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는 축 늘어진 머리카락의 그늘 아래 얼굴을 붉혔다. “세상은 너무 악해.” 그녀가 자신을 살피는 피셔 부인의 걱정 어린 눈초리를 피하며 낮게 말했다.
“예쁜 곳은 아냐. 그리고 그 안에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그 규칙에 따라 싸워야 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릴리, 혼자서 싸우면 안 돼!”
--- p.134
“상황은 그런 거지요, 아시다시피. 나는 지난 몇 년간 사교계에서 지위를 올리려고 한 계단 한 계단 차근차근 밟아 왔어요. 내가 그런 말을 해야 한다는 게 우습다고 생각해요? 내가 사교계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고 말하기를 꺼릴 이유가 뭐지요? 아무도 경주마나 화랑을 소유하고 싶다고 말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사교계에 대한 취미도 또 다른 종류의 취미에 지나지 않는 거지요. 지난해에 나를 무시한 치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요. 그게 듣기에 더 낫다면 그렇게 말해도 좋습니다. 어쨌든, 난 최상류층 집안에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고, 그것을 향해서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고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그러뜨리는 지름길이 어울려서는 안 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는 거라는 사실을 알지요.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실수를 피하려는 이유입니다.”
--- p.141~142
“(……)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람들한테 의지해서 살기도 하지. 하지만 그런 특권을 누리려면 값을 치러야 해! 그 사람들의 정찬을 먹고, 그 사람들의 포도주를 마시고, 그 사람들의 담배를 피우고, 그 사람들의 마차와 오페라 좌석과 자가용을 사용하지…… 그건 맞아. 하지만 그런 사치들 하나하나에는 다 세금이 붙거든. 남자들은 그 세금을 하인들에게 주는 후한 팁으로, 분에 넘치는 카드놀이로, 꽃과 선물로…… 그리고…… 그리고…… 다른 많은 비싼 것들로 지불해. 여자들도 물론 팁과 카드놀이로 지불하지……. 오, 그리고, 맞아, 나는 브리지도 다시 해야 했어…… 그리고 최고의 양재사한테 가서 옷을 맞추고, 경우에 맞는 옷을 전부 갖추고, 또 항상 신선하고 절묘하고 즐거운 존재가 되는 것으로 지불하지!”
--- p.160~161
그녀는 바위에서 떼어 낸 말미잘만큼이나 자신에게 익숙한 좁은 범위 밖에서는 무기력한 생물체인 것이다. 그녀는 장식물이 되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자연이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장미 잎을 둥글리고 벌새 가슴의 색을 칠했단 말인가? 그리고 순수하게 장식적인 사명을 이루는 것이 자연의 세계에서보다 사교계의 사람들 가운데서 덜 쉽고 덜 조화로운 일이라면 그것이 릴리의 잘못인가? 그 일이 물질적인 필수품의 제약을 받고 도의심으로 인해 복잡해진다면 그것이 과연 릴리의 잘못이란 말인가?
--- p.224~225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요…… 하지만 사는 것은 힘들어요. 그리고 전 아주 쓸모가 없는 인간이에요. 독립적인 존재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예요. 저는 제가 인생이라고 이해하던 거대한 기계의 나사 하나 혹은 톱니 하나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기계에서 떨어져 나온 뒤 제가 다른 곳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자신이 단 하나의 구멍에만 맞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원래 자리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쓰레기 더미 속으로 던져지든가 둘 중 하나죠…… 그런데 쓰레기 더미 속의 실상이 어떤지 모르실 거예요!”
--- p.238
그녀 자신 다른 장소에 비해 더 소중한 지상의 어떤 장소도 없는 존재로 자라났다. 그녀에겐 마음으로부터 귀의하거나 자신을 위해서 힘을 얻거나 남을 위해서 온정을 끌어낼 수 있는 어떤 것도, 어려서부터 경건하게 믿어 왔던 중심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전통도 없었다. 어떤 형태든 서서히 축적되는 과거는 우리 핏속에 살게 마련이다. 시각적 기억들로 채워진 옛집의 구체적인 이미지든, 혹은 손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열정과 충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의 집이든. 그런 과거는 모두 개인의 존재를 확장하고 심화하는 힘을, 신비한 혈연의 고리를 통해 개인의 존재를 인간 전체의 노력이라는 거대한 총체에 연결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 p.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