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2년 02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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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204쪽 | 296g | 135*195*16mm |
ISBN13 | 9788937444760 |
ISBN10 | 8937444763 |
발행일 | 2022년 02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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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204쪽 | 296g | 135*195*16mm |
ISBN13 | 9788937444760 |
ISBN10 | 8937444763 |
그들의 말 혹은 침묵 옮긴이의 말 |
1977년에 출간된 아니 에르노의 두 번째 소설이다. 주인공은 '안'이라는 소녀인데, 아니 에르노의 첫 번째 책 <빈 옷장>의 주인공 '드니즈'와 마찬가지로 작가 자신의 출신 배경과 성장 과정, 실제 경험 등을 많이 반영하여 만든 - 사실상 작가 자신과 거의 동일한 - 인물로 보인다.
중학교 졸업 학년인 안은 학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이지만,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 대부분인 학교에서 몇 안 되는 프롤레타리아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안의 부모는 안이 학교 아이들에게 잘 보이도록 새 원피스를 사달라고 하거나 친구들과 놀러 가겠다고 하면 공부나 하라고 야단치고, 그럴수록 더욱 더 깊은 열등감과 반항심을 느끼게 된 안은 시험이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면 기필코 학교 아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뜨거운 연애(+첫 경험)를 하겠다고 결심한다.
이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십 대 청소년이 주인공인 성장 소설(및 영화, 드라마 등)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변주된 서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다 만난 남자아이와 썸을 타다가 헤어지고, 또 다른 남자아이와 썸을 타다가 이번에는 좀 더 진도를 나가보고 그러다 또 헤어지고... 그렇게 몇 번의 연애를 거듭하다가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되는 이야기, 라면 로맨스(라는 이름의 판타지) 소설이 될 텐데, 이 소설이 로맨스 소설로 분류되지 않는 건 로맨스 이상(또는 이외)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방학 동안 몇 명의 남자와 아주 짧은 연애를 즐긴 안은 이 과정에서 몇 가지 충격을 받게 된다. 첫째는 자신의 계급에 대한 인식인데, 이는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 자신은 노동자 출신인 상인 부모 슬하에서 자라서 중상류층의 언어와 문화를 자연스럽게 습득하지 못했고 그만큼 뒤처져있다는 - 자각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식이다.
둘째는 자신의 성별에 대한 인식인데, 이는 외동딸로 자랐고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안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안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과, 사회가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연애라는 일대일 관계에서조차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e.x. 남자가 여러 여자를 만나면 능력 좋다는 소릴 듣고, 여자가 여러 남자를 만나면 걸레라고 불리는 것)
방학이 끝나고 고등학생이 된 안은 겉으로는 성실하게 학교 생활을 하지만, 속으로는 예전에 믿었던 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고 그러므로 아무것도 읽고 싶지 않고 쓸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안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이 책의 15페이지에 나온다. "내게 다가오는 모든 걸 느긋하게 맞이하고 누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 진리를 왜 그 때는(어쩌면 지금도) 몰랐을까(모를까).
그들 생각에, 글쓰기는... 위험했다. 그만두지 못하겠니, 그러다 큰일 난다! 78
아니 에르노 작품은 처음이 아니다. 여러 작품들을 읽었기에 이 소설도 그녀의 작품이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면서 읽은 시간들로 떠오른다. 빼곡하게 이어지는 긴 문장들의 호흡, 멈추게 하는 문장, 다시 읽게 하는 글에서 문맥의 흐름을 잃지 않고자 여러 번 멈추기도 한 작품이다. 그녀의 여러 작품들이 가진 바탕 그림만큼이나 이 작품도 연장선에서 만나게 한다. 유년기의 환경, 부모의 직업, 부모와 집안사람들의 대화들을 되짚어보게 된다. 화자가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배워가는 학업과 교우들의 집안 환경까지도 자신의 환경과 비교된다. 부모의 직업과 경험한 한계들이 그들의 말과 침묵을 통해서 투영된다. 그것들을 경험하며 느끼며 생각한 그녀의 중학교 졸업과 친구와 함께 한 많은 날들과 대화들도 작품에서 만나게 된다. 서민의 삶과 그들이 나누는 대화, 외할머니의 죽음을 대하는 가족들의 모습과 대화들도 밀접하게 기록된다. 여유를 부리지도 못하고, 빼곡한 경제 상황들이 짐작되는 상황에서 그녀가 배우고 깨우치고 사고하는 것들은 확장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 간극을 채우지도 못하고 채울 수도 없는 자신의 집안 환경과 부모들의 모습은 그녀를 더욱 말 없는 아이로 보여주게 된다. 아이는 토론하며 작품을 읽고 함께 대화할 수 상대를 찾는다. 하지만 부모님도 그러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우연히 알게 된 남자아이와도 대화는 이어지지 못함을 깨닫는다.
