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상공에서 운항 중이던 민간 항공기 4546대가 저마다 착륙할 곳을 찾느라 허둥지둥했다. 하지만 영공 폐쇄 명령이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대상은 대부분 유럽에서 출발해 대서양을 가로지르며 미국으로 비행 중이던 국제 항공편 약400대였다.
비행기 중 일부는 출발지로 회항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캐나다에 착륙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국 국경을 보호하려는 의도라고 정당화하긴 했지만, 미국 정부는 그 비행기들이 안고 있을 잠재적인위협을 손쉽게 이웃 나라에 떠넘기고 있었다. 캐나다 당국은 그중 어느 항공기에 테러범이 있을지 전혀 알지 못했다. 사실, 양국 법 집행기관 모두 그중에 테러범이 잠복한 비행기가 있을 것으로 의심했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캐나다는 주저 없이 갈 곳 잃은 비행기를 받아들였다.
--- pp.19~20
엘리엇은 상황을 간파했다. 텔레비전에 펼쳐진 사건을 볼 때 미국은 혼돈 상태일 듯했다. 대통령은 소재가 불분명하고 육군이 집결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분명 몇 시간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시장은 계산하기 시작했다. 비행 중인 항공기 50대에 승객과 승무원이 대략 250명씩 타고 있다면 앞으로 몇 시간 안에 1만 2000명 이상이 갠더에 착륙할 것이다. 아무도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는다 쳐도, 그만한 인원이 먹을 음식을 마련하는 일만 해도 갠더만 한 도시로서는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엘리엇은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승객들이 밤새 고립될 경우에 대비해야 했다. 시청 안에 긴급 대응반을 꾸리고, 필요하면 협조를 요청하라고 지방자치단체에 두루 연락하기 시작했다.
--- p.40
기다리는 동안 크노트는 수석 사무장을 조종실로 불러 뉴욕과 워싱턴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해 알려 주었다. 다른 승무원에게는 알리지 말고, 승객 귀에도 절대 소식이 들어가지 않게 주의하라고 했다. 캐나다까지는 아직 두 시간 더 가야 하니 소동을 일으켜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 혹시 타고 있을지 모를 테러범을 자극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사무장에게 조종실과 일등석으로 향하는 나선 계단을 식음료 수레로 막고 고정해 방어막을 치라고 했다. 납치범이 마음먹고 달려든다면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지만, 접근 속도를 줄여 승무원이 대응할 시간을 벌 수는 있을 거로 생각했다.
--- p.44,
‘패티!’
순간 비탈레 마음속에 무역센터 남쪽 건물의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여동생 패티가 떠올랐다. 동생은 1년도 더 전에 폐섬유종으로 남편을 잃었는데, 지금은 본인마저 죽었을지 모른다. 이제 열네 살 된 조카 패트릭도 생각났다. 비탈레는 그 아이의 후견인이었다. 만약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패티에게 벌어졌다면 자신이 조카를 직접 맡아 키워야 했다. 10대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 동생과 한 약속을 지켜 낼 수 있을지 걱정이 밀려왔다.
놀랄 정도로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조카를 키우려면 아마 뉴저지로 이사해야겠지. 아이더러 학교를 옮기거나 친구들과 헤어지라고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그렇게 많은 일을 겪은 아이에게 또 그럴 수는 없어. 하지만 뉴저지로 이주하면 뉴욕주 경찰을 그만두어야 할 텐데. 혹시 주소지만 브루클린에 그대로 둘 수 있으려나. 아니면, 관할 주 내에 거주해야 한다는 규정을 면제받을 수 있을까.
