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3년 12월 05일 |
---|---|
쪽수, 무게, 크기 | 400쪽 | 570g | 140*210*30mm |
ISBN13 | 9788954622752 |
ISBN10 | 8954622755 |
발행일 | 2013년 12월 05일 |
---|---|
쪽수, 무게, 크기 | 400쪽 | 570g | 140*210*30mm |
ISBN13 | 9788954622752 |
ISBN10 | 8954622755 |
일본에 가 닿기를 아문센 메이벌리를 떠나며 자갈 안식처 자존심 코리 기차 호수가 보이는 풍경 돌리 시선 밤 목소리들 디어 라이프 해설|영혼을 뒤흔드는 한순간, 당신을 일깨우는 한순간 앨리스 먼로 연보 |
이 책은 김탁환님이 <읽어가겠다; http://blog.yes24.com/document/7860469>에서 소개한 책입니다. 201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캐나다 작가 앨리스 먼로의 마지막 단편집입니다. <디어 라이프>에는 10개의 단편과 표제작인 ‘디어 라이프’를 포함하여 어린 시절의 삶을 돌아보는 네 편의 글을 담았습니다. 김탁환님은 먼로의 단편은 늙은 개구리 같다고 비유하였습니다. 아마도 세상의 3대 불가사의라는 우스갯소리를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럭비공이 튀는 방향, 개구리가 뛰는 방향, 그리고 여인의 마음은 정말 불가사의하다는 것 말입니다. <디어 라이프>에 실린 단편들은 읽는 이가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보인다는 것을 개구리와 비유한 것입니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아내와의 이별을 다룬 영화 <어웨이 프롬 허>의 원작을 쓴 앨리스 먼로는 1931년 생입니다만, <디어 라이프>에 실린 단편들의 시간적 배경은 더 옛날인 것들도 있습니다. <디어 라이프>를 읽게 된 것은 김탁환님이 소개한 ‘일본에 가 닿기를’과 ‘기차’ 등 두 작품이 열차를 매개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읽어보니 두 작품 이외에도 ‘아문센’에서도 기차가 등장합니다. 비중은 크지 않지만 반전의 무대가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적에 차를 몰고 장거리 여행을 다니곤 했습니다. 시골길을 가다보면 열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화물칸의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연결되는 열차를 타보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최근에는 캐나다의 태평양쪽에 있는 뱅쿠버에서 대서양쪽의 핼리팩스까지 연결되는 횡단열차을 타보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두 작품을 통하여 캐나다의 횡단열차의 분위기를 조금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탁환님은 <디어 라이프>에 실려 있는 이야기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개구리 같다고 했는데, 역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임에도 남녀 사이의 관계가 충동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할 뿐만 아니라 함께 여행하고 있는 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가 그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가도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그와 같은 판타지는 동면에 빠지듯 하고 일상적인 애정이 변함없이 견고하게 되돌아왔다고 하는데,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습니다. 딸과 함께 토론토에 도착했을 때 그 남자가 기다리는 것을 발견한 여인은 놀라면서 반가웠던가 봅니다. 작가는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녀는 케이티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바로 그 순간 아이는 그녀에게서 떨어지며 손을 놓았다. 그녀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다음에 다가올 일을 기다렸다.(41쪽)” 딸아이를 챙기는 일보다 만나고 싶었던 남자와의 관계가 흘러가는 대로 맡기겠다고 생각하는 어머니가 있을까요? 열편의 단편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장면이 아니라 수 없었습니다.
부자집 외동딸과 혼외관계를 맺고 그녀의 재산을 빼돌리는 유부남의 이야기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다가 충격적인 결말을 암시하면서 끝이 납니다. 등장인물들이 20세기 중반 캐나다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일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해설을 보면, 작가는 단편 ‘자존심’의 마지막 부분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화자의 집 뒷마당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이 부분은 “아련하고 쓰라리지만 더 없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더 깊이,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시간의 매정함(혹은 너그러움), 산다는 것의 팍팍함(혹든 소중함), 생존한다는 것의 안쓰러움(혹은 거룩함), 곁에 있는 존재의 체온(혹은 더는 가까워질 수 없는 존재의 체온) 등의 모순적인 것 같으면서도 잘 융화되어 녹아 있다(418-9쪽)”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읽어내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처음부터 다시 읽어봐야 할 모양입니다.