내가 노동자 계급에 속한다는 사실... 그 속에 늘 잠겨 지냈음에도 그 어떤 특별한 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143
이모가 묻길, 안, 혓바닥이 달아났니?... 달아난 건 오히려 그들의 혓바닥, 그들의 언어이다... 그들이 하는 말과 들어맞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181
'소외'의 대상이 된 사람들. 계급구조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자식의 눈에 보이는 부모의 모습들과 목소리, 싸움과 경찰의 출동을 짐작하는 상황들, 텔레비전의 소리와 신문, 엄마가 읽는 소설, 유급휴가가 주어지지만 즐기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와 이유들이 화자를 통해서 그려지는 소설이다. 부자의 삶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사고의 한계점을 화자의 시선에서도 예리하게, 명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시대의 격동기를 떠올리게 한다. 다른 작품에서도 언급되는 이념들이 이 작품에서도 대학생을 통해서도 짚어진다. 좌파, 우파,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신이 속한 계급을 이해하면서 더욱 또렷하게 깨닫는 여러 사실들도 작품은 놓치지 않는다. 이모를 통해서, 어머니를 통해서, 아버지를 통해서 전해지는 목소리를 따라가게 한다. 착잡한 상황들이 빼곡하게 채워진다. 화자의 갈급함과 내적 마찰들을 주시하게 한다. 심지어 성에 대해서도 어머니는 대화해 주지 않는다. 소설에서 펼쳐지는 것과는 상이하고 다른 현실의 상황들에 홀로 경험하면서 깨닫는 것들도 작품은 놓치지 않고 전달한다. 세상의 잣대에 남성과 여성이 가지는 경계선을 화자가 만나는 남성들을 통해서도 놓치지 않고 상기하게 한다. 뭔가를 찾아다니는 자는 늘 남자애들이라 유쾌하지 않았다고 화자는 떠올린다. 이 화자는 여성이며, 뭔가를 찾아다니는 자로서 실패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면서 눈물로 깨우치기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금기하며, 제한을 제시하는 사회 속에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가지는 의문들과 호기심이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장바구니가 터지게 물건을 담는다든가, 아름다운 침실이라든가, 유급 휴가 같은 것, 여전히 그런 것은 행복 같지 않았다. 자유가 무엇을 닮았는지 모르지만 진정한 자유를 머릿속에 그려 보기란 어려웠다. 120
자신들의 삶이 실패한 줄도 모른 채 자동차를 타고 슈퍼마켓으로 향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 그런 사실을 아는 내가 그들 모두 보다... 커다란 행운 같았다. 121
<이방인>책을 읽은 화자가 느끼며 상기하는 것들은 작품 속에서도 자주 언급이 되기도 한다. 부모와 책에서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그 마음까지도 헤아려보지 않을수가 없다. 자신이 속한 계급을 인지하지 못했다가 어느 순간, 어느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를 통해서 깨닫게 되면서 보이는 것들과 상황들은 냉혹하기만 하다. 화자는 그러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만나고 싶었다. 그 깨달음을 준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도 냉정하게 되짚어보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남성을 향한 잣대와 여성을 향한 잣대는 얼마나 유연할까? 그에 대한 질문도 함께 내놓는 작품이기도 하다.
번역가의 글도 꼭 읽었으면 한다. 번역 작업의 뒷이야기와 갈등까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상깊게 읽었던 여러 작품들을 번역한 분이라 반가웠던 분이기도 하다. <동의>, <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등을 번역한 분이다.
그들은 모르겠지만, 사실 착취당하고 있고 불행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121
그들은 절대 그 누구에게든, 그 무엇이든, 요구하려고 든 적이 없다. 121
그들의 소외 탓에 불행한 사람은 나였다. 122
중학교... 일종의 지표 노릇을 한다. 그런데 부모와 함께 있으면 지표를 가질 수 없다... 난 울었고... 우니까 조금은 덜 미칠 것 같아서였다. 방금 읽은 책에 대해서 두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만 있었더라면. 41
저 가엾은 여자는 어그러짐 없는 조화도 믿는지 모른다... 지금의 그녀가 하는 말, 고수하는 원칙과 너무나도 동떨어진 그 이미지. 튀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 부자는 아니지만 반듯하게 살자. 그녀가 부유한 사람들에 대해 뭘 알고 있을까. 183
또 한 끼 넘겼구나, 아버지가 말하고, 어머니가 피곤한 두 다리를 쭉 펴면, 나는 그 올무에 걸려서 옴짝달싹 못 한다... 나도 내 부모처럼 자잘한 것들에 빠져서 길을 잃을 거야, 그 두 사람이 한 얘기를 또 하고 거듭 같은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진정 출구란 없다... 삶을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삶을 변화시켜야 해요. 그런데 저 여자는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191
소설은 아래와 같이 시작된다. 나는 중학생인데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방학을 앞두고 있으며, 선생님으로부터 작문 숙제를 받은 상태이기도 하다. 적당한 수준에서 자의식, 그러니까 여성이라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딸이라는 사회경제적 존재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육체와 정신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성장을 도모하는 딱 그 시기가 소설에서 그려진다.
