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1년 07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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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44쪽 | 418g | 141*222*18mm |
ISBN13 | 9791160947458 |
ISBN10 | 1160947457 |
발행일 | 2021년 07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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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44쪽 | 418g | 141*222*18mm |
ISBN13 | 9791160947458 |
ISBN10 | 1160947457 |
MD 한마디
[넷플릭스 화제작 <그리고 베를린에서>의 원작] 뉴욕의 초정통파 유대인 공동체 사트마에서 여성은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조혼과 출산만을 강요당한다. 이 책은 사트마의 오래된 차별의 역사를 거부하고 탈출한 데버라 펠트먼의 회고록이다. 나 자신으로 살아갈 자유와 '자기진실성'을 찾아가는 한 여성의 놀라운 이야기. - 에세이 MD 김태희
책을 읽기 전에 005 프롤로그 008 1장 나의 숨겨진 힘을 찾아서 015 2장 순수했던 시절 이야기 057 3장 깨어나다 087 4장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115 5장 목표를 품다 161 6장 투쟁할 가치가 없는 일 187 7장 야망에는 대가가 따른다 217 8장 정의라 불리는 불의 249 9장 반기를 들다 283 에필로그 323 후기 327 감사의 말 331 옮긴이의 말 334 독서 모임 가이드 337 |
*사계절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개인적 감상입니다.
Unorthodox. 정통적이 아닌, 특이한. 부제를 읽기도 전에 쉬운 이야기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제목의 의미를 신경쓰는 독자라면 읽는 내내 작은 의문이 해소되지 않고 부유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밖으로 나온 아이, 대체 누가.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그의 아이가, 아이라고 하기엔 주인공 데버라가 너무 어리다. 어리고, 미숙하고, 혼란스럽고 겁먹었지만 누구보다 용감한 여성. "언오소독스: 밖으로 나온 아이"는 억압되고 짓눌렸던 저자의 시간들과 그를 둘러쌌던 폭력의 세계를 고발하고 그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쟁취하고자 뛰쳐나온 용기를 고백하는 글이다. 길고 끈질긴 폭력과 굴욕의 굴레.
저자가 속했던 공동체는 뉴욕 소재 초정통파 유대인 공동체로, 율법 하에 모든 곳이 정해지는 곳이다. 코셔를 지키지 않는 식품, 물품은 사용치 않으며, 부부관계와 삶의 전반적인 것들의 기반에는 엄격한 율법이 있다. 아마 원작인 이 책이든, 넷플릭스 시리즈로 제작된 드라마든 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자는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여자는"에 진저리를 치게 될 것이다. 여자는 이걸 해서는 안돼, 여자는 이런 옷을 입어서는 안돼, 여자는 순종해야 해, 여자는, 여자는, 여자는, 여자는. 그 모든 것의 기반에는 율법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있고 여성은 순종이라는 이름의 굴종의 삶을 견디며 살아간다.
p.63 할아버지는 탄압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동유럽에 살았던 우리 조상은 수 세대에 걸쳐 히틀러 시대의 박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집단 학살을 경험했다. 엄청난 고통과 상실의 역사를 물려받은 할아버지가 왜 평생 자신을 탄압하며 살아가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작고 무해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가두고, 그 박탈에서 만족을 얻는 것 같았다. 나의 조부모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시련을 가하는 것은 죄책감 때문일까?
p.121 나는 렙베의 부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다. 그것이 할머니처럼 늘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라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나는 힘을 간절히 원했지만 그 이우는 다른 사람을 내게 복종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주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p.147 나도 신의 기적을 기다리는 대신 직접을 만드는 여성이 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속죄일 기도를 중얼거리긴 해도, 나는 기도문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고 자비를 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삶의 모든 것을 두고 떠나는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나의 집이, 나의 부모가, 나의 세계가 나를 열등하고 하등한 인간으로 규정지을 때, 결국 나의 절대자는 나를 복종하는 자로 만들었다는 것을 자의 혹은 타의로 받아들여야 할 때,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서 피해자는 또다른 피해자에게 방관자이자 가해자이다. 어쨌든 나름대로 바르게 키우고 가르쳤다고 생각했지만 그 모든 것은 그를 소유할 신과 남자의 행복을 위해서였던 것처럼. 가해자는? 역시 가해자다. 데버라의 삶에서 순박하게 눈을 빛내고 율법을 따르던 남편은 역시나 엄마를, 아버지를, 계율을, 신을 사랑하고 또 두려워하며 누리고 순종했던 모든 것은 결국 그를 위해 순종하고 견뎌야했던 이들의 비명이었던 것처럼. 성추행범을 같은 집단이라는 이유만으로 용서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안식일의 가족 모임이라는 이유로 진통이 오는 임신부를 내원시켜야 할 보호자가 열두시간쯤 미루면 안 되겠냐고 말하는 잔인한 멍청함처럼.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저자를 향한 폭력의 세계를 고발하는 일에 대체 믿음과 종교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신념이 사람을 억압하고, 공격하고, 끝내는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면서 그것을 행복과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역사가 끊임없이 마주쳐온 계몽과 자유의 문제가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끝없이 묻고 또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문제라는 점에서.
p.195 모든 질문에는 오직 한 가지 정답만 존재했다. 선생님은 타협이라 불렀지만 내게는 굴복이나 다름없었다.