--- p.57
비행기가 꼬리를 물고 줄줄이 활주로에 들어섰다. 공항 울타리에 늘어선 주민들은 차 옆에 붙어 선 채로 비행기 승객에게 손을 흔들었다. 환기도 하고 폐소공포증으로 고통받는 승객들에게 안정을 찾아주기 위해 문을 열어 둔 비행기도 일부 있었다. 계단이 없으니 지면으로부터 6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리지 않고는 내릴 방법이 없었지만, 열린 문을 통해 주민들은 누구든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 pp.64~65
시내에서는 구세군이 지원 물품을 모아 각 대피소에 전달하는 중앙 유통처 역할을 맡았다. 지역 라디오 방송국과 공영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음식, 여분 침구, 헌 옷 등 승객이 쓸 만한 물건이면 무엇이든 기부해 달라고 안내 방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승객에게 주려고 집에서 이불, 담요, 베개 등을 들고 나온 사람이 주민센터 정문에서부터 3킬로미터 가까이 줄을 섰다. 지역 상인은 수천 달러어치 물품을 기부했다. 약사 오브라이언은 지역 내 모든 약국과 협력해 갑작스레 착륙한 승객들에게 나눠 줄 각종 세면도구를 확보하고, 칫솔 4000개도 따로 주문했다.
--- p.71
록샌은 뉴욕의 현실이 상상한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걸 눈치챘다.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나쁠 것 같았다. 돌아서서 밖으로 나갈까, 잠깐 고민했다. 오늘 밤에 이걸 꼭 봐야만 할까? 다들 피곤해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걸 수도 있는데. 밤에 푹 자고 나서 보면 그렇게까지 나빠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을까? 록샌은 결국 텔레비전을 보는 편이 낫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천천히, 거의 발끝으로 걸어 강당에 모인 무리 뒤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고개를 들어보니 세계무역센터 잔해 앞에서 생중계를 진행하는 장면이 보였다. 그 순간 록샌 역시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커진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 pp.79~80
휘튼 부부는 냉장고에 있는 음식은 뭐든지 꺼내 먹고, 전화를 걸거나 컴퓨터로 이메일을 보내도 된다고 했다. 위성방송 리모컨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고, 깨끗한 수건을 건네준 뒤 부부는 밖으로 나갔다. 원하는 만큼 머물러도 좋으니, 있다가 나갈 때는 문을 잠그지 말고 그냥 두라고 했다. 비탈레는 두 사람에게 아무 말도 못 했다. 낯선 사람을 집에 남겨 두고 나가는 휘튼 부부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비탈레에게는 그런 신뢰의 표현이 절실했다. 마음의 고통을 덜어 주는 특별한 행동이었다. 여전히 머릿속에 울려 퍼지고 있는 음악만큼 세상이 삭막하지만은 않다는 안도감을 주는 표지였다.
--- pp.106~107
남자는 뒤뜰에서 가족과 함께 손자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중이라며, 혹시 함께하겠냐고 물었다. 패스트는 그러기로 하고 뒤뜰로 따라갔다. 아이의 부모가 다른 아이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풍선과 색종이 띠로 뒤뜰을 장식하고 있었다. 남자가 그날 파티의 주인공에게 패스트를 소개했다.
“생일 축하해요.” 패스트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이가 답했다.
“몇 살이에요”
“일곱 살이요.” 아이가 대답했다.
우연히 길을 지나던 이방인을 초대해 기꺼이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이 따뜻한 가족이 패스트의 기운을 북돋웠다.
--- p.110
유럽을 떠나기 전에 처방받은 약품을 짐 가방에 넣어 수하물로 부친 승객이 많았다. 짐 가방은 전부 비행기 안에 있어 꺼낼 수 없었기 때문에, 갠더에 지내는 동안 별도의 처방전이 꼭 필요했다. 실물 처방전을 소지한 승객은 거의 없었다. 오브라이언을 포함한 약사들은 매번 현지 의사나 약사에게 전화를 걸어 정확한 약품과 용량을 확인한 뒤, 새 처방전을 작성해 전송했다. 오브라이언과 아내 론다는 4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십여 개 국에 전화를 돌렸다.
놀랍게도, 약품을 표시하는 일반적인 기준이라는 게 없었다. 보통 고혈압 환자에게 처방하는 아테놀 같은 약품은 나라마다 다른 이름으로 통하곤 했다. 20년 넘게 약사로 일한 오브라이언은 모호한 처방전을 해석하고 승객에게 꼭 맞는 약품을 찾아내려고 몇 시간씩 인터넷 검색을 하고, 지역 병원 및 캐나다 보건 공무원의 협조를 구했다. 모두 승객을 위해 무보수로 한 일이었다.
