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지독한 여름은 다 무엇일까요. 줄곧 그 여름을 나 혼자 묻어두고, 꺼내보고, 또 한겹 덮어두는 동안, 이 무서운 이야기는 저에게 그냥 사랑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물방울이 되어버린 할머니나 오이지라면 목구멍이 아리도록 가슴이 막혀오는 나나 그냥 우리는, 다 사랑이었어요. 할머니와 나의 사랑이 이렇게 뜨겁고 애달프다고. 그 지독한 사랑을 받은 아이가 나라는 사실, 더없이 귀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나라는 분명한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 이야기에 온통 상처만 남아 있지는 않다는 거예요.
--- p.18
누구나 오직 자신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몸으로, 나의 언어로, 나의 세계로, 나의 무게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그럴 때면 ‘없음’의 자리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없음에서 주워 올린 마음. 오직 부재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었던 마음. 없어서 구할 수 있었던 마음. 이런 건 무어라 이름 붙여주어야 할까요. 하필 나와 비슷한 돌멩이를 쥐고, 봄이 가까운 깊은 밤 잠들지 못하는 나를 닮은 사람을 떠올릴 때면 나는 더 솔직해지고 싶어지는 거예요. 더 용기 내고 싶습니다. 도망치지 않고 나의 단어를 찾아가면서요.
--- pp.29-30
그러니까 나는 하나의 사랑 이야기가 될 것이다. 조금 더 운이 좋다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신비를 속삭여도 좋겠다. 그러니, 당신도 당신의 어린이를 이야기하기를, 그 아이에게 깊이 사랑받기를. 잘 되어가지 않을 때에도 나는 나의 사랑 이야기를 믿는다. 이제는 아니까. 물동이에 다 담기지 않아도 하늘은 틀림없이 거기 있다는 것을. 물동이에 가둘 수 없는 깊은 하늘을 이제는 믿으니까. 내 사랑은 여기서부터 되어간다. 순전히 나의 사랑만으로. 나의 이야기는 되어간다, 더, 되어간다.
--- p.45
할머니가 내게 준 사랑의 재료를 떠올렸다. 고민 없이 인내의 마음이 떠올랐다. 할머니의 인내란 그저 참는 마음이 아니라, 믿음의 다른 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대책 없고 허망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 나 혼자 머리를 감는 날이 올 거라는 믿음, 내가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믿음, 곧 그리될 것이기에 지치지 않고 반복했던 믿음이라고. 바꿔 적은 문장 뒤에 할머니가 좋아하던 비단박하 한알을 그려 넣었다. 어쩐지 할머니의 믿음은 박하사탕처럼 하얗고 까슬거리고 달고 시원한 맛이 날 것 같았다.
--- pp.59-60
슬픔을 슬픔으로 바라보는 시간이 지나가면, 슬픔만으로 끝나지 않는 무언가가 오는지도 모르겠다. 그 무언가 때문에라도 슬픔은 슬픔으로 두고 싶다. 언제든 슬플 요량으로 이불 끝을 조금 더 끌어당겼다. 날이 밝으면 이 빛을 기억하며 씩씩하게 나가 걷자고 생각하면서. 한번 더 이불을 끌어당겼을 땐 처음 보는 햇빛이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 p.63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무거운 손과 발이 가벼워지고. 아버지가 나와 다르지 않고 내가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는 분명하고 깨끗한 마음.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잠깐 아버지가 되어버리면 앞으로 아버지를 돌보는 일도 무서울 것은 없다고,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고. 다 자른 아버지의 손발톱을 모아 버리던 그날, 나는 두려움도 같이 모아 버렸다. 대신 다른 마음을 심기로 했다. ‘마치 내 것을 하듯이.’
--- p.80
한 사람의 부재는 세계를 전에 없던 방식으로 뒤흔든다. 한 사람이 스스로 사라진 구멍은 그가 존재했던 세계를 무너뜨린다. 한 사람의 자살은 남은 사람의 세계를 틀림없이 파괴하고 영영 복구할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만다. 녹지 않는 눈송이가 허공에 멈춰 있는 ‘겨울’ 속에 한참을 가두어두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두렵다. 내가 또다른 누군가를 아프게 할까봐. 이파리 하나라도 상하게 만들까봐. 나는 얌전히 조심한다. 사라지지 않는 누군가의 숨결이 내 안에서 흐르는 것을 느낀다. 가끔 그가 내게 말한다. 창을 열자. 그래, 바람을 들이자.
--- p.105
그러니 매일 아침 현관문을 나서며 상상합니다. 저 방에서 할머니가 나와 오늘 나에게 하나의 심부름을 준다면 무얼까.
-기쁘렴. 기쁘게 집으로 돌아오렴.
한번 해보는 거죠. 시작은 매번 어렵지만. 마음껏 기쁘고 기쁘게 돌아오기로. 문득 그렇게 시를 쓰고 싶고요. 돌아온 그 자리에는 처음 문을 열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기쁨이 기다릴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나의 첫 여름 과일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여름 과일은 무엇인가요? 한번은 꼭 묻고 싶었어요.
--- p.118
온갖 어둠과 검은 개와 졸피뎀과 시와 바다가 뒤섞인 여기가 나의 삶이다. 파도처럼 온갖 것이 오고 또 가는 곳이 나의 삶이다. 나는 이런 삶을 사랑해버린다. 그래서 오틸라의 이야기는 처음과 다르게 읽힌다. 어둠으로부터 도망친 소녀의 탈출기가 아니라 자신을 기다리는 해골에게로 힘껏 달려간 용감한 소녀의 이야기로. 어쩌면 오틸라와 해골, 이 둘은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현재의 나와 상상 속의 나와 같이 한 사람의 내면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이건 또 어떨까. 용기를 잃지 않고 서로가 힘을 모은다면 커다란 두려움 앞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무엇보다 나는 이 용기를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라고 기록해두고 싶다. 스스로를 사랑했기에 둘은 어둠 속에서도 춤을 출 수 있었고, 친절과 배려를 잃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 pp.126-127
비가 차오르는 집, 다 젖어 굽어버린 책, 망가진 세간을 바라보고만 있던 순간도 기억하지만, 울고 난 뒤 걸레를 빨고, 책을 펴 말리고, 흙탕물을 닦아내고 다시 닦아냈던 순간도 기억합니다. 수없이 걸레를 빨고 다시 비틀어 물기를 짜낼 수 있었던 건 나를 붙들어 매던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할머니의 노란 달걀찜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없지만 ‘있었던’ 순간만으로도 젖은 것이 마를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젖지 않았다면 참 좋았겠지만, 두 발에 차오르던 빗물의 감각을 꿈에서도 잊을 수 없지만, 신기한 일이에요. 나를 붙들어 매는 순간들은 여전히 내 곁에서 숨쉬고 있으니까요. 꿀설기는 많이 달지 않고 참 맛있었습니다.
--- pp.178-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