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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박태원이상 그림 김미영,유승환,김미정 외 1명
소전서가 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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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대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다시 읽는 이유

저자 소개6

朴泰遠, 호 : 몽보夢甫, 구보丘甫

작품의 이데올로기보다는 문장 그 자체의 예술성을 중시하고, 새로운 소설적 기법을 시도하는 한편, 인물의 내면 의식 묘사를 중시하는 등 강한 실험정신을 보여준 작가이다. (1909년~1987년) 서울 출생으로 1930년 신생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에 나왔다. 구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반계몽, 반계급주의문학의 입장에서 세태풍속을 착실하게 묘사한 『소설가 구보씨의 1일』『천변풍경』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930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예과에 입학하였으나 도중에 중퇴하였지만 그 일본 유학 시절 현대 예술 전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작품의 이데올로기보다는 문장 그 자체의 예술성을 중시하고, 새로운 소설적 기법을 시도하는 한편, 인물의 내면 의식 묘사를 중시하는 등 강한 실험정신을 보여준 작가이다. (1909년~1987년) 서울 출생으로 1930년 신생에 단편 「수염」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에 나왔다. 구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반계몽, 반계급주의문학의 입장에서 세태풍속을 착실하게 묘사한 『소설가 구보씨의 1일』『천변풍경』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1930년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예과에 입학하였으나 도중에 중퇴하였지만 그 일본 유학 시절 현대 예술 전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경성고보 3학년 때인 1926년 『조선문단』에 시 『누님』이 가작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시를 썼으나, 이후 단편 『적멸(寂滅)』(1930), 『수염』(1930), 『꿈』(1930) 등을 발표하면서 소설 창작에 주력하게 된다. 그리고 1933년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면서부터 예술파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정립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을 남겨둔 채 월북하였고, 북한 쪽 종군기자로 활동했다고 한다. 1960년에 대하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의 집필을 착수하나, 당뇨병과 고혈압으로 실명과 전신불수가 되는 시련을 겪으면서『갑오농민전쟁』 1, 2부를 출간한다. 1986년 7월 10일에 사망했으며, 사망 후에 박태원의 구술을 정리하여 『갑오농민전쟁』 3부가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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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箱, 김해경金海卿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1910년 8월 20일에 태어났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현재 서울대학교) 재학 중 학생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하면서 시를 발표했고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어 근무하던 중 12월에 건축학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다. 1928년 졸업 앨범에서 평생 동안 필명이 되는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1930년 [조선]에 첫 소설 『12월 12일』 연재를 시작하며 등단했다. 이후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내며 활발한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1910년 8월 20일에 태어났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현재 서울대학교) 재학 중 학생 회람지 [난파선]의 편집을 주도하면서 시를 발표했고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어 근무하던 중 12월에 건축학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 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된다. 1928년 졸업 앨범에서 평생 동안 필명이 되는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1930년 [조선]에 첫 소설 『12월 12일』 연재를 시작하며 등단했다. 이후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내며 활발한 문학 활동을 펼친다.

1934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를 연재했는데, 난해하고 파괴적인 형식에 독자들의 항의를 받고 연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오감도 작가의 말」은 연재 중단 후 쓰여 해당 잡지에는 발표되지 않았다. 1936년「날개」를 발표하여 큰 화제를 일으켰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날개」는 이상의 대표 소설이다. 이듬해는 1937년 2월 사상불온 혐의로 일본 경찰에 유치되었고, 같은 해 4월 17일 도쿄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사망하였다.

