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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코올의 역사

알코올의 역사

: 인류의 가장 오랜 발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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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568쪽 | 811g | 153*224*27mm
ISBN13 9788994054711
ISBN10 899405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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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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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로드 필립스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태어나 십대 시절에, 심지어 뉴질랜드의 법정 음주 허용연령이 되기 전부터 와인에 대한 흥미를 키웠다. 로드는 열여덟 살 때 그만의 작은 와인셀러를 지었고, 오클랜드의 레스토랑에서 ‘와인 스튜어드’로 일했다. 현재 [오타와 시티즌]에 기고하는 와인 칼럼니스트이자 『와인의 역사』, 『온타리오 와인 컨트리』, 『LCBO에서 가장 가치 높은 와인 500종』을 포함한 많은 책의 저자이고, [NUVO] 매거진의 편집자이자 와인 필자인 로드는 와인 관련 지식이 해박하고 와인에 대한 이해가 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The World of Fine Wine]과 [Vines], [Wine Access], [Wine Spectator] 같은 잡지에도 글을 기고한다. 2007년 온타리오 와인 어워즈에서 주관하는 ‘올해의 와인 저널리스트’, 2000년 오타와 소믈리에 길드가 뽑는 ’올해의 와인 전문가’로 선정된 로드는 캐나다와 유럽 곳곳에서 열리는 와인경연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자주 초빙된다. 로드는 칼턴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알코올의 역사, 프랑스 사회사, 가족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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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알코올성 음료의 기원은 9,000년쯤 전인 BC 7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선사시대의 인류가 그보다 수천 년, 수만 년 전부터 온갖 과일과 베리(berry)를 통해 술을 마셨던 것은 거의 확실하다. 적당히 익은 과일과 베리가 달콤한 시점을 지나면 부패가 시작된다. 그러면 야생 이스트(wild yeast)들이 과일과 베리에 포함된 당분을 소비하기 시작하면서 자연 발효과정에 의해 알코올이 생긴다. 그렇게 썩어가는 과일의 과육과 과즙에서 생산된 술은 알코올이 3%나 4% 수준에, 때로는 5%를 상회하는 수준에 도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는 오늘날의 많은 비어에 함유된 알코올의 농도(strength)와 유사한 수준이다. --- p.16

많은 고대 문화권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집트에서는 엘리트들만 와인을 마셨다. 와인이 희소하다는 사실은 세계 모든 곳에서 와인에 문화적 가치를 부여했다. 와인은 1년에 딱 1번만 양조됐는데, 이 점에서 와인은 비축해둔 곡물을 이용해 1년 내내 소량씩 계속 만들 수 있는 비어와 달랐다. 더군다나, 와인을 빚는 데 적합한 포도?과즙을 다량 배출하는, 과육 대 씨앗 비율이 높은 포도?는 다른 곡물을 재배할 수 있는 곳보다 더 적은 지역에서만 성공적으로 익었다. 적은 지역에서만 빚어지고 이듬해 수확철이 될 때까지 1년을 견뎌야만 하는, 소량만 생산된 와인은 언제든 마실 수 있는 비어하고는 닮은 점이 거의 없었고, 이런 희소성 덕에 와인은 비어보다 훨씬 더 비쌌다. 포도가 자라지 않는 지역의 소비자에게 와인을 수송하지 않았을 때조차 말이다. 희소성과 비용이라는 서로 관련된 두 가지 특징은 와인의 사회적 특징에, 그리고 어쩌면 종교와 영성과 결부된 최종적인 이미지에 기여했다. 비어와 달리, 와인은 때때로 장거리(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하류)에 걸쳐 교역됐고, 엘리트에 의해 소비됐으며, 축제와 의식에 사용됐다. --- p.33

고대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주제 하나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술의 역사를 관통해왔다: 적당한 술 소비는 용인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건강과 기쁨을 안겨주는 여러 이유 때문에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술을 마시는 건, 특정한 경우(요즘에 폭음binge-drinking이라 부르는 것)건 주기적인 패턴으로 벌이는 일이건, 나쁜 일이었다. 그건 음주자의 건강과 도덕적인 판단에 해로웠고, 그의 행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이들에게 유해했으며, 더 넓게는 사회에 피해를 줬다. 적당함과 과도함 사이의 선을 정의하는 방법에 대한, 그리고 선을 넘는 사람이 없도록 만드는 방법에 대한,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논쟁이 이어졌다. 역사적으로, 일부 비평가는 음주자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둘 사이를 구별하는 선이라고 봤지만, 이건 음주자가 그 선을 넘은 이후에야 과음을 정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른 이들은 특정한 양의 알코올을 적당하고 안전한 양이라고 처방했다. 현대의 공중보건 정책 입안자들이 하루 표준 알코올 소비량 최대치를 추천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껏 존재했던 사회들이 술의 생산과 유통, 소비를 통제하려고 다양한 시도를 해온 것처럼, 과도한 음주를 예방하려는 시도들은 규제의 역사에서 중요한 가닥을 형성한다. 후대의 일부 사회는 술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려고 시도했는데, 그런 사례에서는 적당한 소비와 과도한 소비 사이의 구분은 할 필요가 없었다. 술을 상대적으로 소량만 생산하고 소비한 고대 사회에서 그런 구분은 그다지 큰 쟁점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그랬던 것처럼, 술 생산량이 늘고 알코올성 음료들이 일상식단의 핵심 품목이 되면서 그 주제는 훨씬 더 중요해졌다. --- p.43