'디어 라이프'는 총 10편의 단편소설과 4편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뒤쪽의 4편의 이야기에는 '피날레'라는 소제목이 따로 붙어있었다.
작가가 1931년 생이다 보니 이야기들의 배경은 거의 다 자신이 살아왔던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2차 세계 대전이 배경인 경우도 많고.
단편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작품 하나하나에서 여러 사람들의 인생을 진지하게 느낄 수 있다.
인물마다 그 나름의 인생 역정을 겪게 되는데 그녀는 우리를 그런 장면들 속으로 담담하게 안내해준다.
하지만 담담한 그녀의 글 사이사이로 터져 나오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예를 들면 주인공들이 느끼는 어떤 예감 같은 것들, 어쩌면 나는 그들보다 오히려 더 먼저 불길함을 느끼곤 하며 더욱 불안해했다.
책을 읽고 나니 왜 그녀가 현대 단편의 거장이라고 불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소설이니까 특별히 창조된 것이 아닌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인물들의 모습들에
정겹기도 했고, 어이가 없기도 했으며, 나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시대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지금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도 꽤 나오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옹호하지는 않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피날레 4편을 나는 소설을 읽듯이 읽었는데,
그녀는 이 이야기들이 자전적 이야기이지 소설은 아니라고 밝히긴 했다.
그녀는 일기를 쓰지 않았기에 과거를 회상해서 쓴 글들이 전부 사실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심정적인 것만큼은 진실하다고 한다.
이런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는 데에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절필을 선언하며 마지막에 이런 글들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서 읽어보고 싶어진다.
디어 라이프. 책을 읽기 전에도 다 읽은 후에도 참 다정한 제목이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포함해서 총 14개의 단편들을 담고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짧은 분량으로 인간의 깊은 내면을 모두 담아낼 수 있었는지 읽는 내내 감탄스러웠다.
여기 나오는 이들은 모두 평범한 이들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인간 본연의 모습은 날카롭고 서늘하다. 그래서 앨리스 먼로가 그리는 인간들이 우리와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낯선 곳을 서성거릴 때, 어두운 감정들에 짓눌려 숨이 막힐 때,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라고 말하던 목소리를 떠올려본다.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라고 말하던 또 다른 목소리도 떠올려본다. 그럼 그들을 통해 전하려고 하는 앨리스 먼로의 따뜻한 위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416p)
흐름을 따라가는 것. 자신을 내맡기는 것.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내맡기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머리의 안쪽과 바깥쪽 사이에 세워진 벽이 무너져야 했다. 진실함에는 그것이 요구 되었다. (29p)
내 가족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뭐든 어중간한 진실은 그들을 죽일 수 있으니까요. (31p)
객차들 사이에는 다른 객차로 넘어갈 수 있는, 각 객차들을 연결하는 짧은 통로가 있었다. 그곳에 서면 기차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고 무섭게 느껴졌다. 뒤에도 무거운 문이, 앞에도 무거운 문이 있었고, 통로 양쪽에는 덜컹거리는 금속판들이 있었다. 그 금속판들이 기차가 정차할 때 내려지는 계단을 가려주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통과할 때 늘 걸음을 서둘렀다. 덜컹대는 소리와 흔들림은, 결국 세상 모든 것이 그리 필연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사람들은 무심한 듯, 하지만 다급하게 덜컹대는 소리와 흔들림을 통과한다. (35p)
객차들 사이 시끄러운 공간에 망연히 앉아 있는 케이티. 울지도 않고, 칭얼거리지도 않고, 어떤 설명도 희망도 없이 그곳에 영원히 앉아 있어야 하는 것처럼. 묘하게 표정이 없는 눈동자와 살짝 벌어진 입, 그러다 아이는 자기가 구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울기 시작한다. 그제야 아이는 자기 세상을 되찾는다. 괴로워하고 불평할 권리를 되찾는다. (37p)
그들 중 누구도 어떤 종파의 일원이나 엄격하고 까다로운 사람들로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를 잠깐 보고 어떻게 그런 것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37~38p)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88p)
