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절 잘 몰라서 저지른 실수를 언제까지고 붙들고 있어 봐야 소용없지. 오늘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어제의 행동이 실수임을 깨닫고 오늘부터 하지 않게 되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예전 취업 준비 시절 자기소개서에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어떤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기보다는 항상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상황을 유지하는 사람이고 싶다고 썼던 기억이 난다. 이런, 돌고 돌아 같은 결론이라니, 나 정말 나아지고 있는 것 맞나요? 에잇, 여기 진피즈 한 잔 더 주세요!
---「여기 진피즈 한 잔 주세요, 진피즈」중에서
이게 무슨 일이람. 이 맛있는 걸 여태껏 일본에서만 버블의 유산이라며 먹어온 거야? 끈적한 멜론 과즙과 헤네시의 만남도 혀를 내두를 맛이지만 무를 대로 무른 과육이 헤네시를 머금었다가 입 속에서 내뿜었을 때의 짜릿함은 정말 먹어보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이 맛을 아느냐 모르느냐로 미식 경험의 지평이 달라질 지경이다. 아아, 긴자는 너무 멋들어져서 부담스럽다거나, 버블경제의 한심함을 늘어놓던 사람은 어디 갔을까. 버블, 최고!
---「긴자와 헤네시 멜론」중에서
따듯한 호박색, 스파이시한 풍미 속에 숨은 부드러운 달콤함에 왈칵 한 모금 마시면 독한 알코올이 찌르르 혀를 마비시킨다. 전기 충격 같은 짜릿함이 이름의 유래라더니, 과연 그렇다. 입에 남는 텁텁함을 씻기 위해 맥주한 모금, 물 한 모금 마시고 나면, 다시 어쩐지 덴키부란 한 모금이 슬쩍 생각난다. 전기는 달콤하고 독하구나. 위험하다, 위험해.
---「전기 충격 덴키부란」중에서
이런 소맥에도 때로는 배려가 깃든다. 어제도 거래처와 회식한 신 차장님은 오늘은 조금 연하게. 입맛 까다로운 김 차장님은 언제나 정량 레시피로. 빨리 취해서 1차만 끝나고 집에 가셨으면 싶은 우리 팀장님은 조금 더 독하게. 취하기 싫은 나는 몰래몰래 맥주만 넣어서. 첫 잔부터 장난질하면 큰일 나겠지만 이미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는 이 정도의 강약 조절은 제조 담당 막내의 특권이다.
---「성화 봉송과 소맥」중에서
사장님이 꺼낸 위스키는 국산 블렌디드 위스키 골든블루(GoldenBlue)였다. 골든블루는 스코틀랜드에서 생산된 위스키 원액을 수입하여 한국에서 블렌딩한 한국산 위스키다. 믿거나 말거나, 맛은 놀라울 정도로 조니워커 블루와 흡사하다. 아니, 진짜로요. 물론 두 가지가 헷갈릴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조니워커 블루 특유의 세련된 부드러움만큼은 매우 충실하게 구현했다. 본인의 복귀전에 조니워커 블루 대신 골든블루를 가져오다니. 사장님이 어쩐지 조금 다르게 보였다. 어쩌면 지금의 사장님에게 골든블루는 허세를 덜어낸 실속 있는 성공의 맛이 아닐까.
---「고래 고기와 조니워커 블루」중에서
하이볼, 좋아하십니까? 저는 참 좋아합니다. 너무 좋아하다 보니 하이볼을 대할 때만큼은 약간 근본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술을 마실 때는 ‘자유분방하게’가 제 신조인데도 말이죠. 하이볼이 대체 뭐길래 이것도 하이볼, 저것도 하이볼이라고 하는 걸까. 애당초 하이볼은 왜 하이볼인 것일까. 하이볼 근본주의자답게 그럴싸한 이야깃거리를 적당히 버무려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하이볼에는 그런 게 없다.
---「제대로 즐기고 계십니까, 하이볼」중에서
타인의 취향을 좇는 것이 내 취향을 만들어주지 않듯,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것을 무작정 피하는 것 또한 결국 취향이 없는 것과 같다. 정말로 좋은 것은 결국 대중성을 갖추게 된다는 측면에서, 후자가 더 고약하다. 복순도가는 내게 이런 순수한 즐거움을 알려준 술이다. 슈와슈와 찌르르르.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슈와슈와 복순도가 손막걸리」중에서
따듯한 두부를 젓가락으로 잘라 간장을 콕 찍어 한입 먹고, 따듯한 술을 호록 넘겨 입을 정리하면, 나름대로 요란했던 지난 1년의 파도가 차분한 잔물결로 가라앉는다. 언제나 이 시간은 기묘한 기분이다. 매번 겪어본 적 없는 새로운 사건과 사고만 가득했던 것 같다는 생각과 매년 비슷한 1년을 보낸다는 생각이 교차한다. 어제와 다른 오늘과, 오늘과 비슷한 내일이 내 안에 축적되는 실감이 든다. 따듯한 두부와 사케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내용은 조금씩 다른 매년 마지막 날의 조촐한 나만의 만찬. 술 한잔, 인생 한 입. 올 한 해도 이렇게 저물어간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따듯한 두부와 아쓰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