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시인인 존 키츠는 사랑하는 여인을 볼 수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스물여섯이란 꽃다운 나이에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비통함과 절망감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예기치 않은 희열에 사로잡히는데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해할 정도의 삶을 영위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저는 키츠가 느꼈던 그 기쁨을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끔찍하고 보편적인 삶의 고통을 대면하려면 윌 선생님(셰익스피어의 지인들이 그를 부르던 애칭)에게 조언을 구하라는 충고와 함께 그 부적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프롤로그, pp. 10~11」중에서
일이 도무지 풀리지 않으면 상냥해져야 합니다. 일이 잘 안 풀릴수록 더 그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은 곧 꿈이라는 속성을 깨달아야 하죠. 그래야 삶에서 마주하는 모든 문제에 대담해질 것입니다. 저 역시도 그러려고 노력합니다. 더 발전하고 더 강해지기 위해서. 숲의 힘에 두려워하지 않고 결과적으로는 더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그런 연습이 꼭 필요합니다. 아직은 한참 부족하지만 저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제는 술을 쏟아도 퍽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으니까요.
---「제1막 하는 일마다 족족 꼬인다면, p. 52」중에서
베아트리체처럼 춤추는 별 아래에서 태어났다면 불안해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내적으로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찾으면 됩니다. 사랑이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랑의 형태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3막 평생 사랑하지 못할까 봐 두렵다면, p. 139」중에서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굳이 이 고생을 할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을 하는 사람을 우린 종종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왜 삶은 고통을 주는지, 우리를 속이려고 드는 사악한 운명 앞에서 어째서 인간은 그저 불의와 고통과 육체적·정신적 아픔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지, 인간의 존재 이유를 자문하는 사람은 별로 없죠. 이들 중에서도 오랜 번뇌 끝에 ‘그래, 괴로워도 참고 투쟁해야 해. 삶은 의미가 없을 리가 없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이들은 가족에 대한 애정, 종교적 혹은 도덕적 사상, 전통 혹은 확실한 미래 목표를 기반으로 구체적인 삶의 목표를 설정해서 삶을 회피하지 않고 긴밀하게 살아갑니다. 우린 일반적으로 이런 사람을 배울 점을 가진 사람, 지향해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죠. 그래서 삶의 문제를 다루는 또 다른 인간 유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유형의 사람은 삶의 의미를 막연하게 있을 것이라 포장하지 않고 무모할 정도로 묻고 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답합니다. 이들은 두려움이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시선을 떨구지 않고 불합리한 존재를 똑바로 직시합니다. 비록 그 결과가 언제나 비극적이라 할지라도 지성을 이용해 주어진 삶의 조건에 반기를 듭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이 바로 햄릿입니다.
---「제8막 삶에서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pp. 308~309」중에서
‘얼간이 커플.’ 어떤 면에서 베로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비극적인 사랑 우화의 두 주인공은 이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아름다운 문장에도 불구하고 이 유명한 작품을 너무 과하고 인위적이고 오글거린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꽤 많은데, 이것은 두 십대 청소년의 감성을 지나치게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을 둘러싼 잔혹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인간을 둘러싼 우주와 감성이 윤리적으로 충돌했을 때 그 결과를 담은 보고서이죠. 이를 위해 셰익스피어는 정신적, 사회적으로 세상의 규범에 굴하지 않는 두 주인공을 선택했습니다. 이들이 규범에 굴하지 않는 것은 아직 성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아니기에 세상의 규범을 따라야만 하는 어른들과 충돌합니다.
---「제9막 내 감정을 원하는 대로 관리하고 싶다면, pp. 358~359」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