로마인들의 주량이 얼마였건, 그들은 (최소한 공개적으로는) 과음과 주취를 규탄했고, 어떤 사람이 술에 빠졌다는 혐의는 그 사람의 평판에 해로웠다. 키케로(Cicero)는 반대자들에게 술꾼 낙인을 찍는 걸 특히 좋아했다. 그는 주된 라이벌인 마르크 안토니우스(Mark Anthony)가 집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고 날마다 이른 아침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키케로는 그 점을 상세히 묘사하려고 마르크 안토니우스가, 아마도 와인을 지나치게 마신 결과로, 상원에서 구토를 한 일을 인용했다. 로마의 비평가들에 의하면, 과도한 와인 소비는 이런 수치스러운 장면들로 이어질 수 있을 뿐더러, 습관적인 과음은 모든 형태의 육체적 질환과 정신적 질환을 낳을 수 있었다. 루크레티우스(Lucretius)는 와인의 분노가 영혼을 불안하게 만들고 신체를 약하게 만들며 다툼을 유발한다고 경고했고, 세네카(Seneca)는 와인이 마시는 이의 성격상 결함을 드러내고 확대시킨다고 썼다. 플리니우스는 와인의 특성을 칭송하는 한편으로, 와인의 영향력 아래 폭로된 진실 중 다수는 입 밖에 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고 경고했다. --- p.63

와인을 ‘뜨거운’ 물질이라고 언급하는 것에서 보듯, 와인과 소화 사이의 관계는 서양의학의 원칙이 됐다. 신체가 균형 잡을 필요가 있는 뜨거운 요소들과 차가운 요소들을 담고 있다고 이해할 때, 이 점은 중요했다. 와인은 아동의 몸처럼 선천적으로 대단히 뜨거운 것으로 간주되는 신체나, 환자가 열병을 앓는 등의 병환을 앓아 뜨거워진 몸에는 추천되지 않았다. 이런 경우, 와인은 몸에 열기를 더하면서 불균형을 악화시켰고, 이건 부모들이 아이에게 와인을 주지 말라는 충고를 듣는 한 가지 이유였다. 이와 반대로, 와인은 선천적으로 차가운 몸에 추천됐는데, 죽음이라는 최후의 차가움에 다가가고 있는 노인의 몸이 그렇다고 믿어졌다. 의사들도 와인의 위험성에 대해, 보통은 과하게 소비했을 때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했다. 세네카와 플리니우스가 열거한 와인 관련 질환 중에는 기억상실, 정체성 혼동, 언어능력과 시력 손상, 자기애적인 방종, 반사회적 행동, 복부 팽창, 입 냄새, 오한, 현기증, 불면증, 돌연사 등이 있었다. 와인을 상당량 소비하는 것은 운동선수들에게도 추천되지 않았다. 에픽테토스(Epictetus)는 올림픽에 참가해서 성공을 거둔 자들은 디저트와 냉수를 피했고, 마시고 싶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와인을 마신 게 아니라 드물게만 와인을 마셨다고 언급했다. 필로스트라투스(Philostratus)는 와인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 운동선수는 “똥배가 나오고… 와인을 과도하게 마시면 맥박이 빠르게 뛰는 증상이 생긴다”고 밝혔다. --- p.72