현대시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며, 1930년대에 있었던 20년대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반발한 모더니즘 운동의 기수였다. 그는 건축가로 일하다가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전위적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로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사를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겉으로는 서울 중인 계층 출신으로 총독부 기사였던 평범한 사람이지만, 20세부터 죽을 때까지 폐병으로 인한 각혈과 지속적인 자살충동 등 평생을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던 기이한 작가였다. 한국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시와 소설을 창작한 바탕에는 이런 공포가 늘 그의 삶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910년에 태어나 1912년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의 집에 장손으로 입양되었고,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신명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마쳤다. 손가락이 잘리고 빈궁하게 살았던 친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와 자신을 입양한 백부에 대한 증오심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영민하여 학업 성적은 우수하였고,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재질이 있어 학창시절, 직장시절 내내 그림에 꿈을 품고 열중하였다. 또한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이 있었고, 예술적 이상향으로 동경(도쿄)을 꼽았다고 한다. 스스로를 선각자이며, 천재, 모더니즘의 기수이자 전위예술의 선구자라고 자처했는데, 식민지 시대임에도 민족적인 자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범세계적이고 현대적인 문명에 심취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한국 고유의 색채를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유럽이나 일본 문학계에 유행하던 모더니즘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실제 생활은 나태하고 난잡, 무기력했다고 전해지며,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잡지 [조선(朝鮮)]의 1930년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9회에 걸쳐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기도 한 『12월12일(十二月十二日)』을 」이상」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하였고, 1931년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BOITEUX·BOITEUSE』 『오감도』 등을 [조선과 건축]에 발표했고,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였다. 이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고,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다. 미친수작, 정신병자의 잡문이라는 혹평을 받아 결국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수정하여 연재가 중단되었지만 열화와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소설 『지팡이 역사』 수필 『혈서삼태』와 『산책의 가을』 등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연재되는 동안 삽화를 맡아 그리기도 하는 등 창작 활동은 계속하였다. 친구인 구본웅(具本雄)과는 신명(新明)학교 동기동창일때부터 각별히 친했으며, 대학입학시 그가 선물한 스케치박스(사구상)에서 필명인 이상이 나왔다는 설이 전해진다. 화가 구본웅이 인쇄소 창문사에 이상의 일자리를 주선하여 근무하면서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인 [시와 소설]을 창간하고 편집해 발간하지만 1집만을 발간하고 그만둔다. 이후 [중앙]에 『지주회시』 [조광]에 『날개』 『동해』를 발표하였다.

백부에게서 유산을 물려받고 가족들과 함께 살았으나, 가족들의 무지와 가난에 곧 질려서 보름만에 나와버렸다. 1933년, 무질서한 생활로 폐병이 심해져 각혈까지 한 그는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구본웅과 함께 황해도 백천에서 요양 생활을 시작했다. 그 곳에서 그의 연인인 금홍을 만났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금홍을 못잊고 방황 하다가 제비 다방을 마련해 그녀를 마담자리에 앉혔다. 그는 금홍과의 만남 이후에도 여러 여급들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들을 무척 사랑하긴 했지만 그 행복이 오래간 적은 없었다. 다만 이들과의 관계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어 작품들을 집필하였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금홍과 권순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면 『봉별기』, 『날개』, 『지주회시』 그리고 『종생기』등과 전문시 음화시, 문명 비평류의 수필 등을 산더미처럼 쏟아내었다. 이 수많은 작품들이 술에 절어있던 한밤 중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천재 이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그러던 그는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이자 친구 구본웅의 이복동생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순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씨)과 결혼을 하였다. 그녀는 금홍과 달리 빈민굴에서 고생하는 그의 가족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그녀는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건강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도피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탓인지, 가족과 아내를 남겨둔 채 1936년에 동경행을 선택했다. 동경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가난을 절절히 겪던 그는 『종생기』, 『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 등의 수많은 작품을 엮어냈고, 『봉별기』를 [여성]에 발표하였다.

