할 수 있다고 믿어왔고, 어떤 사람들을 ‘예술가’, ‘시인’, ‘소설가’, ‘화가’, ‘조각가’, ‘음악가’라고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세잔, 피카소, 뒤샹, 칸딘스키, 클레, 폴록, 워홀 등의 화가들, 브르통으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자들이나 이상 같은 이상한 시인들, 존 케이지 같은 작곡가, 크리스토 같은 설치 미술가들, 백남준 같은 전자설치 조각가들이 출현하고, 오늘날 수많은 갤러리에서 볼 수 있는 쓰레기나 부서진 자동차, 넝마 같은 것들을 전시하는 이른바 전위적인 설치 미술가들을 만나면서부터 나는 갈수록 ‘예술’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예술과 비非예술작품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함축한다. 동서의 유명한 예술가, 시인 그리고 철학자들의 수많은 ‘예술’의 정의를 접해봐도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둥지의 예술철학’ 박이문
서양에서는 어떤 화가가 자기의 그림을 그려놓고 내가 이 그림을 왜 그렸는지 모르겠다고 할 수 있다. 뭘 위해서 그렸는지 모르겠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그림의 해석은 보는 사람의 자유다,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다, 이것이 예술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예술에서는 이런 것들이 통하지 않는다. 특히 문인화文人畵로 말하자면,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그림을 설명해보라 했을 때 어떻게 해서 이 그림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 그림이 무얼 뜻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일단 문제가 된다. 사실 왜 그렸는지 모를 수는 있다. 그림이 무의식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무의식을 설명할 줄은 알아야 한다. 왜 그렸는지 정확한 이유를 모르거나 자기의 무의식 세계가 어떤지 모르겠다는 것은 동아시아 예술에서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술적 상상력과 동양의 사고’임태승 작가든 감상자든 프로그램으로 된 가상현실에 참여할 뿐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몫인 “예술 창작 혹은 창의의 주도권”의 상실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예술작품을 통로로 한 다중 접속의 소통도 기획된 대화의 교류일 뿐 소통 자체의 주제를 참여자가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디지털 예술은 미리 프로그램된 가상현실에 들어가는 것인데, 그 주도권이 구획된 예술에 있는 것이기에 그것의 미디어(소통)적인 기능은 진정한 상호작용성을 구현하지 못한다. 기계를 중심으로 한 다자간 소통은 다만 “기획된” 화제만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니, 대화 자체 혹은 소통 자체의 주제를 참여자는 생산할 수 없게 된다.---‘예술적 상상력과 동양의 사고’임태승 동일성 신화가 구축한 철옹성 같은 형이상학의 집, 즉 동일성 철학의 건축물들constructions이 내파內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니체의 망치질’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망치의 역부족은 이내 니체를 ‘힘에의 의지’로 무장시켰고, “나는 다이너마이트다”라고 외치게 했다. 로고스가 지어온 형이상학이라는 유령의 집을 허물기 위해서, 특히 헤겔의 절대이념이 지은 사이비사원을 파괴하기 위해서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힘에의 의지가 필요했다. (…) 그러나 동일성 신화를 해체하려는 니체의 고뇌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차이의 철학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로고스의 신화를 폭로하고 일자적 토대에 망치질해도, 심지어 기독교의 “신은 죽었다”고 외쳐대도 그를 주목하거나 지지하는 이는 흔치 않았다. 그의 망치 소리는 철옹성을 뒤흔들지 못했고, 그 안의 성주들도 괴롭히지 못했다. 성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그가 죽은 지(1900년) 반세기쯤 지나서의 일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니체는 부활했고, 철학의 역사도 반성하기 시작했다. 호기심 많은 사람일수록 동일성보다 차이를, 같음보다 다름을 더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현대미술과 철학의 이중주' 이광래 의인법적인 은유를 벗어나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방식으로 몸 공간과 유비쿼터스적인 전자물질공간이 하나로 연결된다는 것은 존재론적/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대대적인 혁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혁명이 완결되기 위해서는 유비쿼터스 기술과 사이보그 기술이 결합되어야 한다. 사이보그 기술은 신경계와 전자계의 완전한 결합을 노린다. 사이보그 기술이 전자계와 물질계의 완전한 결합을 노리는 유비쿼터스 기술과 완전하게 결합하게 되면, 신경계와 전자계 그리고 물질계가 하나로 통일되는 그야말로 은유적인 의미 차원을 넘어서서 실질적인 차원에서 존재론적인 대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 ‘철학의 눈으로 본 매체’ 조광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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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인문학이 만나다