변비를 치료하거나 소화를 돕는 등의 의학적 특성 때문에 술을 마시는 것과, 구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음료라는 이유로 술을 마시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전자의 행동은 술을 물을 첨가해서 이따금씩 마실 수도 있는 음료로 대우한다. 후자는 사람들을 전적으로 술만 마시는 쪽으로 이끌 것이다. 따라서 고대 세계에서 술 소비가 다음의 3단계를 거쳤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1단계, 뜸하게 소비되는 음료이자 의례나 축제 때 주로 소비되는 음료; 2단계, 부분적으로는 건강에 대체로 유익하다는 믿음 때문에 더 보편적으로 소비된 음료; 3단계, 물보다 안전하다는 믿음 때문에 소비된 유일한 음료. 처음 두 단계는 쉽게 겹쳐지지만, 3단계는 일상식단의 주요한 요소라는 사뭇 상이한 지위를 알코올성 음료에 부여한다. 술을 재량껏 마시는 음료로 대우하던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마셔야 하는 음료로 대우를 바꾼 건 언제였을까? 16세기와 17세기에 유럽의 의사들은 하나같이 물을 마시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런 관점의 유래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 알아내기는 힘들다. 수질은 분명 장소마다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국지적이거나 일시적인 오염 때문에, 수질이 열악한 지역보다 지리적으로 더 넓은 지역의 물을 문화적으로 혐오하는 결과로 이어진 사례들이 많지만 말이다. 구할 수 있는 물이 안전한 때조차, 사람들이 그냥 비어나 와인, 다른 알코올성 음료를?보잘것없는 포스카조차?물보다 선호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비어는 분명영양가가 높고, 와인도 비어만큼은 아니지만 일부 영양분을 제공한다. 둘 다 마신 이에게 행복감을 주고 때로는 약간의 취기에 따른 쾌감이나 심각한 취기에 따른 일시적인 기쁨을 안겨준다. --- p.74

술과 종교 사이의 관계는 수천 년 전에 시작됐다. 앞에서 봤듯, 중국에서건 중동에서건 술에 대한 초창기 증거 중 상당수가 다양한 종류의 종교의식에 술이 사용됐음을 보여주는 맥락에서 발견됐다. 많은 고대문화권과 그리스·로마문화에서, 신들은 특히 비어나 와인, 미드 같은 다양한 알코올성 음료와 결부됐다; 바커스와 디오니소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신들일 뿐이다. 술이 신에게 바쳐진 유일한 물품은 아니었다. 그리스에서 데메테르(Demeter)는 빵과 과일, 채소의 여신이었다. 하지만 와인과 비어는 종교와 더 지속적으로 관련지어졌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저 추측만 가능하다.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어느 주장에 따르면, 더 많은 양의 술을 마시는 데서 (약한 취기에서 심한 취기로 발전하는 데서) 비롯된 편안한 느낌과 몽롱함, 혼미함은 마신 이가 평소 하는 체험하고는 생판 다른 감각이어서, 사람들은 그런 상태를 “딴 세상에 온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술은 마신 이의 정신을 감각적인 차원으로 고양시켰고, 그 사람은 그 차원을 영적이거나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차원으로 이해했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술과 종교 사이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변함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기독교와 이슬람?동일한 밀레니엄에 출현한 두 종교?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술과 독특하고 꾸준한 관계를 구축했다. 기독교는 알코올성 음료 하나?와인?를 자체의 상징과 의례에서 중심적인 자리로 격상시킨 반면, 이슬람은 술을 철저히 거부하고 추종자에게 알코올성 음료를 마시는 걸 금지한 최초의 주요 종교다. 두 종교 모두 선례들이 있었다. 한편에서, 와인은 로마의 와인의 신인 바커스를 중심으로 한 컬트 집단의 의식에서 중추적이었고, 유대교의 교리와 의식에 필수적이었다; 다른 한편에서, 기독교 이전 시대의 일부 유대교 교파와 (스파르타의 법 같은) 세속 법률들은 술 소비를 금했다. 하지만 후자의 금지사례들은 그다지 중요치 않거나 단명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술에 대한 기독교와 무슬림의 교리들은 추종자 수백만, 수천만 명에게 장기적인 의미가 있었고, 오늘날에도 술에 부여되는 종교적인 무게를 상당히 많이 부여했다. --- p.80

유대인들 사이에서 와인은 지극히 평범한 존재이자 치료효과를 가진 존재이고 상징적인 존재였던 반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와인은 더 강렬하고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서기 첫 세기에 뚜렷하게 설명된 성변화(transubstantiation) 교리는 성체성사에서 빵과 와인의 실체는, 비록 외적인 모습은 그대로 유지하더라도,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고 주장한다. 4세기에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는 키프리아누스(Cyprianus)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했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참된 포도나무이니라’고 말했으므로 그리스도의 피는 물이 아니라 와인이다; 와인이 없다면 그 잔은 우리를 구원하고 활기차게 해주는 그분의 피를 담은 것으로 볼 수 없다; 와인이야말로 그리스도의 피이므로.” --- p.87