그의 마지막 여자인 변동림은 『동해』 『단발』 구필 『행복』 『종생기』의 『선』 『실화』의 『연』 등에서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다.이듬해 2월, 극도로 악화된 건강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상은 1937년 불량선인(사상불온) 혐의로 운 나쁘게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옥살이를 치렀다.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시체나 다름없게 된 그는 보석을 허가받아 평소 동경제대의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항상 여자와 문학에 빠져 살던 이상은 결국 날지 못한 채 변동림이 구해온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20세기 한국문학사에 내장된 최고의 형이상학적 스캔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집이 출간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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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홍익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서울대 국문학과에서 수학하고 문학 박사를 받았다. 문학 평론가로도 활동하며 아마추어 화가로 1회의 개인전, 다수의 동인전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근대 문학과 한국 근대 미술의 상호 작용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이상과 관련된 연구도 하였다. 이상과 관련된 논문에는 「이상의 문학과 꼴라쥬」(2010), 「큐비즘으로 본 이상의 문학」(2016), 「이상의 소설에 나타난 죽음과 신, 그리고 니체적 사유」(2017) 등이 있다.
현 서울시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서울대 국문학과에서 수학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근현대 소설에 나타난 하위 주체의 모습을 근간으로 한국 근현대 소설사의 정치성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박태원과 관련된 주요 논문으로 「시선의 권력과 식민지의 비가시성 -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악마』에 나타난 질병의 의미」(2017), 「스펙터클에 맞서는 문학의 언어 ? 박태원의 『계명 산천은 밝아오느냐』론」(201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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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문화재단에서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문학과 관련된 출판, 전시 등 다양한 활동을 기획하고 있으며, 과거와 오늘 그리고 미래의 고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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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문학을 곁에 두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크고 작은 담론에 관계할 수 있도록 독서를 장려하고 소설 창작을 후원하는 문학 재단이다. 문학도서관 [소전서림]과 출판사 [소전서가], 문학 독자들을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 [읽는사람]을 운영하고 있으며, 소설가들의 장편소설 집필 활동을 후원하는 레지던스 [두내원]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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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0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64쪽 | 274g | 112*165*20mm
ISBN13
9791198275028

책 속으로

한낮의 거리 위에서 구보는 갑자기 격렬한 두통을 느낀다. 비록 식욕은 왕성하더라도, 잠은 잘 오더라도, 그것은 역시 신경 쇠약에 틀림없었다.
---「22면, 3화」중에서

구보는 다시 밖으로 나오며, 자기는 어디 가 행복을 찾을까 생각한다. 발 가는 대로, 그는 어느 틈엔가 안전지대에 가 서서, 자기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 손의 단장과 또한 손의 공책과―물론 구보는 거기에서 행복을 찾을 수는 없다.
---「29면, 4화」중에서

일찍이 그는 고독을 사랑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고독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심경의 바른 표현이 못 될게다. 그는 결코 고독을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도리어 그는 그것을 그지없이 무서워하였는지도 모른다.
---「34면, 5화」중에서

〈모데로노로지오〉를 게을리하기 이미 오래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과 함께 구보는 격렬한 두통을 느끼며, 이제 한 걸음도 더 옮길 수 없을 것 같은 피로를 전신에 깨닫는다. 구보는 얼마 동안을 망연히 그곳, 한길 위에 서 있었다…
---「65면, 10화」중에서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생각한다. 그는 눈앞에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75면, 12화」중에서

내일 밤에 또 만납시다. 그러나, 구보는 잠깐 주저하고, 내일, 내일부터, 내 집에 있겠소, 창작하겠소―. 「좋은 소설을 쓰시오.」 벗은 진정으로 말하고, 그리고 두 사람은 헤어졌다. 참말 좋은 소설을 쓰리라.
---「184면, 30화」중에서

읽기 어렵다고 학생들이 투덜대면, 〈네가 하루 동안 서울 시내를 걸어 다녀 본 것을 소설로 쓸 수 있겠느냐〉라고 질문해 보거든요. 그런 걸 소설로 만든다는 것은 어떤 걸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어떤 의미를 지닐까? 그리고 너는 할 수 있을까? 그런 식으로 한번 더 생각해 보며 읽는다면 이 소설이 지닌 매력이나 새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97면, 대담」중에서

1934년 8월의 「조선중앙일보」 문예면은 주목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오감도」가 실려 있고, 「소설가 구보 씨 일일」이 같이 연재되었고, 또 그 삽화를 이상이 그립니다. 그 뒤에서 문예면을 책임졌던 사람은 상허 이태준이었습니다. 모두 구인회에 같이 적을 두었던 사람들이죠. 즉 한국의 1930년대 새로운 문학적 경향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1934년 8월 「조선중앙일보」 문예면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었습니다.
---「203면, 대담」중에서

삽화는 보통 작품의 이해를 돕는 보조적인 역할을 합니다. 소설의 한 장면을 시각화하여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거나 이해를 돕지요. 그런데 이상의 삽화는 달라요. 더욱더 오리무중에 빠지게하고 작품을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려요.

