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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이라는게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피나 바우쉬의 작품은 보는 것 만으로도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피나 바우쉬의 무용을 언어로 표현한다면 안희연 시인처럼 표현할 수 있을까? 예술의 경계를 뛰어 넘는 언어로 되살아난 피나 바우쉬를 만나게 된다. - 에세이 MD 김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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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와락 시작된다
나는 언제부터 춤추는 법을 잊어버렸을까 첫 번째 편지: 세상의 끝까지 5일 단순한 건 없어요, 모든 건 복잡하다고요 눈을 감고 아래를 보는 것과 눈을 감고 앞을 보는 것 어려운 마음을 알아보는 눈 당신의 ‘카페 뮐러’는 어디인가요? 두 번째 편지: 끝나지 않는 식탁 달 달 무슨 달 하마와 함께하는 애도 파티 봄의 얼굴을 만질 때 세 번째 편지: 온몸에 화살이 박힌 것처럼 동률 시 - 동률 너무 많지만 언제나 부족한 이야기 이해의 영역 목적어 찾기 네 번째 편지: 달콤 쌉싸름한 나의 도시 사소한 사랑의 발견 다섯 번째 편지: 작아서 커다란 혼자 있어도 혼자 있고 싶은 시간 말이 되지 못한 고통은 춤이 된다 시차와 낙차 여섯 번째 편지: 당신은 그냥 피나 바우쉬예요 갈망의 이미지 시 - 갈망 흰가면올빼미와 검은가면올빼미 사이에서 마음은 나의 경험치가 시의 경험치라는 말 희디흰 안녕 시 - 파랑 일곱 번째 편지: 외투가 먼저 돌아와 있는 방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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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춤추는 법을 잊은 것이 아니라 춤을 발견하는 ‘눈’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 후론 눈을 뜨고 다니려고 노력했다. 놀랍게도 이젠 춤 아닌 것이 없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춤이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 춤이다. 자주 가는 카페의 2층 창가, 책으로 빨려들어갈 듯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인의 어깨, 춤이다. 목줄에 묶인 개에게 질질 끌려가는 인간, 춤이다. 홀로 늦은 저녁을 해결하려고 만두를 포장해가는 남자의 검은 비닐봉지, 춤이다. 꽃다발을 들고 기둥 뒤에 숨어 연인을 기다리는 남자, 춤이다. 이삿짐 트럭이 떠나고 전봇대 아래 홀로 남겨진 커다란 곰돌이 인형, 춤, 춤, 춤이다!
--- p.19 작다는 말의 커다람을 이렇게 또 배운다. 눈을 감고도 충분히 앞을 보고 있었을 [카페 뮐러]의 무용수들처럼 나 역시도 눈을 감아본다. 눈을 감고 아래를 보는 것과 눈을 감고 앞을 보는 것의 차이에 아직은 둔감하지만 조금씩 연습해보기로 한다. 시인으로서 내가 감각할 수 있는 세계는 아마도 이런 것일 테다. ‘새가 날아간다’라는 문장과 ‘새로 날아간다’라는 문장 사이의 어마어마한 차이를 감지하는 일. 한 줄의 문장이 곧 하나의 우주임을 끈질기게 보여주는 일. 그렇게 한 단어, 한 문장 성실하게 만나다 보면 언젠가는 어둠도 암흑이 아니라 빛의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알게 되겠지. --- p.31 당신의 작품에서 숱하게 볼 수 있는 ‘반복의 동작들’도 제겐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한 행동을 한 번만 한다면 그건 그다지 공포스럽지 않아요. 문제는 반복입니다. 우매한 실수의 반복, 만남과 이별의 반복, 봄여름가을겨울의 반복, 아침점심저녁의 반복, 도레미파솔라시도의 반복, 우로보로스처럼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월화수목금토일의 반복, 팽그르르 돌아가는 팽이들, 나선형의 계단에 영원히 갇혀버린 사람들…. “우리는 다시 끝나지 않는 식탁에 앉아 질문으로 가득한 책을 써 내려가야 하겠지”라는 문장을 적었을 때가 꼭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삶이 지속되는 한 언제고 되돌아와야 할 장소로서의 식탁. 그러므로 끝나지 않는 식탁. 이 얼마나 무서운 장소인가요. --- p.48 좋은 작품은 관객의 시간을 뺏는 작품이 아니라 관객에게 시간을 주는 작품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어요. 행복했던 과거의 한때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앞당겨 살게 하는 것이든 공연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객석에 남아 불 꺼진 무대를 바라보게 하는 힘, 그것이 있어야 한다고요. [봄의 제전]이 제게 남긴 것은 그러한 시간이었습니다. 죽음과 희생 없이는 왜 어떤 봄도, 탄생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지를 질문하는 시간. 그리고 저의 어떤 시들은 바로 그곳에서 태어나고 있었습니다. --- p.69 당신에게 ‘춤’은 믿음을 쌓는 행위였을까요, 믿음을 허무는 행위였을까요. 