- 4인의 석학들이 들려주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통섭 강의 아르코 미술관에서 2009년 하반기에 진행된 『현대미술과 인문학』 강좌가 『미술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강좌의 강사이자 책의 저자들은, 국내 최고의 철학자인 박이문 교수, 동아시아 미학자 성균관대 임태승 교수, 프랑스 철학자 강원대 이광래 교수, 철학아카데미 조광제 상임위원이다. 예술은 끝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며 언제나 낡은 과거의 틀로부터 벗어나 세계와 인간을 새롭게 해석하기 위한 언어를 모색한다. 오늘 우리 시대는 미디어 환경의 급속한 변화와 예술 장르 간의 융 · 복합 등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술의 영역이 확대되고, 예술의 개념 자체도 변하고 있다. 또한 예술의 종언을 선언하는가 하면 종언 이후의 예술에 대해서도 다양하면서도 새로운 논의가 생산되고 있다. 새로운 미술을 위해서는 새로운 양식의 수용과 생산도 중요하지만, 이에 대한 담론 생산을 위한 노력이 더 중요하다. 새로운 담론 생산을 위해서는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학문적 대화가 필수적 요소가 된다. 이에 미술과 인문학이 만났다. 미술관에는 미술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학문 간의 통합과 통섭이 중요시되는 요즈음, 4인의 철학자들이 들려주는 미술과 인문학의 통섭 강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과 미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 박이문 책의 서두는 박이문 교수의 예술철학 강의, 아니 질문으로 시작된다. 예술철학의 핵심적 개념은 ‘예술’이라는 개념의 정확한 의미 규정이다. 여기서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과 ‘미’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가? 박이문 교수는 ‘예술’의 개념 규정이 결정되기 전에는 예술과 관련된 어떤 철학문제의 해결은 물론 검토조차 시작할 수 없다고 단정짓는다. 그는 과연 ‘예술’이라는 미궁 같은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까? 강의는 예술의 전통적 정의와 미술비평가 아서 단토의 정의를 비교하고, 칸트의 양태 개념에 의한 예술작품 정의로 이어지며, 박 교수의 철학사상의 집약체인 ‘둥지의 예술철학’으로 끝을 맺는다. 디지털이여! 내러티브 줄게, 기술 다오 - 동아시아 미학이 디지털 미학에게 제언하다 - 임태승 다음은 임태승 교수가 배턴을 이어받아 동아시아 미학 강의를 펼친다. 우리는 과연 동아시아 예술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동아시아 예술을 서양예술을 보는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동아시아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만의 미학범주인 ‘형신(形神)’, ‘비덕(比德)’, ‘사의(寫意)’ 등과 함께, 아이콘과 코드라는 감상의 틀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화면 속에 나타나 난초라는 아이콘의 코드는 ‘군자의 덕성’인 것이다. 이러한 동아시아 미학은 현재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디지털 미학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디지털 미학은 일견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 같지만, 그 자유란 프로그램으로 획정된 구역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찻잔 속의 유영(遊泳)이 될 뿐이다. 그로부터 현실공간이나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탈피라는 소극적 자유는 획득할지 모르지만, 예술을 통한 성취라는 적극적 자유는 구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아시아 미학자가 작금의 디지털 미학의 결점과 한계에 대해 하는 따끔한 제언은 깊이 새겨들을 만하다. ‘엔드게임’과 ‘포스트해체주의’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놀이마당 - 이광래 이번에는 이광래 교수의 ‘차이’ 강의이다. 육백 년 서양미술사를 지배했던 동일성 신화와 재현의 덫은 언제, 어떻게 무너졌는가. 그리고 그 이후를 메꾼 차이의 철학과 차이의 미술이란 무엇인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빙켈만까지 이어져온 ‘창조와 모방의 합치’라는 재현미술의 슬로건은 19세기에 니체와 인상파의 등장으로 낡은 구호가 되어버린다. 20세기엔 푸코, 데리다, 들뢰즈 등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 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이 탈구축을 외치며 차이들의 경연으로 세상을 홀렸다. 21세기인 현재, 차이의 철학과 미술은 그 끝을 향해 ‘엔드게임’을 벌이고 있다. 과연 미술은 ‘종말’에 이르는 것일까. 이 교수는 20세기가 ‘엔드게임’이라고 한다면, 21세기는 ‘스펙터클 쇼’가 될 것이라고 한다. 엔드게임과 포스트해체주의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놀이마당으로 들어가보자. 거울과 책, 사진과 영화로 본 근대적 주체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전자공간의 형이상학 - 조광제 마지막은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의 철학의 눈으로 본 각종 매체 이야기다. 거울과 인쇄본 책이라는 매체가 근대인의 의식과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고, 사진술과 영화매체는 우리 사회를 어떻게 탈근대로 이끌었는가. 거울로 인해 자의식이 출현하였고, 인쇄술에 의해 혼자 눈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근대의 개인적 주체가 탄생하였다. 또한, 사진이라는 기계의 눈은 객관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영화 역시 이른바 누구의 것도 아닌 ‘주체 없는 시선’에 의해 근대 모더니즘의 강력한 주체의 시선은 상대화된다. 즉, 거울과 책으로 탄생한 모더니즘적 주체는, 사진과 영화로 인해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체 없는 주체’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주체는 가상현실로 이어지는데, 저자는 유비쿼터스 기술이 매체이며 동시에 주체인 인간의 몸 공간과 결합하면 가상현실조차 벗어난 실질적 차원의 존재론적 대혁명이 일어나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디지털 혁명은 현실의 영역과 가상의 영역을 호환시키며, 점점 전자공간이 현실의 물질공간을 압도해 근대 철학의 이분법적 존재 질서마저 재편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존재론적인 혁명 한가운데에서 기술의 진보에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철학적인 의미 또한 고찰해보는 것을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