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무리가 눈앞으로 다가온다. 수십 명씩 굴비 두름처럼 한 줄로 나란히 엮여 있다.
다들 똑같이 등 뒤에서 손목이며 팔뚝을 밧줄 혹은 철사 줄로 결박당한 모습. 밧줄이 고삐처럼 목에 그대로 휘감겨 있는 사람도 있다. 하나같이 백지장으로 변한 얼굴들. 목덜미와 가슴께까지 온통 피투성이인 까까머리 소년. 두 눈을 허옇게 부릅뜬 채 굳어버린 노인. 양팔로 가슴을 그러안고 새우처럼 웅크린 젊은 여자. 아직도 입에서 검은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는 청년…….
거기엔 아이들도 있다. 두어 살, 예닐곱 살, 까까머리 초등학교 아이들까지. 젖먹이를 품에 안은 젊은 어미.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얼굴이 짓이겨진 남자들. 두 눈을 빤히 뜨고 이쪽을 노려보는 노인. 산발한 머리채를 미역 줄기처럼 검게 풀어 헤친 채 떠내려가는 여자……. 은은한 달빛 아래 끝없이 펼쳐지는 그 무서운 광경 앞에서 그는 차마 숨조차 쉬지 못한다.
--- p.20~21
우린 이렇게, 당신들 눈앞에 존재하고 있어.
그럼에도 당신들은 우릴 알아보지 못하지. 왜냐면 당신들이 애초에 우릴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지. 보려 하지 않으므로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므로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거야. 애당초 들으려 하지 않고 느끼려 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우리의 존재를 느낄 수가 없는 거야.
--- p.49
그때 자꾸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당신의 두 눈 속에서 난 텅 빈 구멍 하나를 보았어. 한없이 깊고 캄캄한 어둠의 동굴. 그 커다란 구멍 속으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어.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시신들. 검은 피를 흘리며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 떠내려가는 사람들. 아아, 참으로 무섭고 슬프고 끔찍한 광경이었지.
그제야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어. 아, 당신도 우리처럼 ‘아파하는 마음’이로구나. 우리는 서로가 똑같은 ‘아파하는 마음들’이구나. 그러기에 당신 또한 오래도록 온전히 잠들지 못하고 살아왔구나…….
그러니까 바로 그날부터였어. 우리가 당신의 집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한 것은.
--- p.63~64
소개령이 내려진 지역은 일체의 통행이 금지되고, 눈에 띄는 자는 누구나 폭도로 간주돼 총살에 처해졌다. 불과 두 달 사이에 한라산 기슭의 수많은 중산간 마을들은 예외 없이 완전히 텅 빈 폐허로 변했다. 마을 전체가 불에 타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주민들이 곳곳에서 무차별로 떼죽음을 당했다. 토벌대를 피해 남녀노소 가족들을 이끌고 한라산 골짜기를 헤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 p.151
“그날 이후, 내 눈에는 지옥과 이 세상이, 악마와 인간이 하나로 겹쳐 보여요. 그러니 어떻게 기도를 할 수 있겠어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그런 식의 기도문을 어떻게 두 손 모으고 천연덕스럽게 음송할 수가 있겠어요. 악마와 인간을 도무지 구분 못 하겠는데, 악마의 죄와 인간의 죄를 분간할 수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누구의 용서를 구할 수 있겠어요……. 그런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 p.170~171
제주신화에서는 열다섯 살을 넘기기 이전에 죽은 어린아이들은 모두 ‘서천꽃밭’으로 간다고 믿는다. 서천꽃밭은 어린아이의 영혼이 머무는 곳, 즉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특별한 낙원이자 천국이다. 이 낙원은 오로지 어린아이들에게만 입국이 허용되는데, 그 이유는 어린아이들은 아직 죄를 짓지 않은 순수하고 무구한 영혼인 까닭이다.
서천꽃밭은 이름 그대로 사시사철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꽃들의 세상이다. 나이 어린 혼령들은 극락에 가기 전 이곳에 머물면서 꽃에 물을 주는 일을 한다.
말 그대로 꽃과 함께, 꽃밭에서, 저마다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되어 아이들은 이승에서 채 누리지 못한 행복과 평화를 마침내 이곳에서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이다.
--- p.189~190
어쩌면 당신은 그 특별한 눈을 이미 지녔는지도 몰라. 당신은 남다르게 ‘아파하는 마음’을 가졌으니까. 그런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을 가진 이들만이 우리들의 존재를 알아보고, 감지하고 또 공감할 수 있어.
--- p.205
과일나무에서 귤이나 자두 열매가 저 혼자 뚝 떨어져 바닥에 떼구루루 구른다면, 그건 대부분 우리들의 짓이지.
강아지가 별안간 제 꼬리를 물려고 뱅글뱅글 맴을 돌거나, 고양이가 저 혼자 뜀틀 선수처럼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뛴다면, 그건 틀림없이 아이들이 꼬리 끝에 매달려 마구 간지럼을 태우고 있기 때문이야.
해 저물녘 강이나 호수에서 물고기가 느닷없이 혼자 수면 위로 쓩! 하고 튀어나왔다가 퐁! 하고 다시 물속으로 사라진다면, 그건 물어보나 마나 우리들이 물속에서 물고기들이랑 한창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는 얘기이고…….
--- p.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