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건 딱히 신의 존재 탓도 부재 탓도 아니었다.
--- p.15
다들 그네들이 그토록 멸시하던 정부 아래서 근 십칠 년간 얼마나 큰 부와 영향력을 축적해왔는가. 나의 세대에 대해 말해보자. 그런 에너지, 그런 행운. 전후의 사회복지국가에서 태어나 나라가 주는 젖과 꿀을 먹고 자라고, 부모들이 이룬 소박한 부에 얹혀살다가 곧장 완전고용의 시대에 돌입한 세대. (…) 그들이 타고 올라온 사다리가 부서지고 정부가 갑자기 젖을 떼며 잔소리를 시작했을 때 이들은 이미 안전하게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는 구색을 갖추느라 취미와 가치관, 재산을 불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 pp.23~24
그들은 너의 몰락을 그럭저럭 관리해줄 수는 있어도 그 몰락을 막지는 못한다. 그러니 멀찌감치서 너 자신이 쇠약해져가는 모습을 주시하라. 그러다가 더는 일을 할 수 없거나 품위 있는 삶이 불가능해졌을 때 스스로 끝을 내라.
--- p.38
그는 이런 권한 행사로도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한없이 묽어져 자신이 그에게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의 합계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졌다. 혼자가 되는 순간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홀로 무슨 생각을 하려 해도 사고의 주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버넌의 의자는 텅 비어 있었다.
--- pp.43~44
“내가 심각한 병에 걸린다고 해보자고. 몰리처럼 말이야. 그래서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끔찍한 실수를 자꾸 저지르게 된다면, 뭐 있잖아, 판단력이 떨어지고, 사물의 이름도, 내가 누군지조차 모르는 그런 상황. 그럴 때 누군가 나를 도와 끝을 내줄 사람이 있는지…… 내가 죽을 수 있게 도와줄 사람 말이야. 특히 내가 스스로 결단을 내리거나 손을 쓸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라면 더 그래. 그러니까, 결국 내 말은 가장 오래된 벗인 자네에게 부탁한다는 거네.”
--- p.65
처음에는 충격에, 뒤이어 뱃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듯 격한 흥분에 휩싸였다. 감정을 억누르느라 의자에서 몸이 붕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다음으로 느껴지는 건 막중한 책임감이었다─아니, 권력이라고 해야 하나? 한 인간의 인생, 아니 적어도 경력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누가 알겠는가, 버넌이 신문의 판매부수는 물론 나라의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을지.
--- pp.72~73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을 담보로 모든 책임을 벗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식의 오만은 질색이었다. 클라이브의 친구들 중에는 필요할 때마다 천재라는 으뜸패를 내세우며 여차하면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부류가 있었다. 그들의 부재로 인해 어떤 불상사가 벌어진다 해도 그건 단지 직업 성격상 불가피한 일이며 그런 연출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부여받은 소명을 더욱 우러러보게 할 뿐이라고 믿었다. 이들은─그중에서도 소설가가 최악이다─친구와 가족들에게조차 작업시간뿐 아니라 조는 시간, 산책시간을 비롯하여 침묵하는 매 순간과 우울증과 만취상태가 모조리 변명의 여지가 있는, 고도의 목적을 담은 행위라는 믿음을 주려고 집요하게 애쓴다. 클라이브가 보기에 그건 평범함을 감추려는 제스처에 불과했다. 그 역시 예술의 숭고함을 의심치 않았지만 부당한 행동은 예술의 일부가 아니었다.
--- p.78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우리는 빙산처럼 대부분 물에 잠겨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사회적 자아만이 하얗고 냉랭하게 밖으로 솟아 있다. 그리고 여기 수면 아래 희귀한 모습, 한 남자의 은밀한 사생활과 혼돈이 있었다. 그의 위엄은 순수한 환상과 사고를 향한 압도적인 욕구에 의해, 정복할 수 없는 인간의 요소─정신에 의해 철저히 무너졌다.
--- p.88
“세상엔 교향곡보다 중요한 것도 있지. 바로 사람이야.”
“판매부수는 사람이라는 것보다 중요하고, 버넌?”
--- p.140
메스껍기 그지없는 그의 일상, 냉소적인 체하며 뒤로 계략을 꾸미는 야비한 속내,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수동공격성. 버넌 핼리데이? 버러지 핼리데이! 살아오며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본 일이 없으니 창조한다는 행위에 대해 쥐뿔도 모르지. 창조의 재능을 지닌 사람들은 다 씹어 없애버리고, 별 볼 일 없고 편협한 결벽증을 윤리적 관점으로 여기면서 정작 자신은 말 그대로 오물 위에 천막을 치고 사는 놈. 자신의 보잘것없는 이익을 위해서 몰리와의 추억을 더럽히고, 가머니처럼 약점 많은 바보들이나 파멸시키며 황색신문의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누구든─이게 특히 기가 막히는 부분인데─자신은 본인의 의무를 다하고 있으며 보다 높은 이상을 위해 봉사한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그는 미쳤다. 환자다. 존재할 가치가 없다!
--- p.158
침대 옆에는 그의 몰락을 통쾌해하는 짤막하고도 쓰린 엽서가 놓여 있었다. 그의 가장 오래된 친구, 일을 중단하느니 눈앞에서 한 여자가 강간을 당하도록 내버려둔 윤리적으로 고결한 친구가 보내온 것이었다. 증오심에 휩싸여 이성을 잃은 사람의 글이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엽서. 이제는 전쟁이다.
--- p.168
지금 그는 자신이 마련한 계획에 어느 때보다 확신이 들었다. (…) 클라이브를 몰아가는 것은 더이상 분노가 아니었고 증오나 혐오도, 약속 이행의 의무도 아니었다. 그가 실행하려는 일에는 계약상 하자가 없었고, 윤리를 초월한 순수한 기하학적 필연성이 담겨 있었다.
--- p.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