최초의 대규모 양조활동은 8세기부터 수도원에서 행해졌다. 수도원은 상업적 생산을 위한 장비를 구입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부유했을뿐더러, 필요한 곡물 공급량을 제공하는 토지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점 외에도, 규모가 큰 수도원들은 일반 가정보다 더 많은 양을 생산해야 했다. 더 많은 인원의 식사 필요량을 충족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 거주하는 많은 수도사와 수도원에 머무는 다양한 여행객. 이와 대조적으로, 서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거주한 전형적인 일반 가정은 식구가 네다섯 명으로, 에일을 성인 남성만큼 많이 마시지는 않는 여성과 아이들이 거기에 포함됐다. 생갈(St. Gall, 현재의 스위스에 있다)의 수도원은 양조를 받아들인 최초의 수도원 중 한 곳이었다. 그곳 건물 중에는 양조장이 세 곳?한 곳은 수도사용 에일 생산용이고, 다른 하나는 빈객(賓客)을 위한 곳, 셋째는 순례자와 극빈자를 위한 곳?있었는데, 세 에일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수도사들은 와인과 에일 중 무엇을 빚을지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었는데, 대다수는 둘 다와 함께 다른 알코올성 음료도 빚은 듯 보인다. --- p.96

AD 1000년경부터 유럽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풍경이 변화하면서 술과 음주 문화의 사회적 지위가 상당히 변했다. 동쪽 민족들이 유럽 서부로 이주하고 로마제국이 해체된 데 따른 혼란으로 점철된 4세기 또는 5세기가 지난 후,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시대가 찾아왔다. 평화와 정치적 안정 모두 경제 발전과 교역의 성장을 일궈냈다. 꾸준히 증가하기 시작한 유럽 인구는 1000년부터 1300년 사이에 4,000만 명에서 8,000만 명으로 2배가 됐고, 유럽 북부와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한바탕 도시화가 이뤄졌다. 이 도시들(앤트워프, 브뤼헤, 플로렌스, 밀라노 같은) 은 새로운 술 문화와 시장을 상징했고, 그곳의 상인과 전문가, 장인들은 새로운 업무방식을 발전시켰다. 유럽 기후가 온난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농업이 활발해지고 포도 재배가 북쪽으로 더 올라간 지역에서도 가능해진 것과 더불어, 사회와 경제의 발전은 술 소비 패턴과 술 산업의 조직화에 오래도록 지속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 p.112

유럽의 중세시대에 몇 군데 주요한 와인루트가 확립됐다. 하나는 현재의 보르도에 기반을 둔 루트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와 훗날 잉글랜드의 헨리 2세가 되는 노르망디 공작 헨리(Henry, Duke of Normandy)의 결혼으로 아키텐(보르도 지역)과 잉글랜드 사이에 구축된 왕실(王室)간 관계의 덕을 많이 봤다. 아키텐과 잉글랜드가 동일한 왕의 통치를 받게 되면서, 프랑스 남서부에서 잉글랜드 상업도시들의 상대적으로 번창한 상인들에게로 와인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13세기 무렵, 대부분이 현재의 보르도에 있는 포도밭보다 내륙에 있는, 현대의 남서부 지역에서 생산된 가스코뉴 와인이 잉글랜드 시장을 강타했다. 이건 영 와인으로, 오늘날이라면 ‘누보(nouveau)’로 불렸을 것이다. 수확하고 몇 주 내에, 발효가 완료된 직후에 운반됐기 때문이다. 해마다 10월에 선박 수백 척이 보르도에서 잉글랜드로 최소 1주일에 걸친 항해에 나섰다. 소규모 선단들은 프랑스 북서쪽에 있는 루아르 밸리에서 빚은 와인을 싣고 낭트와 라로셸에서 항해에 나섰다. 와인의 상태가 불안정하고 1년을 견디는 와인이 드물던 시기에, 갓 빚은 이 와인은 대단히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좋은 가격에 팔렸다. 추가적인 수송은 날씨가 허용하는 이듬해 봄에 이뤄졌다. --- p.121

술은 약 1500년부터 18세기까지 근대 초기 시대에 유럽 인구의 일상식단에 굳건히 자리를 잡았고, 사람들이 구할 수 있는 술의 유형도 엄청나게 변했다. 1세기 넘는 동안 극소량만이 의학적 용도로 제조됐던, 알코올 함량이 훨씬 높은 스피릿(spirits)은 16세기 동안에는 입수경로가 훨씬 더 폭넓어지면서 많은 사람이 소비했다(이것이 6장의 주제다). 앞서 봤듯, 비어 양조는 이미 주요한 조직적·기술적 변화를 겪었다: 규모 면에서 커졌고, 홉이 사용되면서 비어의 수명이 연장됐으며 더 먼 시장까지 운송이 가능해졌다. 16세기 동안, 불안정하기로 악명이 높던 와인에도 보존과 관련된 이슈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일부 지역의 와인 생산자들은 와인의 상태를 보존시켜 주는 물질로 브랜디(brandy)를 와인에 첨가하기 시작했고, 그러기 위해 스피릿을 상업적으로 유통시켜도 될 정도로 많이 만들고 있었다. 이런 ‘강화와인(fortified wine)’들은, 특히 셰리(sherry)와 포르투와인(port)은 보통 와인보다 알코올 수준이 높고 좋은 상태를 오래 유지했다. --- p.144