---「206면, 대담」중에서

출판사 리뷰

경성의 모던 보이 박태원과 이상
두 문학 친구가 함께 연재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다시 읽다


일제 강점기 모더니즘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신문에 연재로 발표한 이 소설은 〈하융〉이라는 이름의 삽화가가 함께했다. 〈하융〉은 바로 박태원의 예술적 친우였던 작가 이상이었다. 당시 문화, 예술의 첨단에 서 있던 두 모던 보이의 친분은 잘 알려져 있으며, 순문학적인 목적을 갖고 결성된 구인회에 함께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박태원은 자신의 소설 「애욕」 등 여러 편에 이상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훗날 이상의 죽음을 추모하며 쓴 글에서 이와 같이 쓰기도 한다. 〈이제 자백自白을 하자면 「애욕」 속의 하융은, 이상이며 동시에 나였고, 그의 친우 구보는 나면서 또한 이상이었던 것이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삽화를 이상이 맡았다는 사실은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화가를 꿈꿨던 이상은 당시 서양의 예술사적 흐름에도 눈이 밝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경향은 큐비즘과 콜라주 형식을 연상시키는 삽화들에서 드러난다. 당시 경성의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처음 보는 형식의 시도들이었을 것이다. 기존의 소설들과 다르게 뚜렷한 서사 없이 경성을 방황하는 것을 받아적은 듯한 박태원의 소설 형식은 이상의 삽화를 통과하며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그들이 생각한 예술관은 이 작품을 통해 이어지고 완성된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그 당시 조선에서 빛나기 시작한 모더니즘의 시작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목적 없는 걸음으로 그려낸 1930년대의 경성

그의 일 있는 듯싶게 꾸미는 걸음걸이는 그곳에서 멈추어진다. 그는 어딜 갈까, 생각해 본다. 모두가 그의 갈 곳이었다. 한 군데라 그가 갈 곳은 없었다.
-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중

박태원의 이름에 붙는 호는 〈구보〉다. 자신의 이름을 가진 주인공을 등장시켰으므로, 훗날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메타픽션의 성격을 가진 소설로 분류되기도 한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제목이 보여 주는 그대로의 내용과 형식을 담는다.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한 26세의 구보 씨. 그가 하루 동안 경성을 누비며 보고 겪은 것들을 써 내려간다.

소설은 구보 씨가 직접 보는 경성의 풍경과 그의 생각들이 혼재되며 전개된다. 아침에 집에서 나서서 경성의 공간들을 떠돌며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풍경들을 마주한다. 종로 네거리, 백화점, 전차, 다방, 남대문, 경성역, 황금정(오늘날의 을지로), 광화문 등을 정처 없이 떠돌며 경성의 평범한 시민들과 스쳐 지나가고, 때로는 벗들과 조우하여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 앞에서 구보 씨는 주변인의 자리에서 자신의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들을 중얼거릴 뿐, 어떤 풍경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가 지니고 다니는 노트에서 관찰자의 태도를 엿볼 수 있을까 싶지만, 정작 그가 노트에 무엇을 적는 순간은 없다. 일제 강점기 시절 예술가로서 느끼는 무력감을 비롯한 고독, 그리고 점차 모던화 되어가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 속에서 느끼는 허무함.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로 떠도는 구보 씨의 하루에서 오늘날 우리의 삶과 닮은 점을 읽을 수 있을까? 지금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를 새롭게 마주하는 독자의 몫에 달려 있을 것이다.

1934년 여름 「조선중앙일보」 문예면,
문화, 예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장이 되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연재된 「조선중앙일보」 문예면은 당대 문인들의 새로운 시도가 열리는 장이 되었다. 구인회 소속이었던 학예부장 상허 이태준의 기획 아래 박태원의 소설도 실리게 되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연재되는 시기 동안 이상의 「오감도」가 실리기도 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형식적인 도전만큼이나 이상의 「오감도」가 당시 독자들에게 준 충격도 컸다. 결국 독자들의 거센 반발에 「오감도」의 연재는 중단되었다. 이태준은 당시 사표를 품 속에 넣고 다녔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독자들의 반응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도 학예면을 구성해 나간 구인회 소속의 이들은 당시 문단에서 가장 예술적이고 순문학적인 위치에 있었다.