“가끔 내게 비밀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비밀은 아니다. 그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구가 없고,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니까. 정말 이상도 하지. 셀린은 한 학년 위인 고등학생 남자애와 사귄다. 걔는 4시면 우체국 거리 모퉁이에서 셀린을 기다린다. 적어도 그건, 셀린의 비밀이란 건 훤히 보인다. 내가 셀린이라면 그런 비밀은 숨기지조차 않을 텐데. 하지만 내 경우에는 형체가 없다. 그 생각만 하면 스스로가 둔하게 느껴지고 굼벵이가 된 것 같다. 더 제대로 이해하게 될 순간까지, 열여덟 어쩌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쭈욱 자고 싶다. 모든 게 명확해지고 제자리를 찾는 날이 있겠지...” (p.7)
하지만 이 합심이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보통은 육체가 앞서가고 정신이 그 뒤를 따르는 양상이고, 소설 속의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남자가 있는 동년배의 여자친구들을 질시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도 마뜩잖다. 나는 조심스럽게 부화하고자 하는 나비 같은 존재이고, 사실은 부모의 간섭도 어지간하여 쉽게 날아오르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 그들에겐 휴가도 생피에르 축제도 없고, 마치 현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다. 늘 직업, 교육, 장래만을 향해 돌아가는 고개. 그런 생각이라면, 두 발을 모아서 곧장 미래로 도움닫기를 하거나 아니면 말짱한 상태로 미래에 도달했음이 확실해질 때까지 날 가둬 두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조금 늦었다고 그런 야단법석을 떠는 모습을 보면, 혹시 날 가둬두는 게 그들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개학. 고등학교. 개학. 그러고 나면? 평생 그렇게 지속될 수는 없을 텐데...” (p.62)
하지만 나는 충분히 컸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는 오후에 움쑥 들어간 어머니 등에 붙어서 함께 잠드는 일이 즐겁지 않았다.’ 라고 스스로를 표현할만 하다. 나는 친구 가브리엘의 남자였던 마티외와 자연스럽게 육체적인 관계를 진척시켜 나간다. 방학 캠프의 지도 교사를 담당하는 마티외를 비롯한 일군의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리기 시작한다. 나는 작은 실패들에 굴하지 않는다.
“... 그 일은 어쨌든 제대로 이루어진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우스꽝스럽고 고통스러운 그 모든 몸놀림만 없었어도, 그를, 마티외를 즉각 사랑했을 텐데. 땀투성이 그의 모습은 마음에 들었다. 변모가 일어났던 거기, 그곳을 아직 만지게 되지는 않았는데, 그가 떠나는 순간 원피스 위로 자기 손을 얹으며, 내 거야 이거, 말했다... 어째 됐든 웅크리고 있던 그 작은 짐승, 그게 무엇을 원하는지 우린 모른다. 그것을 처녀성이라고 부른다먼, 과연 정확할까. 게다가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닌 거기에 크루뉴뉴라는 이상한 이름을 붙인다. 명명할 수 없는 대상이라니, 쳇, 내 안에 그런 건 없었다...” (pp.130~131)
나는 마침내 성공한다. 하지만 그것이 커다란 의미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나는 마티외를 겪은 이후 또 다른 남자 얀과도 관계를 맺는다. 나는 이러한 나의 행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어린 육체의 속도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마티외는 나의 이런 행태를 비난한다. 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 당사자 아닌 또 다른 젊은 육체가 거들고 나선 것인데, 그러니 그 비난이 성공적일 리 없다.
“... 교사가 내준 주제에 대해서 아무 할 말도 없다. 내 마음 가는 대로 쓴다면, 뒤죽박죽 엉망이 되겠지. 자유롭게 써도 된다면 피와 비명에 대해 말할 텐데. 그뿐만 아니라 빨간 원피스, 그리고 청바지도 있었다. 사람들은 사건에서 옷가지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그리고 부엌에서의 식사도 중요함을 짐작하지 못한다. 또 한 끼 넘겼구나, 아버지가 말하고, 어머니가 피곤한 두 다리를 쭉 펴면, 나는 그 올무에 걸려서 옴짝달싹 못 한다. 그런들 뭐 대수겠어, 나도 내 부모처럼 자잘한 것들에 빠져서 길을 잃을 거야, 그 두 사람이 한 얘기를 또 하고 거듭 같은 얘기를 시작하면 진정 출구란 없다...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나도 그렇게 될까. 이제는 온갖 일이 다 겁나고, 마음속에 아주 모호한 뭔가가, 마치 구름이 낀 것 같다. 작문 과제를 절대 마치지 못할 텐데, 교사는 내게 빵점을 주겠지. 바로 그 교사가 이런 말을 한다. 삶을 변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삶을 변화시켜야 해요. 그런데 저 여자는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pp.190~191)
그리고 소설은 위와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어린 소녀라는 육체적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나와 변변한 자산을 갖지 못한 계급의 부모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나는 어쩌면 동전의 양면 같다. 혹은 제로섬의 두 당사자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앞의 나가 성공하는 순간 뒤의 나가 실패하게 될 것 같은 두려움, 소설 속의 나는 이 두려움으로 가득하면서도 동시에 그 두려움을 떨쳐내고 싶어 아찔하다.
아니 에르노 Annie Ernaux / 정혜용 역 / 그들의 말 혹은 침묵 (Ce Qu’ils Disent ou Rien) / 민음사 / 202쪽 / 2022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