--- p.113
해나와 데니스는 자기 집으로 오라는 주민의 초대를 번번이 거절했다. 향군회관을 나갔다가 행여 자신을 찾는 연락을 놓칠까 두려웠다. 한편, 회관 안에 있으면 텔레비전 뉴스를 피할 수 없어 괴로웠다. 뉴욕의 참사 현장을 참고 지켜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다는 걸 눈치챈 향군회 사람들은 돌아가며 그들 곁을 지켰다.
--- p.116
해리스는 동료 직원 비 터커에게 연락해 사료와 물, 청소 도구, 그 밖에 필요할지 모를 물건을 전부 트럭에 싣고 공항으로 달려갔다. 도착 즉시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동물은 이동 장에 갇힌 채로 수하물 칸에 실려 있었다. 각 비행기 내부를 급히 훑어본 해리스는 동물들이 감정적 고통을 겪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짐 가방 더미 뒤에 묻혀 아예 보이지 않는 동물도 있었다. 그래도 울거나 짖는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 p.120
마을 주민은 집마다 옷장을 털어 안 쓰는 침대보와 담요, 베개를 여러 대피소로 가져갔다. 짐을 못 꺼내서 같은 옷을 거의 이틀 내내 입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마법처럼 헌 옷과 새 옷더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까운 글로버타운과 도버, 헤어베이 같은 작은 마을에 사는 여성들은 음식 장만을 돕기로 하고, 매일 갬보까지 자동차 여러 대로 줄지어 음식을 실어 날랐다. 씻고 싶은 승객은 누구든 지역 주민의 어깨를 톡 건드리고 묻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아예 이런 행동조차 필요 없을 때도 많았다. 주민이 먼저 대피소에 들어가 “누구 샤워하실 분 계세요”라고 소리치곤 했기 때문이다. 손을 든 사람은 누구든지 집으로 초대받았다.
--- pp.146~147
그즈음 향군회관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해나와 데니스가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퍼트리샤와 메리앤, 그 밖에 가족 중 누군가가 향군회관에 전화를 걸면 받는 사람은 저마다 “여기서도 모두 기도하고 있어요”라거나 “저희가 두 분 잘 돌봐 드리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따뜻한 말을 전한 다음, 두 사람을 찾으러 달려갔다.
해나와 데니스에게 전해 줄 새로운 소식이 거의 없어서 전화를 걸 때마다 괴로웠다. 그래도 퍼트리샤는 기운을 북돋우려 애쓰며, 잔해 속에서 살아 나온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이런 뉴스는 결국 거의 다 거짓으로 드러났지만, 당시에는 그나마 그런 소식이라도 알려 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수색하고 있나 봐요, 엄마. 구조도 하는 것 같으니, 케빈도 찾아낼 거예요.”
--- p.167
엄청난 연대 의식을 보여 준 주민들에게 느끼는 애착도 그만큼 컸다. 주민들은 자기 마을에 찾아온 손님을 교외 지역으로 데려가 관광을 시켜 주고, 집에도 데려갔다. 승객은 난민이라기보다는 오랜만에 만난 친척 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 생각을 하면 할수록 발데사리니는 마음이 찡했다.
패션 산업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발데사리니는 이 감정이 그저 사소하게 치부하고 넘길 수준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누려야 할 감정이었다. 온 세상이 망가지는 와중에 지금, 바로 여기, 지구상의 구석진 조그만 마을에서만큼은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니 안심이 되었다.
갠더에는 증오도 분노도 공포도 없었다. 오직 공동체 의식만이 살아 있었다. 여기서는 모두가 동등하고, 누구나 똑같이 대접받았다. 인간애가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왕성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발데사리니는 그 모습을 직접 본 자신이 전혀 상상치 못한 방식으로 영향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용기를 취소하겠다는 전화를 받은 프랑크푸르트의 비서는 회장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발데사리니는 다른 승객을 버려 둔 채 자기만 떠나는 것은 지난 72시간 동안 벌어진 모든 일을 배신하는 행동이 될 거라고 말했다. 승객이 어디로 가든 자신도 함께 가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든 함께 감당해야 했다. 발데사리니는 이 마음을 끝까지 지켰다.