비어와 에일이 커다란 통에 담겨 운반되고 보관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개인 소비자가 개인적으로 소비할 용도로 그걸 보관해둘 가능성은 없었다. 하지만 부유한 와인 애호가들은 유리제조업의 발달을 활용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와인 무역상과 태번에서 와인을 담을 수 있는 와인병을 구입할 수 있었다. 새뮤얼 피프스는 1663년에 미트라(Mitre) 태번에 가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기록했다. 거기서 그는 새로 획득한 병에 자기 와인이 부어지는 것을 지켜봤다. 각각의 병에는 그가 개인적으로 쓰는 문장(紋章)이 장식돼 있었다. 와인에 매혹된 피프스는 런던의 무역상이자 정치인인 토머스 포베이(Thomas Povey)의 셀러에 대해 썼다: “선반 대여섯 곳에 새롭고 오래된 온갖 종류의 와인병이 서 있고, 각각의 병에는 레이블이 붙어 있는데, 그렇게 많은 병이 질서 있게 정리된 모습을 나는 그 어떤 서점의 책들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곳을 다시 방문한 피프스는 와인을 서늘하게 보관하려고 셀러에 우물을 뚫었다고 기록했다. 이와 달리, 피프스 본인의 셀러는 작은 통과 용기들로 구성된 컬렉션이었던 듯하다. --- p.168

중세가 끝나기 전까지, 유럽에서 소비된 알코올성 음료는 순전히 발효에서 생겨난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비어와 와인이었다. 미드와 사이다, 다른 과일 기반 와인들도 생산지에서 소비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증류에 의해 생산된 알코올성 음료는 12세기에 유럽에 등장했지만, 16세기까지도 그것들은 극소량만, 거의 전부가 의학적 용도로만 생산됐다. 그런데 16세기가 끝날 무렵, 증류로 얻은 스피릿이 유럽과 아메리카 음주 문화의 주류(主流)에, 그리고 거기 거주하는 인구의 혈류에 투입됐다. 처음 생산된 스피릿 형태는 와인을 증류해서 얻은 브랜디였지만, 오래지 않아 다른 음료들(특히 위스키와 진, 보드카)이 곡물에서 증류됐다. 설탕 생산의 부산물인 당밀(molasse)을 증류한 럼(rum)의 생산이 17세기에 시작됐다. 비어와 와인보다 알코올 함량이 훨씬 많고 문화적인 전통이랄 게 없는 이런 새로운 알코올성 음료의 등장은 술 소비와 규제의 패턴에 단기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 p.180

스피릿 생산은 양조업보다 낮은 세율을 적용받았을 뿐더러, 스피릿 판매에 따른 혜택들도 있었다. 스피릿 소매업자들은 면허를 구입할 필요가 없었다. 식사를 팔거나 숙소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일하우스 주인들보다 더 작고 수수한 점포만 필요했다. 1720년에 다른 인센티브가 더해졌다. 스피릿을 증류하고 판매하는 사람은 군대에 숙소를 내줘야 하는 의무를 면제받았다. 이건 인(inn) 주인과 마구간 주인 등 여러 사람에게 부과된 짜증나는 부담이었다. 이런 우호적인 상업적 환경 아래, 그리고 경기가 좋은 시장에서, 다수의 드램숍(소규모 스피릿 소매상)이 번창했다. 정확성을 확신할 수 없는 당시의 보고서들에 따르면, 1725년에 런던에는 드램숍이 8,500곳 넘게 있었다. 주택 11채당 1곳씩 있는 셈이었다. --- p.202

18세기에 스피릿을 중심으로 술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이뤄졌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16세기 초부터 스피릿이 주류(主流)시장에 진입한 것은 지도층의 불안감을 야기하면서 날림으로 만든 광범위한 규제들을 가져왔다. 그런 법들은 대부분의 관할 지역에서 정상화됐지만, 스피릿은 비어와 와인과 유사하거나 비슷한 규제의 대상이 됐다는 점에서 사회적 불안의 대상으로 계속 남았다. 19세기에 반알코올 운동이 등장했을 때, 그들이 겨냥한 주요 표적은 스피릿이었다. 이건, 우리가 술의 역사에 대해 말할 때, 서로 상이한 별개의 역사를 갖는 경우가 잦은 다양한 알코올성 음료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 p.212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로 장거리를 항해할 때, 바다에서 몇 주나 몇 달을 보내야 하는 항해 동안 술은 필수물자에 속했다. 초기 탐험가들은 그들이 조우한 원주민들과 술을 공유했다. 그들이 유럽에서 술을 접대용으로 썼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후 특정 지역에서 접촉이 점차 잦아지고 유럽인 정착지가 세워지면서, 무역상과 정착민들은 그들의 알코올성 음료를 페루와 뉴잉글랜드, 인도같이 전혀 다른 지역의 원주민에게 더 자주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술을 북아메리카의 비버가죽부터 남아시아의 향신료, 서아프리카의 노예, 그리고 모든 지역의 섹스 같은 모든 것을 구입하는 교환수단으로 활용했다. 결국, 유럽인들은 영구정착지를 세우면서 포도나무를 심고 브루어리(양조장)를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증류공장을 건설했다. 유럽 이외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술을 자급자족하게 된 것이다. --- p.214

