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급한 것으로 취급받고 있는 예술형식을 합법화시키려는 욕망으로 인해, 어떤 연구자들은 종종 만화를 동굴벽화나 이집트 벽화에 연결하곤 한다. 이러한 관점은 재현의 일반사에 있어서 만화의 특수성을 분리해낼 수 없다. 한 근대적 매체를 몇천 년 전통의 시각적 표현과 혼동하고 있다. - 티에리 그로엔스틴(Thierry Groensteen) --- p. 27
어떻게 보자면 신기한 일이다. 오로지 글과 그림, 말풍선과 칸으로 이뤄진 특정 형식이 기승전결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또는 어떤 인상을 던져주고, 심지어 독자의 감성과 감정을 자극한다. 움직임도 소리도 없다는 이유로 만화는 그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표현형식보다도 독자의 연상력과 상상력을 많이 요구한다. 독자는 무성과 부동의 연쇄된 칸을 읽어나가며 자기에게 고유한 속도로 소리와 움직임을 상상하며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짜나간다. 이러한 경험을 제공하는 다른 표현형식은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 p. 125
만화의 칸은, 자신 앞에 있는 칸과 뒤에 따라오는 칸 사이에서, 그리고 자신의 독자적인 욕구와, 이야기에의 예속 사이에서 언제나 불균등하다.
- 피에르 프레노-드뤼엘(Pierre Fresnault-Deruelle) --- p. 142
독자는 우선 관객이다. 따라서 그림이 그를 끊임없이 보기에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각 페이지가 최소한의 시각적으로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을 보유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상적인 것은 한 페이지마다 매력적인 이미지를 집어넣는 것이며, 이러한 이미지는 우리가 텍스트(문자)를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음모적이어야 한다.
- 브누아 페터스(Benoit Peeters) --- p. 217
사실상 만화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이미지, 또는 이미지 서사가 독자나 관객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착각을 만들어왔다. 우리는 이러한 거짓 수동성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사실상 대부분의 만화 페이지에 걸쳐있는 ‘제시(monstration)’ 기법이고, 다른 하나는 이 중에서도 특별히, 마치 연극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경우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가상의 인물이 벌인 사건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상의 인물이 직접 내 눈앞에서 말하고 움직일 때, 달리 말하면 ‘우리에게 사건이 제시될’ 때 주로 이런 착각, 즉 사건이 내 눈앞에서 (나와 무관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착각을 한다. 독자가 만화작품을 읽으면서 이런 인상을 가진다면, 무엇보다도 등장인물이 아니면서 사건을 직접적으로 설명해주는 ‘공식적 서술자’가 없고, 이야기 외부적(extradiegetique) 간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주브는 공식적 서술자의 축소를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기계’로서의 소설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는 만화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이미지 서사로서의 테크닉이 발전하면 할수록 공식적 서술자의 등장은 점점 더 줄어들어왔다. --- p. 239-240
‘편집물성’은, 오리지널 원고가 매체(책 또는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독자와 만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모든 노력과 제작과정의 결과물이다. 만화책으로 보자면 원고가 만화책으로 출판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교정 교열에서부터 서체 선택, 편집 디자인, 종이 선택과 인쇄 상태 등 모두 포괄해서 지칭하는데, 딱히 표현할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 용어를 하나 만들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독자가 만나는 만화형식은 결코 오리지널 만화원고가 아니다. 이미 편집과 인쇄과정을 거친, 즉 다른 장인의 손이나 공정이 포함된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 과정, 또는 이 과정이 야기하는 명확한 변화를 섬세하게 읽어내지 않는다면, 만화연구가 구체적인 현실에 발 딛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예컨대 오타가 많거나, 서체가 너무 작거나 크거나 어울리지 않거나, 원고 대비 페이지의 여백이 너무 넓거나, 표지 디자인이 거슬리거나, 인쇄가 제대로 되지 않아 이미지가 뭉개지거나, 종이가 너무 반짝거리거나 종이 입자가 너무 두꺼워서 인쇄가 깔끔하지 않을 때, 절지가 제대로 되지 않아 페이지들이 붙어 나올 때, 독자의 기대와 몰입은 방해받고 독서는 달라지거나 중단된다. --- p. 256-257
결국 만화라는 표현형식은 칸과 칸, 페이지를 넘기고 스크롤을 넘기도록 연극성의 장치로 독자를 끌어들이고, 독자들은 읽기의 환경이나 편집물성에 영향을 받으며 자신만의 방식대로 머릿속에 상상적 장면을 만들어나간다. 칸의 안, 칸의 외부, 칸들의 관계, 연출된 모든 것을 연극성의 장치로 읽어나가며 천천히 만들어진 이 상상적 장면은, 한번 만들어지면 그 속에서 작품을 제어하고 기억한다(...) 무의식적으로 이 상상적 장면을 구축하는 즐거움이야말로 만화읽기의 핵심이자, 만화라는 표현형식을 그 어떤 것과도 다른 것으로 만들어주는 고유성인 것이다.
--- p. 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