--- pp.215~216
‘매직킹덤’에 가지 못해 슬퍼하는 아이가 그렇게 많다고 생각하니 갠더 주민들은 마음이 쓰였다. 게다가 그중 네 명은 생일을 맞아 놀이동산에 가는 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대피소를 제공한 세인트폴중학교의 교직원과 시 공무원은 갠더에 있는 동안 한 살을 더 먹는 모든 아이를 위해 성대한 생일파티를 마련했다.
지역 슈퍼마켓에서는 400명이 먹을 만큼 거대한 생일 케이크를 기부했고, 교사와 학생은 손수 소규모 디즈니월드를 만들기로 했다. 구내식당에 색종이 띠와 풍선을 달아 장식하고, 고등학교 여학생 세명이 동화 속 공주님 의상을 입었다.
--- p.220
편지를 읽는 동안 스미스는 손이 떨리는 걸 느꼈다. 콜프의 편지는 기나긴 나흘을 보내고 몹시 지쳐 있던 스미스를 감동에 빠트렸다. 스미스가 울기 시작하자 랍비 수닥이 온화한 목소리로 스미스와 학교 사람이 보여 준 친절을 모두가 오래 기억하고 칭송할 거라 말했다. 뉴펀들랜드인은 단지 연착된 항공기 승객을 받아 주기만 한 게 아니라 머나먼 곳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수백 명에게 안식처를 주었다고, 온 세상이 위태롭게 느껴질 때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고 말했다.
--- p.247
마지막 비행기가 갠더를 떠나자마자 세인트존스에 있는 주정부에서 갠더시청에 연락해서는, 고립된 승객을 돕느라 오랜 시간 애쓴 주민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모든 자원봉사자를 초대해 성대한 파티를 열자고 제안했다. 시에서는 갠더 시민이 충분히 격려받을 만하다고 판단해 수락했다. 주정부가 비용까지 댄다니 그보다 좋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식이 퍼져 나가자 거의 모든 주민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미국에 참사가 발생한 마당에 흥겹게 즐긴다는 건 적절치 않았다. 게다가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도와준 것이 잔치를 벌일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안 그러면 어떻게 했겠는가? 곤란을 겪는 사람을 돕지 않고 어떻게 한단 말인가?
--- p.260
록샌은 갠더에서 보낸 그 며칠간 세계와 자신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남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허리케인이나 토네이도처럼 도무지 손쓸 수 없는 상황에 휩쓸린 낯선 사람들 말이에요. 제가 바로 그런 처지였어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 뚝 떨어졌는데, 그런 저를 돕는 손길이 저와 제 가족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절실히 느꼈어요.”
--- p.279
책이 나왔을 때, 나는 직접 책을 들고 해나와 데니스를 찾아갔다. 아들을 잃은 두 사람은 9·11 1주기를 앞둔 당시 몹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해나는 내가 거실에 앉아 있을 때 평소답지 않게 침묵을 지킬 정도로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날 만남을 통해 해나는 갠더에서 만난 다채로운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차량이 필요한 승객들을 위해 운전사를 자처한 톰 머서, 임신 중이던 캐런 존슨, 그리고 당연히, 뷸라 쿠퍼까지.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해나가 미소를 지었는데, 그 순간 나는 갠더 사람들이 만들어 준 그 소중한 시간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인생 최악의 시기를 맞이한 해나에게 갠더 사람들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기댈 수 있는 언덕을 선사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요.” 해나의 딸 퍼트리샤가 말했다.
“때로 엄마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곤 해요. 그러다가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생각을 하면 다시 환하게 밝아져요. 살다 보면 슬픈 일이 일어나요. 좌절도 겪고.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좋은 기억이라는 게 생겨요. 받아들이기 힘든 말일지 몰라도, 좌절에 좋은 추억이 담기는 거예요. 가장 깜깜한 순간에 누군가 한 줄기 빛을 비춰주어 잊고 싶은 기억 속에 따뜻한 온기를 더해 주는 거죠.”
--- pp.289~290
갠더 사람들이 인간적 약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해도 갠더에서 일어난 일은 여전히 특별하다. 갠더가 마법 같은 공간이라서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마다 약점을 지닌 사람들이 재난 앞에서 한마음으로 친절을 베풀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그렇다면 우리도 누구든 똑같이 행동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긴다.
--- pp.293~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