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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에 부쳐|작가의 말
1. 말을 찾아서 2. 은비령 3. 수색, 그 물빛 무늬를 찾아서 4. 첫사랑 2 5. 1968년 겨울, 램프 속의 여자 6. 해산 가는 길 |
李舜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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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까지 집에 있었다. 내가 저를 핍박하고 서러움 줄 때 그는 이미 늙어 있었다. 그가 죽던 마지막 모습도 그랬다. 말굽을 박았는데도 공사장에서 벽돌을 내릴 때 땅에서 바로 선 대못을 밟아 오른쪽 앞다리부터 못쓰게 되더니 한 해 겨울을 늘 구부린 채 서서 앓다가 어느 날 배를 땅에 대고 만 것이었다. 알리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고 시내의 마부들이 마차를 끌고 와 죽은 그를 싣고 내려갔다. 아부제는 따라가지 않았다. 마부들이 그럼 저녁때 고기라도 보낼까, 하고 묻자 아부제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작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그날 처음으로 나는 남몰래 감추는 아부제의 눈물을 보았다.---「말을 찾아서」 중에서
왜 하필이면 길을 바꾸어 떠난 곳이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은비령이었을까. 바다로 가는 길을 눈을 보러 가는 길로 바꾸고, 눈을 보러 가선 또 별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그 여행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별처럼 여자는 2천 5백만 년 후 다시 내게로 오겠다고 했다. 나도 같은 약속을 여자에게 했다. 벗어나면 아득해도 은비령에서 그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나는 2천 5백만 년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이제 겨우 다섯 달이 지난 2천 5백만 년 후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은비령」 중에서 돌아보면 쉽게 풀 수 없는 매듭으로 꽁꽁 묶이고 헝클어진 시간들이었지만, 그 헝클어짐의 시작은 지극히 작고 사소했다. 심심해서, 너무도 심심하고 무료해서 사람을 죽였다거나, 햇살이, 눈(目) 위의 햇살이 너무도 강렬해, 그 강렬함을 참을 수 없어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에 비하면 우리의 별거는 그 시작이 아무리 작고 사소해도 아주 납득하지 못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나는 쳇바퀴를 돌리기 싫었거나 다른 쳇바퀴를 돌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존심 때문에 직접 말을 못 담아 그렇지 나중엔 아내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 다른 쳇바퀴를 다른 여자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러 번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머니와 전화를 하면 매번 마지막 물음은 다른 여자를 보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수색, 그 물빛 무늬를 찾아서」 중에서 작가마다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아니 그 목숨이 다한 이후까지도 자신의 분신처럼 살아남아 늘 독자의 부름을 받았으면 하는 책이 있다. 물론 과한 욕심인 줄은 안다. 그러나 내겐 이 책 『은비령』이 그렇다. 내가 내 고향 강원도의 이름 없는 한 고개에 대하여 ‘은비령’이란 이름을 붙이고 소설을 쓴 다음 그곳에 ‘은비령 길’과 ‘은비령 동네’가 새로 생겼듯 이 소설집 역시 그 길처럼 나와 내 이웃에게 영원했으면 좋겠다. ---「작가의 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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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한 언어와 빛깔 있는 순수, 그 뒤에 숨어 있는 깊은 울림
그리고 망각을 거슬러 올라가는 투명한 유영! 동인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등 한국문학의 순수 서정을 상징하는 작가 이순원의 대표작! 한국 문학 사상 최초로 작품 속 가공의 지명이 실제 지명으로 바뀐 ‘은비령’ 그 길에서 만나는 특별한 인연! 이순원 소설세계와 그 의의 이순원은 구효서와 함께 1990년대 한국 소설의 한 정점을 이룬 작가이다. 이순원의 소설 역시 다성적인 목소리로 세상과 사람살이에 대해 다양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데 초기작들이 빈곤이나 분단 등 강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내장하고 있는 것에 반해 후기에 이르러서는 토속적인 서정을 자전적인 기억 속에 투영시키면서 상처를 공유하고 내면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순원의 소설의 서사의 세계는 매우 다채롭고 공교하다. 내용과 형식적인 측면에서 공히 다양한 프리즘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개의 작가들은 자기만의 특징적인 세계를 특화하여 보여주게 마련인데, 이순원은 그 어떤 세계라도 자기 소설로 만들어내는 장기를 지니고 있다. 이번 「59클래식Book」 시리즈 「은비령」에 묶인 여섯 편의 작품들은 제각각 소고하고 있는 주제가 다르지만 각각 그 주제와 어울리는 소설적 형상화에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소설의 공간적 현장은 매우 다양한데 군대, 광주항쟁, 민주화투쟁, 노동운동, 동구변화와 소련 몰락, 대학생활, 타락한 자본주의의 소비시장 등으로 우리 현실에서 중요한 문제적 공간은 거의 망라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는 언제 첨단의 시의성을 포착하여 매우 유의미한 징후들을 의미 있게 탐문해 왔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소설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도 나름대로 실험적인 노력을 계속해 왔다. 소통과 서정의 정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순원의 소설의 의의는 '소통'과 '서정성' 및 '비판'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대단히 다양한 레퍼토리와 그에 걸맞는 다종의 기법으로 현실의 많은 국면들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해 왔는데, 대부분의 작품들이 독자와의 교감, 즉 문학적 '소통'에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집의 표제작이며 그에게 현대문학상의 영예를 안겨준 「은비령」도, 거칠게 말하면 소통의 영원성에 대한 희구를 말하는 작품이다. 죽은 친구의 아내에게 느끼는 연정은 사사로운 욕망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2,500만 년이라는 시공과 아름답게 연계한다. 그것은 그가 그려내는 아름다운 고향의 풍광과 별과 눈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투명하면서도 절실하게 다가간다. 그의 평이하고도 정확하고 정확하면서도 은유적인 시적 문장은 소통을 호소하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쓰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순원의 소설이 한번 가볍게 읽고 지나칠 성격의 소통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문학적 소통의 진경은 그가 독보적으로 만들어내는 서정성을 통해 보다 그윽해진다. 그는 수사가 아니면서도 은일한 수사의 기능을 하는 행간의 아우라를 창출해내는 데 있어 일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은비령」, 「말을 찾아서」의 감동은 그 서정성에 대한 동의에 다름 아니다. 얼핏 보면 쉬운 문장 속에 역설과 아이러니와 상징의 무늬들을 효과적으로 구성해 놓음으로써, 그가 즐겨 다루는 강원도의 운무처럼 그의 작품 속 세계는 매혹적으로 혼효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독자들은 쉽게 읽고 재미있게 작품의 줄거리를 읽어 나가다가 순간순간 새로운 감정의 정화를 느끼게 된다. 날카로운 현실 비판 이순원의 소설은 또한 설득력 있는 현실 비판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요령 있게 현실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 그가 보기에 온갖 악과 거짓 욕망으로 휘청거리는 현실은 순정한 개인의 진정한 욕망 충족의 방해물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개인이 지니고 있는 유년기의 기억 혹은 유년 시절의 꿈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그 시대를 장악하고 있던 현실적 폭력이기에, 그것은 응당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순원에게 있어서 소설 쓰기란 허구적 욕망의 거품을 걷어내고 유년의 기억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예술적 행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