와인을 스페인에서 신세계로 수송할 수도 있었지만?그리고 한동안 그렇게 했지만?그렇게 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뿐더러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와인은 불안정해서 대서양의 반대쪽에 나쁜 상태로 도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스페인의 생산자들은 식민지를 그들의 와인을 보낼 잠재적인 수익성이 짭짤한 시장으로 봤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의 와인 생산을 제한하려고 시도했다. 1595년에 스페인 생산자들의 압력을 받은 펠리페 2세(Felipe Ⅱ)가 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 예수회 선교시설은 제외하고, 더 많은 포도나무를 심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그의 칙령은 대체로 무시됐다. 어쨌든 그때까지 스페인 정착민과 선교시설들은 지역 도처에 포도 재배 환경을 탄탄히 조성했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의 첫 포도나무가 1520년대 초에 멕시코에 심어졌고, 포도밭이 1540년 무렵에 페루에, 1540년대에 칠레에, 1550년대에 아르헨티나에, 1560년대에 볼리비아와 콜롬비아에 만들어졌다. --- p.224

술이 초기 유럽인 정착민들의 일상식단의 일부였던 것은 맞지만, 적어도 식민지시대에 북아메리카에는 음용수로 적합한 물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술을 마신 건 더 이상은 오염된 물보다 안전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유럽인들은 문화적인 이유에서 술을 마셨다: 술은 그들이 유럽에서 가져온 일상식단에, 상거래와 사교적인 관계에 깊이 박혀 있었고, 그들에게 쾌감을 줬다. 그러므로 기능적인 관점에서는 유럽인과 인디언 모두 술을 거의 동일한 목적에서 소비했다: 술은 개인들에게 쾌감을 줬고, 많은 종류의 문화적 교류를 기념했으며, 사회적·민족적 집단 내부와 집단들 사이에서 사교를 위한 위력적인 매개물이 될 수 있었다. 북동부의 북미원주민이 종교적 의미를 가진 몽환적이고 영적인 상태를 불러일으키는 능력 때문에 술을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주장에는 이런저런 반론도 있다. 두 인구집단이 보여주는 소비패턴의 주요한 차이점은 술이, 유럽인들 가운데에서 그랬던 것처럼, 북미원주민의 일상식단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 p.238

북미원주민과 유럽인, 술 사이의 복잡한 관계는 17세기에 시작됐다. 바로 그 시작부터, 유럽인들은 북미원주민에게 병적인 음주행동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웠고, 술에 저항하지 못하고 인사불성이 되거나 폭력을 휘두를 때까지 술을 마시는 ‘술에 취한 인디언’이라는 고정관념을 에피소드성 이야기로 퍼뜨렸다. 이건 20세기가 될 때까지 미국과 캐나다의 원주민들을 향한 정부의 정책들을 뒷받침한 끈질긴 선입견으로 판명됐다. 대다수 선입견처럼, 이 이미지도 무비판적으로 일반화됐다. 이 경우, 이 이미지는 북미원주민을 제각기 구분되지 않는 한 덩어리의 집단으로 취급한다. 지역마다, 인구집단마다 술에 대한 경험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에 말이다. 앞으로 보게 될 내용처럼, 많은 북미원주민이 땅과 문화를 빼앗겼고, 가정과 사회적 네트워크를 강제로 포기해야 했으며, 유럽인의 종교를 억지로 채택해야 했다. 다른 사회와 계급에서 핍박 받는 사람들처럼, 일부 원주민 집단은 술과 다른 약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므로 술의 도입은 북미원주민이 경험한 광범위한 격변을 보여주는 양상 중하나였다. 유럽인과 접촉하면서 광범위한 격변을 겪은 것은 세계 다른 지역의 원주민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지만, 이렇게 특별하고 끈질긴 음주 선입견을 뒤집어쓴 건 북미원주민뿐이었다. --- p.243