〈구인회는 꽤 재미있는 모임이었다. 가령 상허(이태준)라든가, 구보(박태원)라든가, (이)상이라든지 꽤 서로 신의를 지켜 갈 수 있는 우의가 그 속에 자라가고 있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유쾌한 일이다〉

당시 조선에 모더니즘 이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시인이자 비평가 김기림이 전하는 구인회 구성원들의 관계에 대한 말 속에서 예술적 교류 이상의 우의를 느낄 수 있다. 1934년 여름 「조선중앙일보」 의 학예면을 다시 들여다보는 의의는 혹독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도 이들이 의기투합으로 일궈 낸 문학적, 예술적 성취를 다시 보는 것과 다름 없다.

박태원, 이상 연구자 2인과 같이 읽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새롭게 펴낸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는 박태원과 이상을 깊이 연구해온 유승환(서울시립대 교수), 김미영(홍익대 교수)의 대담을 더해 독자들에게 더 쉽게 닿고자 한다. 두 연구자의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보는 박태원과 이상.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두 작가의 면모가 대담 곳곳에 담겨 있다. 또한 두 작가가 당대 경성에서 얼마나 앞서있는 예술가였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다.

1930년대 당시의 신문 연재 소설과 삽화에 대한 두 연구자의 풍부한 해설은 우리를 당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독자로 돌아가게끔 돕는다. 잡지 편집 디자인에 관여한 바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상의 일화와 직접 소설 삽화를 그리기도 한 박태원의 일화에서 두 작가가 문학이 매체에 보이는 방식에 대해서도 치밀하게 고민했음을 엿볼 수 있다.

박태원과 이상, 그리고 두 사람이 속한 구인회를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모더니즘〉에 대해서도 되짚어 본다. 문학의 독자성과 개인의 내면, 자의식에 집중하는 측면에서 이들이 〈모더니즘〉을 지향하였다고 사후적으로 평가하고 있고, 또 그들의 〈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확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담에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재정의의 필요성을 함께 논하며 단순히 평가하기 어려운 지점에 대해 밝힌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 늘 따라붙는 〈고현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해석도 흥미롭다. 박태원 연구자인 유승환(서울시립대 교수)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박태원이 〈고현학을 실현하는 작품이 아닌 그것의 실패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일제 강점기 지식인이자 문인으로서의 고충에 대해서도 들여다볼 수 있다.

구보 씨를 따라 걸어 보는 전시 「구보(仇甫)의 구보(九步)」
소전서림 북아트 갤러리에서 2023년 10월 13일 개최


소전서가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출판과 함께 소전서림 북아트갤러리는 2023년 10월 13일부터 2024년 1월 28일까지 전시「구보(仇甫)의 구보(九步)」를 개최한다. 주인공 〈구보〉의 산책 경로를 중심으로 하여 9개의 스폿으로 구성되는 전시는 1934년의 경성에서 시작하여 현실과 허구 사이를 오간다.

박태원의 작품 중 「적멸」에 수록되었던 몇몇 삽화들을 통해 글과 그림을 넘나들며 근대의 미시적인 풍경들을 포착하는 〈구보〉의 또 다른 예술적 세계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박태원의 소설과 관련된 다양한 옛 자료들을 살펴보며 그의 문학적 행보를 되짚는 시간을 가진다.

11월 초에서 12월 중순까지 〈박태원과 모더니즘 문학〉, 〈구보와 이상의 삽화 해설〉, 등 저명한 연구자들을 모시고 다양한 주제로 진행될 〈깊이 읽기〉 강연, 극단 〈돌파구〉와 함께 하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낭독극, 1930년대 경성 문인들의 월평회를 재해석한 〈시와 소설의 밤〉 (가제), 소전서림 연계 전시 및 구보 테마 큐레이션 등 풍성한 프로그램이 예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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