어쩐지 당신은 그 누구보다 춤을 믿는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춤을 추는 인간을 믿거나, 춤을 추는 행위를 통해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는 순간을 믿었을 수도 있겠지요. 당신에게는 그런 고민들을 함께 통과해온 좋은 반려자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무대미술가 롤프 보르칙Rolf Borzik과 작품 전반을 논의하며 예술적 교감을 나누는 당신을 상상해봅니다. “우리 춤출까?” 때로는 로맨틱한 제안에 한 손에 와인 잔을 들고 근사한 음악에 맞춰 왈츠를 추는 두 사람을 떠올려보기도 합니다. 아마도 시간은 느리게 흐르겠지요. 작은 것들은 커다래지고 오래된 밤들은 새로워질 겁니다. 작고 사소한 믿음이 우리를 휘감고 꽁꽁 묶어주는 동안. --- p.106 시 역시 고통을 다루는 장르이지만 언어로 쓰이는 고통은 한번 걸러진 고통이고 그러므로 유순한 고통이다. 말이 되지 못하는 고통을 지나와야 말로 할 수 있는 고통이 된다. 고통을 달래고 잠재우기 위해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이, 계절이 필요할 것인가. 시의 일이 그토록 요원하다. 하지만 춤은 그보다 앞서 필요한 것이다. 도저히 말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처할 때 춤이 필요하다던 피나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Mother, 2009]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는 아들의 죄를 덮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 엄마가 넋이 나간 채 추는 춤을 왜 그토록 오래 보여줘야 했을까. 배우 김혜자의 텅 빈 눈동자와 신들린 듯한 흐느적거림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인간에게는 언어 이전에 춤이 있고, 춤 이전에 고통이 있음을 알게 된다. --- p.116 영화 [피나]의 후반부에도 그런 이미지들이 가득하다. 삭막한 공간에 갇혀 있는 그들은 제각기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데, 그들에게는 “왜?”라는 질문을 건네는 것 자체가 무용해 보인다. 그들 자신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몸에 줄이 묶인 여인은 계속해서 앞으로 달려 나가려 하지만 거꾸로 감기는 테이프처럼 번번이 되돌려진다. 묶여 있기 때문이다. 나무를 업고 걸어가는 여인도 있다. 그가 왜 그토록 육중한 묘목을 등에 업고 가야 하는지는 모른다. 업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여인의 뒤에서 삽으로 흙을 퍼서 뿌리는 여인도 있다. 파묻으려는 쪽도 파묻히는 쪽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왜 이런 장면이 느닷없이 우리 앞에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다. 가고 있기 때문이다. --- p.131 예술의 역할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썼어도 시는 내 손을 떠난 뒤엔 더 이상 내 것일 수 없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단순히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만났던’ 시간들이 있었다. 책을 읽고 아름다운 문장을 발견했을 때 밑줄을 긋거나 노트에 옮겨 적으면 내 삶이 아름다워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필요한 착각이었을 것이다. 나중에는 그것이 누구의 문장인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 문장을 만났던 순간의 내가, 그때의 내 삶이 내게는 훨씬 중요했으니까. 시인의 삶이 시의 구체성을 이루고, 시의 구체성이 다시 독자의 삶의 구체성으로 변환되는 일만큼 이상적인 교환이 있을까. --- p.143 새하얀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을 볼 때에도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꼭 누군가 거기 있는 것 같다. 피나의 작품 [스위트 맘보Sweet Mambo]의 무대도 그런 흼으로 뒤덮여 있었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연결된 흰 장막들 사이에서 어느 순간 나타나기도, 휘감기기도 하는 무용수들. 이 작품이 피나가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쯤 초연된, 피나의 거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도 내게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흰 천이 넘실거리는 무대가 마치 피나가 세상과의 작별을 앞두고 흔드는 손 같아서다.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지만 모든 시간은 차곡차곡 다가오는 것이기도 하니까. 피나 역시 흰 천의 물성을 온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새하얀 천의 몸짓과 인간의 몸짓을 모두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그것을 피나가 우리에게 전하는 희디흰 안녕이라고 이해해도 될까. --- p.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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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 바우쉬 타계 10년,
