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는 오랜 시간 집단생활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긍정적인 감정들이 ‘나’라는 개인의 행복에 의한 즐거움인지, 아니면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수행했을 때 얻는 기쁨인지 잘 구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욕구는 사회적 욕구와 상당히 연관되어 얽혀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욕구와 나의 욕구가 사회 속에서 섞이고 그 안에서 또다시 나의 욕구가 발생한다. 다른 사람이 내게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되고, 내가 바라는 것은 다시 누군가의 욕구에 영향을 미친다. 개인의 욕구와 사회의 욕구는 구별되는 듯 구별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중에서
독일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우월감과 열등감에 대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반드시 가져야 하고 “잘 사용해야 하는” 적극적 개념이라고 설명하며, ‘사용의 심리학’을 강조한다. 아들러는 경제적 조건, 부모의 직업, 부모의 관심, 형제, 키, 성격적 기질, 재능, 외모 등 우리가 유전적으로 혹은 환경적으로 가진 여러 요소들을 일종의 벽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이 벽돌들을 어떻게 사용해서 어떤 집을 짓느냐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또한 아들러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요소가 있다면 다른 부분을 통해 자존감의 평균점을 상승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낮은 수치의 요소와 다른 수치의 평균을 맞추는 것이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은 열등감을 미술이라는 예술적 행위로 연결시킨 대표적인 작가로, 그의 삶에서 장애는 불편함이기도 했지만 창조적 원천이기도 했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힘」중에서
뭉크의 「툴라 라르센과 자화상」에는 뭉크가 사랑했던 마지막 여인 라르센과 뭉크 자신이 등장한다. 결혼을 하고 싶어 했던 여자친구와 결혼을 원치 않았던 뭉크 사이에 굵은 세로줄이 그어져 있어, 이 둘의 갈등을 극명히 보여준다. 심지어 뭉크는 그가 불안의 상징으로 많은 작업에 사용했던 녹색 자화상을 배경에 그려 넣기까지 한다.
인간이 갈등을 가지는 원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때문이다. 누군가와의 관계가 없다면 갈등을 가지게 될 이유도 없다. 그렇기에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살펴보고 우리가 무엇을 바꿔나갈 것인가에 대해 살펴본다면 갈등을 극복하는 방법과 가까워질 수 있다.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는 나, 너, 관계, 그리고 환경이다.
---「나는 너를 바꿀 수 있을까」 중에서
뭉크의 삶에서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정리해 보았을 때, 그가 이러한 절망의 시간들 속에서 희망을 바라보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했다.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고, 그림으로 대중들에게 더 다가가기도 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결국 뭉크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선택했고 오슬로 대학에서 벽화 의뢰가 들어왔을 때, 회복의 희망을 담은 그림 「태양」을 그려낸다. 이 그림을 보면, 밝은 태양빛이 그림 구석구석까지 빛을 전달하고 있다. 우울한 감정과 상처받은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여 많은 대중들의 공감을 얻었던 작가인 만큼, 「태양」이 보여주는 긍정적인 희망의 빛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상처를 드러낼 것」중에서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은 한 사물의 본질은 여러 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화가 친구가 파인만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너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꽃의 아름다움을 느껴야 하는데 너는 꽃의 세포와 꽃의 역학만을 바라보니, 안타깝다.” 이에 파인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사물의 본질을 더 많이 이해하고 아름다움을 느끼기 때문에 내 지식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아. 화가는 색채적 지식이 더 많기에 색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데에는 나보다 뛰어날 수 있겠지만, 내가 꽃의 DNA의 구조, 꽃이 어떻게 성장하는가에 대한 관점으로 바라본 꽃은 여전히 아름다워.”
하나의 사물의 본질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입체주의는 한 가지가 아닌 다른 방식의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편견이 없는 그림이다.
---「세상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