그녀는 줄곧 존재해왔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사라졌다. 존재한 적조차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현명하게 잘 처리하면 이 충격적인 사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부산스레 돌아다녔다. 그 역시 관습을 따르며 서명하라는 곳에 서명을 했고, 그들의 말대로 유해를 처리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유해遺骸’라니 얼마나 굉장한 말인가. 찬장에 남겨져 켜켜이 그을음을 묻히며 말라간 무언가처럼. (117p)
“중요한 건 행복해지는 거야.” 그가 말했다. “뭐가 어떻든 간에, 그냥 그러려고 해봐. 넌 할 수 있어. 하다보면 점점 쉬워질 거야. 주변 상황과는 아무 상관 없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넌 모를 거야.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져. 혹은 가벼워지지. 어쨌든 그러면 그저 그 자리에서 편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돼.”
이제, 안녕.
그가 어떤 의미로 그 말을 했는지 나는 안다. 그러는 것이 정말로 옳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카로는 여전히 물을 향해 달려가 의기양양하게 자기 몸을 던지고, 나는 여전히 그것에 붙들려 있다. 그녀가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기다리면서, 첨벙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면서. (142p)
무슨 일이든 잘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러니까, 세상 모든 일이 그에게 불리한 쪽으로만 일어나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삼진 아웃으로 모자라 이십진 아웃까지 당한다. 하지만 결국 나중에는 나아진다. (...) 의지만 있다면 어떤 일도 좋게 만들 수 있다. (175~176p)
무엇보다 끔찍했던 것은 캐나다와 뉴펀들랜드 사이, 우리 해안과 가까운 바다에서 민간인을 태운 페리가 침몰한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어 타운의 거리를 배회했다.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은 사람들이 자꾸 생각났다. 뜨개질을 하고 있던, 내 어머니만큼 나이가 들었을 노부인들, 치통을 앓는 꼬마. 죽기 전 마지막 삼십 분을 뱃멀미로 툴툴거리느라 다 써버렸을 사람들. 나는 한편으로는 공포와 한편으로는-최대한 비슷하게 묘사한다면-서늘한 흥분이 뒤섞인 아주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날아가고, 한순간에 나 같은 사람들이나 나보다 더 못한 사람들이나 그들 같은 사람들이나 모두 평등-이렇게 말해야겠다-평등해진다. (183p)
지금 생각하면 내 학창 시절은 내가-내 얼굴이-어떻게 보이는지에 익숙해지다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익숙해지다가 다 가버린 것 같다. 내가 새로운 사람들과 끊임없이 부대끼지 않고도 이곳에서 살아남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 그리고 이곳에서 용케 버텨낸 것을 나는 작은 승리라고 생각한다. (189p)
그때 나는 생각했다. 오래 살다보면 많은 문제들이 그냥 해결된다고. 선택된 사람들만 들어가는 모임에도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어떤 장애를 가지고 살았건 그 시기에 이르면 많은 문제들이 상당수 해결된다. 모두의 얼굴이 고통을 경험했다. 당신의 얼굴만이 아니라. (197p)
내가 그해의 문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미지의 세계로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내게 빛을 주세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어둠으로 나가 신의 손을 잡으시오. 그것이 그대에게 빛보다 더 좋고 알려진 길보다 더 안전할 것이오.” (276p)
모든 것은 가두어 잠가버릴 수 있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은 단지 결심뿐이다. (278p)
내게 일어난 일은 드문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책에 없다면 진짜 인생에는 있을 것이다. 그 문제를 다루는 상투적인 방법이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걷는 것도 물론 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춰야 할 때가 있었다. 이런 규모의 타운에서조차 자동차와 빨간 신호등 때문에 멈춰야 했다. 가다 서다 하며 어설프게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고,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처럼 떼지어 돌아다니는 학생들도 있었다. 왜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는지,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며 바보같이 구는지, 쓸데없고 불필요한 존재들이 넘쳐났다. 어느 곳에나 노골적인 모욕이 흘러넘쳤다.