그녀의 외투가 먼저 돌아와 있는 방에서 글과 그림으로 공명하는 두 예술가 예술가가 세상을 떠나도, 남아 있는 이들에 의해 다시 창조되는 예술의 무한함을 이 책은 돌아보게 한다. 적어도 예술가의 죽음은 그런 뜻에서 “더 이상 여기 없는 것이 아니라 없음으로 존재하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당신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요. 무용수의 발을 감싸 안아주는 신발일 수도, 텅 빈 공연장을 지키는 의자일 수도 있겠군요. 스스로 신이 되어 한 세계를 축조해가는 재미에 빠져 있을까요, 아니면 신이 만든 세계에 갇혀 불안하게 두리번거리고 있을까요. 어느 쪽이든 당신은 여전히 질문하는 사람이겠지요. 논리로 가닿을 수 없는 거리를 마음으로 성큼성큼 내딛으며 가고 있겠지요.” 그러므로 예술가에게 죽음은 “외투를 벗듯 몸을 벗고 한없이 가벼워지는 일”이다. 그리고 피나의 죽음은 “당신의 외투가 당신보다 먼저 돌아와 있다는 것만 빼면”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일이기도 하다.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위해 춤췄던 피나 바우쉬,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단어를 건네는 시인 안희연,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색을 입히는 일러스트레이터 윤예지는 그렇게 한자리에서 공명했다. 그 결과물이 피나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되는 2019년 6월 30일, 《당신은 나를 열어 바닥까지 휘젓고》라는 책으로 나왔다. 그리고 초여름의 축제처럼, 예술의 한계를 의심한 적 없는 독자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공명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피나가 열어 바닥까지 휘저은 시인의 마음 고독 속에서 빛을 더듬으며 쓴 절절한 연서 소설가 백수린은 이 책을 두고 “피나 바우쉬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자 불가해한 아름다움에게 바치는 젊은 시인의 절절한 연서”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이 책에는 피나를 수신자로 하는 편지 형식의 글이 중간중간 놓여 있다. 안희연은 편지를 통해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에 도사린 불안, 서울이라는 화려한 도시가 요청하는 고독, 예술가가 세상을 떠나도 작품은 그대로 남는다는 사실의 경이와 두려움을 고백한다. 이 편지들은 정중하되 솔직하고, 지극하되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 세상에 오가는 모든 다른 연서들처럼. 답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만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독자라면 동시에, 피나 바우쉬의 단호하고도 섬세한 답장이 함께 읽히는 듯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하나의 예술로 열려 바닥까지 휘저어진 마음이 무언지 이해하고, 나만의 ‘카페 뮐러’를 짓고 부수어본 독자라면 말이다. *‘Pina Bausch’는 국립국어원 외래어표기법이 규정하는 ‘피나 바우슈’ 대신, 국내에 알려진 통상의 관습에 따라 ‘피나 바우쉬’로 표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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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속에서조차 빛을 찾는 마음을 짐작해본다.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삶이란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검은 옷차림과 하나의 흐트러짐 없이 단정히 묶은 머리 스타일로 기억되는 피나 바우쉬. 이 책은 사랑과 두려움이란 주제를 변주하며 언제나 한계를 넘어서려 해온 안무가 피나 바우쉬에 대한 글이지만 동시에 시인을 비추는 거울이다. “삶으로부터 와서 삶으로 되돌려지는 시를 꿈꾼다”거나 “혼자 있어도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나에게 시는, 너는 이곳으로 도망쳐온 것이 아니라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고 말한다” 같은 구절을 읽으면 당신은 숭고한 세계에 다다르기 위해 고행하듯 자신의 신체를 조각하고 단련하는 무용수처럼, 언어를 벼리는 시인을 떠올리게 될 테니까. 섬세하면서 다정한 안희연의 문장들은 불가능할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중력을 거스르려 애쓰는 무용수의 외로움과 리듬에 자유롭게 몸을 맡기는 어린아이의 해맑음을 공평히 어루만진다. 그리고 나는 그런 문장들을 따라 읽으며 서서히 깨닫는다. 이 책이 연서라는 사실을. “와락” 시작되어버린 피나 바우쉬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자 불가해한 아름다움에게 바치는 젊은 시인의 절절한 연서. - 백수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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