병사들의 주취를 억제하려고 채택된 종합적인 정책은 없었지만, 개별지휘관들은 현지에 어울리는 다양한 해결책을 채택했다. 일부는 스피릿의 구입 가능성을 완전히 제한하려고 애썼고, 일부는 초병근무를 서는 동안 술을 마시는 것만 금지시켰다. 다른 장교들은 더욱 엄격한 정책을 채택하면서 병사들이 군에서 지급하는 보급품 이외의 다른 스피릿에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병사들을 막사에 고립시켜야만 효과적으로 실행됐지만 말이다. 1759년에 퀘벡에 주둔한 영국군 사령관은 군대에 리쿼를 팔아도 좋다는 면허를 모두 취소시키고는 술에 취한 모습으로 발견된 병사는 술의 출처를 밝힐 때까지 하루에 20회씩 채찍을 때리라고 명령했다. 더불어, 그의 럼 배급도 6주간 중단됐다. 영국 육군에서는 주취 하나만으로도, 불복종이나 다른 부정행위로 상황이 악화되지 않았을 때에도, 처벌이 가능했다. 형벌은 대체로 추가근무나 훈련이었지만, 주취동안 저지른 규율위반이나 범죄행위에는 더 심각한 결과가 따랐다. 이런 종류의 사건들은 군대가 아메리카에 주둔했을 때 더 보편적이었던 듯하다. 거기서는 가격이 저렴한 럼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p.264

1780년대 말에 물가가 꾸준히 오르고 일자리가 줄고 인구 대다수가 점점 큰 압박을 받으면서, 와인과 다른 물품에 붙는 세금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프랑스에서 커졌다. 1780년대가 저무는 동안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위기가 쌓이면서,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1789년 7월 12일∼13일 밤에 분노한 군중은 시 관문에 설치된 관세징수용 장애물 대다수를 파괴하거나 불태웠다. 타당한 이유도 없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폭동이 아니었다. 서민들의 생활수준과 포도 재배자의 생계, 심지어 상인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기관들을 정확하게 표적으로 삼은 거였다. 프랑스혁명의 시발점은 관습적으로 7월 14일에 일어난 바스티유(Bastille) 습격으로 간주되지만, 관세징수용 장애물의 파괴도 그렇게 볼만하다. 왕실의 감옥이던 바스티유는 커다란 규모만큼이나 엄청나게 상징적이었지만, 관세징수용 장애물의 파괴는 평범한 파리지앵들이 벌인, 그들을 더 깊은 빈곤 속으로 몰아가는 기관들을 파괴하려는 분투를 대변했다. --- p.273

압생트는 1840년대에 알제리 정복전쟁에서 귀환한 병사들의 배낭에 담겨 프랑스에 처음 소개됐다. 알제리에서 이질과 열병, 말라리아의 치료제로 사용된 압생트는 1860년대와 1870년대에 파리의 비스트로(bistro, 격식을 따지지 않는 소규모 레스토랑이나 식사를 제공하는 바-옮긴이)와 바에서 인기를 얻어갔고, 사람들이 근무 후에 압생트를 마시는 오후 5시는 ‘녹색시간(l’heure verte, green hour)’으로 알려지게 됐다. 압생트는 빠른 시일 내에 문화계 엘리트들과 결부됐는데, 세간의 주목을 끈 압생트 소비자로는 빈센트 반 고흐, 에두아르 마네, 폴 베를렌, 기 드 모파상, 에드가 드가 등이 있었다. 19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그려진 많은 회화가, 특히 앙리 툴루즈-로트렉의 카바레 그림들이 압생트를 찬양했다. --- p.288

술이 인간의 건강과 사회 질서에 미치는 해로운 효과에 대한 우려들이 수천 년간 표명돼 왔지만, 19세기에 목청껏 터져 나온 술을 공격하는 목소리에 비하면 그것들은 속삭임 수준이었다. 1830년대에 절주운동을 벌이는 단체들이 등장했고, 50년 후에는 대규모 조직들이 알코올성 음료의 입수 가능성을 제한하고 소비를 줄이거나, 술을 아예 제거하자는 운동에 전념했다. 종교단체와 제휴한 많은 강력한 절주운동과 금주운동이 세계 많은 지역에서, 특히 미국과 캐나다, 영국, 스칸디나비아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국가 및 지역 수준에서 활동하고 국제적으로 협력한 이 단체들은 신문과 팸플릿, 서적을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홍보하고 연설과 강연을 통해 널리 알렸다. 술 사업을 통제하거나 아예 사업에서 몰아내자며 정부를 압박하려고 거리로 나와 시위에 나선 단체도 많았다. 그 무렵, 그건 단일한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규합된, 역사적으로 가장 큰 규모로 인력과 자원을 동원한 시민운동이었다. --- p.308