스스로와, 선택이 아니었으나 사랑으로 선택한 아이를 폭력과 굴종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삶으로 뛰쳐나오게 한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정통이 아닌"이라는 의미의 언오소독스.
"뉴욕의 초정통파 유대인 공동체를 탈출하다."라는 부제가 달린 책. 뉴욕에 초 정통파?! 라는 문구가 의문스러워 읽은 책이다. 내가 아는 유대인은 그냥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인데, 초 정통파?? 뭐가 다른가? 싶었다.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는 모르겠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고, 그냥 내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니, 유대교를 믿는 분께서 이 글을 보고 화가 나신다면, 그냥 모르는 사람이 한 소리로 치부해주시길.
저자는 미국 뉴욕의 윌리엄스버그라는 동네에서 자란 하시딕 유대인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로부터 유대인 생존자들을 데리고 탈출해, 뉴욕에 자리잡은 랍비에 의해 세워진 종파다. 살아남은 각기 다른 랍비들도 자신만의 종파를 세웠다고 한다. 하시딕 유대인은 선조들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며, 그들의 언어인 이시디어를 쓰고, 유대인 인구 회복을 위해 출산에 주력하는 종파라고 한다. 여기까지의 배경을 읽으며, 유대교도 여러 종파를 갖고 있구나, 이스라엘이 유대국가라고 알고 있는데, 이 종파는 이스라엘의 유대인을 비판하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니, 이럴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던 중 "출산에 주력하는" 이라는 말에 뭐지? 싶었다.
그리고 알게된 저자의 성장기는 정말 놀라웠다. 이 종파안에서 여자는 출산을 위한 도구였다. 그렇게 길러지고, 겨우 30분만에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나고 10대 중후반에 결혼하여, 출산까지 10대에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그런 존재였다.
저자의 어머니는 이런 하시딕 종파를 이미 떠났고, 저자는 조부모의 손에 길러졌다. 영어도 배울수 없고, 오로지 이시디어만 써야하고, 결혼을 할 때까지 자신의 몸의 구조조차 제대로 알지 못해, 첫날밤을 치르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려야 했던 21세기 뉴욕의 한복판에 이토록 폐쇠적인 공동체가 있다는 것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 였다. 조선시대를 떠올리게 했다....머리카락까지 남편이 아닌 이에게 보여줄수 없어 가발을 쓸정도라니,,
그런 공동체를 떠나야 한다는 결심은 그녀가 아이를 낳고 부터였다. 그점이 내게는 가장 놀라웠다. 가장 떠나기 힘든 순간 아니였을까. 이런 삶이 옳지 않다고 알고 있지만, 자신과 아이를 건사해야한다는 현실적인 문제에서 더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떠났고, 그녀의 삶을 지켜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런 공동체 안에서 아이를 자라게 할 수 없다는 것이였다. 그녀의 아이 잇지는 남자아이였지만, 남자아이 조차도 그 속에서 부모와 공동체의 부속품으로 그들의 불합리함을 그대로 교육받는 아이로 자라게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더 놀라운것은 그녀는 종교까지 버리진 않았다는것. 그녀는 종교인으로써 유대인으로써 신을 바라보는 믿음과, 인간의 믿음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유연한 랍비가 좋은 랍비라고 가르치셨다. 반면 탈무드 지식이 부족한 랍비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늘 엄격한 쪽으로 기울었다." p.141
공동체의 부당함과 종교적 믿음을 구분할 줄 아는 자신만의 뚜렷한 생각을 가졌고, 그녀는 늘 자신의 삶속에서 왜?라는 의문을 품었고, 의문에 대한 답을 쫒는 사람이였다. 어쩌면 그래서 그녀는 어쩌면 가장 불리했던 상황속에서도 가장 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녀가 공동체를 떠나고 그 공동체와 완전히 결별하기까지 꽤 오랜시간이 걸렸지만, 그 시간 속에서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의 의지에 그저 박수를 보낼 따름이다. 나라면?!이라는 생각에 미쳤을 때는 사실 나는 아마 그녀의 친구 민디와 같은 결정을 하지 않았을까.
스스로가 가진 내면의 힘을 믿은 그녀 정말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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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발견이 떠오르는 책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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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오소독스....충격이 상당하다
이런 세상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그것도 뉴욕에....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다 여성을 향한 억압은 대체 어디까지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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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심판을 받을 때 다윗왕이 상벌의 기준이 된다고 배웠다. 첩을 두는 것에 비하면 내가 숨겨둔 영어 책 몇 권 정도는 새 발의 피가 아닌가. 바로 이 생각을 한 순간, 내 안에서 저항의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 사실을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깨달았다. 내가 가진 힘에 눈뜬 순간과 마찬가지로, 나는 어느 날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기를 멈추고 내가 속한 이 세상에 관해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였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