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타자에 응답하는 사랑의 지혜
‘타자의 철학자’ 레비나스, 그 사유의 결정판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는 레비나스 사상의 진수를 보여 주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이전 『전체성과 무한』이 레비나스의 독자적 사유 틀이 형성된 성숙기의 저술이라면, 『존재와 달리…』는 그 사유가 다듬어지고 심화된 완숙기의 저작이다. 레비나스 사상의 진면목을 알고 싶은 독자라면, 이전 작들에서 드러난 비판 지점들이 보완된 이 『존재와 달리…』를 마주해야 한다.
타자를 위한 윤리, 타자에 대한 책임
『존재와 달리…』가 겨누고 있는 것은 하이데거의 철학을 위시한 존재 중심의 사고방식들이다. ‘존재’를 앞세운 하이데거의 철학은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데 무력했을 뿐 아니라, 전체주의를 뒷받침했다는 혐의마저 받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하이데거의 ‘존재’는 자기 확장의 지평으로 작용하여 전체론으로 이어질 소지를 가진다. 또 인간의 모든 갈등과 전쟁은 자기를 고수하려는 존재-사이(inter-esse)에서 비롯하기에, 이 존재-사이 너머로 벗어나는 것이 인간적 삶이 추구해야 할 윤리의 양상이 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 윤리란 기본적으로 ‘타자를-위함’이며, 그 근거는 이미 우리의 삶 가운데 마련되어 있다. 타자에 응답하는 책임이 존재-사이/존재성 ‘너머’뿐 아니라 그 ‘이편’에, 즉 삶의 심층에 이미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나’라는 주체가 애당초 타자로부터 말미암았으며,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 관계 형성의 과정은 그 시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우리는 그 흔적들 위에서 살아갈 따름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주체는 근본적으로 수동적이다. 주체의 삶이란 ‘타자 우위’의 관계 속에서 성립한다. 따라서 ‘존재와 달리’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아닌 어떤 다른 세계를 지향하자는 뜻이 아니다. 현대 문명에서 특히 두드러진 자기중심적 ‘존재’의 전횡을 바로잡고, 타자를 마주함으로써 삶의 근본적 면모를 회복하자는 뜻이다.
사랑에 봉사하는 사랑의 지혜
‘타자의 우위’가 주체 내부로까지 파고들어 철저해지면서, 이제 주체는 이미 타자와 얽혀 있는 자로, 타자와 근접해 있는 자로, 타자에 의해 상처 입기 쉬운 자로, 타자를 대신하는 자로 등장한다. 이런 면모는 특히 ‘근접성’과 ‘대신함’이라는 개념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근접성이란 타자가 내게 다가와 있는 방식을, 대신함은 그렇게 근접해 있는 타자에게 내가 응답하는 방식을 뜻한다. 근접성에서는 주체-타자의 관계가 타자에서 주체로의 방향으로 탐구되며, 대신함에서는 반대 방향, 즉 주체로부터 타자로 향하는 방향에서 해명된다. 레비나스는 타자가 나를 사로잡듯 ‘강박’하고 나를 ‘소환’하며 심지어 나를 ‘박해’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근접성의 양상이다. 여기에는 대신함의 양상이 대응한다. 즉, 타자의 강박에 해당하는 것은 나의 ‘인질’ 됨이고, 타자의 소환에 상응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응답이며, 타자의 박해와 짝을 이루는 것은 타자의 잘못까지 감내하는 나의 ‘속죄’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은 절대적이며 비교 불가능하다. 그것은 “타자와의 평화가 모든 것에 앞선 나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개념과 표현에서 다소 종교적 색채가 진하게 묻어난다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껏 주로 종교적 신앙에 기대어서나 다룰 수 있었던 묵직하고 중요한 윤리적 사안들을 철학적 논변을 통해서 소화해 보려는, 지혜에 대한 사랑인 철학을 사랑에 대한 지혜로 탈바꿈시키려는 레비나스의 매력적 시도에 따르는 인상일 것이다.
‘존재와 달리’라는 아름다운 위험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극단적으로 윤리의 영웅이 되라고 부추기지 않는다. 책임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타자의 모든 고통을 ‘떠맡는’ 일이 아니다. 주체의 수동성과 충돌하는 듯이 보이는 책임의 자유 문제에 대해서는 나의 선택이 아닌 타자에 의한 ‘선출’이 중점적으로 부각된다. 우리는 근접해 있는 이웃에게 다가가도록 바로 그 이웃에 의해 ‘선출’되며, 앞서 말했듯 그러한 소환에 응답함으로써 책임을 진다. 물론 이러한 책임은 때로 희생을 수반하며 죽음조차 넘어선다. 이제 레비나스는 죽음의 극복을 『전체성과 무한』 때처럼 번식성을 통해 논의하지 않는다. 책임은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한계로 설정한 죽음에 갇혀 있지 않다. 책임은 죽음에 의미를 준다.
레비나스 사상이 현대의 철학, 문학 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주지한 사실이지만, 특히 『존재와 달리…』의 이러한 발상과 개념들은 약자를 위한 사회운동과 문화에 깊이 배어들어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존재와 달리’는 “아름다운 위험을 무릅쓰는” 길이다. 익숙한 앎에 머물지 않고 낯선 타자에게 다가가는 것이기에 위험하지만, 그런 앎을 넘어선 가치를 좇는 것이기에 또한 아름답다. 그 길을 안내하는 『존재와 달리…』라는 책 또한, 타자 윤리라는 가치를 위해 손쉬움에 안주하지 않을 독자에겐 정녕 ‘아름다운 위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