상점과 간판처럼, 섰다 출발하는 자동차 소음도 모욕이었다. 어디에서나 이것이 삶이라고 외쳐댔다.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다는 듯이, 더 겪어봐야 한다는 듯이. (323p)
“우리는 싸울 여력이 없어.” 그가 말했다.
참으로 그렇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늙었는지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늘 괴로워할 것과 불평할 것이 존재한다. (330p)
우리는 스스로가 꽤 건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순간 그냥 죽을 수도 있다. (330p)
무언가를 다 하고, 끝내고, 마무리를 할 때 들리는 일상적인 소음이 사라지고 나면 집은 낯선 장소가 되어갔다.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잠잠히 가라앉고, 그들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의 쓰임새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가구들도 모두 그 자체의 세계로 물러났다. 더는 누군가의 관심을 받기 위해 그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해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자유. 낯선 느낌. 하지만 내가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고 결국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자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360p)
서쪽으로는, 길게 휘감아 도는 강과 들판과 나무와 일몰이 가로막히는 것 없이 다 보였다. 사람들과 얽혀들 일도 없고, 일상적인 생활도 영원히 없을 것 같았다. (363p)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하지만 그것들은 이내 사라진다. 살다보면 그렇게 된다.
요즘에는 부모 노릇을 오래 하다보면 실수인 줄 아는 실수뿐 아니라 딱히 실수인 줄 모르는 그런 실수도 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면 내심 얼마간 초라해지고 이따금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369~370p)
나는 페기를 울린 일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했을까? 그때는 그 질문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나는 용감하지 않았다. 처음 다녔던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가 나를 쫓아와 돌멩이로 맞히면 나는 울었다. 타운의 학교에서 선생님이 엉망진창으로 지저분한 내 책상을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나만 혼자 교실 앞으로 불러냈을 때도 울었다. 선생님이 그 문제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머니가 전화를 끊은 뒤 내가 자랑스러운 딸이 아니라는 사실에 참담한 심정을 견디며 흐느꼈을 때도 나는 울었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용감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 페기에게 무슨 말을 했을 테고, 페기도 나와 마찬가지로 뻔뻔하지 않아서 훌쩍였을 것이다. (387~388p)
이 나라에 폭격 훈련을 받으러 왔던, 폭격 도중 대부분 죽음을 맞게 될 그 청년들은 아마도 콘월이나 켄트, 헐, 스코틀랜드의 평범한 억양으로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들이 입을 열면 곧바로 축복의 말이 쏟아질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 앞에 놓인 미래가 재앙뿐이라는 사실, 평범한 그들의 생명이 창밖으로 날아가 땅에 부딪혀 박살날 거라는 사실은 내게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 축복에 대해, 그런 축복을 받는다면 얼마나 근사할지에 대해, 그럴 가치가 없는 페기라는 여자가 그런 행운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 그리고 그들이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내 에로틱한 환상 속에 머물러 있는 사이, 그들은 떠나버렸다. 그들 중 몇몇이, 대부분이, 영원히 떠나버렸다. (388~389p)
그 딸은 한동안 내가 어른이 되어 살던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써 보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찾아가볼 수 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나의 어린 식구들과 한결같이 불만족스러웠던 내 글쓰기 때문에 바쁘지만 않았다면. 하지만 그때 내가 정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사람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내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도 그리고 장례식에도 나는 집에 가지 않았다. 내게는 어린 자식이 둘 있었는데 밴쿠버에는 아이를 맡길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거기까지 갈 경비가 없었고 내 남편은 의례적인 행동을 경멸했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의 탓이겠는가. 내 생각도 같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415~41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