술이 대체로 유익한 강장제라는 계속되는 인식은 어느 스위스 의사가 1903년에 집필한 술과 등산에 대한 책자에서 표명됐다. 각자의 술 소비에 대한 서베이에 응답한 알파인클럽 회원 1,200명 중 78%가 정기적으로 술을 마신다고 답했고, 72%가 등반할 때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술을 가져간다고 주장했다. 스위스의 알파인가이드들은 화이트와인은 원기를 북돋아주고, 레드와인은 등산가가 지치기 시작할 때 원기를 되돌려주는 회복제이며, 브랜디는 용기를 주고, 뜨거운 레드와인은 거의 모든 경미한 질병을 고쳐준다고 믿었다. 저자는 술의 가치에 대해 많은 조건을 달면서 (물과 차, 레모네이드, 과일, 커피 같은) 대안들을 제안한 후, 술이 강장제로 유용할지도 모르지만, 적당한 양만 마셨을 때에만, 그리고 정말로 필요한 경우에만 그렇다는 결론을 내렸다. --- p.333

17세기에 유럽과 북미에 소개된 커피와 차는 19세기에 폭넓게 소비됐다. 둘 다 수분 섭취용으로서 술의 대안으로 간주됐다; 차는 이뇨제이기도 했지만, 종합적인 효과는 수분 섭취였다. 커피와 차는 끓은 물이나 거의 다 끓은 물을 요구했기 때문에, 커피나 차는 그걸 마드는 데 사용한 물을 그냥 마시는 것보다 안전했다. 이 두 가지 뜨거운 음료의 소비가 19세기 동안 늘었고, 일부 나라에서는 사회의 전 계층에 퍼졌다. 차가 영국(영국의 1인당 차 소비량은 1850년에서 1875년 사이에 2배 이상이 됐다)과 영국의 식민지, 그리고 러시아에서 특히 인기를 얻은 반면, 커피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미에서 우세했다. 그럼에도, 무알코올 사회를 현실적으로 상상하고 옹호할 수 있으려면 안전한 물 공급이 필수적이었다. --- p.341

술이 나이지리아 남부에서 화폐로 활용됐기 때문에 술이 완전히 소비되는 일은 없었지만, 손이 바뀔 때마다 꾸준히 소비되기는 했다. 술병의 주인은 술병을 열고는 내용물을 조금 마신 후에 그만큼의 물을 채우고는 병을 다시 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일이 충분히 자주 일어날 경우, 결국 술 수령인 중에는 술 1병의 가치에 해당하는 물병을 갖게 될 터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리고 술 1상자의 무게와 병이 깨질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었음에도, 스피릿은 이상적인 화폐였다. 와인이나 비어처럼, 또는 직물이나 담배 같은 다른 교역품처럼 질이 저하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진 화폐(gin currency)’가 너무도 널리 퍼져 있던 탓에 일부 법정은 화폐교환을 제도화했고, 그러면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벌금을 현금으로 내려고 진을 화폐로 바꾸는 게 가능해졌다. 더불어, 스피릿 1상자는 융통성이 있는 화폐단위였다. 상자에 손을 대지 않은 상태로 거래할 수도 있고, 상자 안에 든 12병을 병 단위로 거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 경제에 화폐를 도입한 영국인들은 원주민이 1실링은 12페니라는 원칙을 이해할 준비가 이미 돼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 p.353

아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술을 취급한 유럽인들이 중국에서 몰두한 것은 술이 가진 속성들을 다수 공유하는 아편이었다: 아편은 중독성이 있었고, 극도의 행복감을 안겨주는 자극제이자 도취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약효가 있고 치유적인 속성을 갖는다고 믿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편은 주취를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중국에 간 선교사들이 내놓은 비판에서, ‘술’이라는 단어는 쉽게 ‘아편’을 대체할 수 있었다. 1856년 보고서에서처럼 말이다: “우리가 이곳의 사방에서 접한 아편이 초래한 참상은, 사람들의 도덕적인 타락은… 상당부분이 사람들을 꼬이는 이 파괴적인 약물을 사용한 탓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 식물학자인 어느 서구의 비평가는 아편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반대했다: “최근 들어 아편이라는 주제에 격한 반응을 보이는 선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럼에 젖은) 그들 자신의 동포들부터 개혁하라고 추천하고 싶다. --- p.376

제1차 세계대전(1914~18)은 유럽과 세계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전쟁은 거대한 제국들을 파괴했고, 유럽의 정치적 경계선을 급격히 재편했으며, 지구 전역의 힘의 균형을 바꿔놨고, 각국 정부가 국력을 총동원하도록 강요했으며, 새로운 사회정책들이 등장할 길을 내주고는 구체화시켰다. 전쟁은 술의 역사에서도 분수령이었다. 확장된 군사적 갈등의 압박 아래 술에 대해 점증한 우려가 확고해졌고, 많은 정부가 엄격성과 범위 면에서 유례가 없는 규제들을 도입했다. 이 정책 중 다수는 전시의 비상조치로 채택된 것이지만, 그 정책들 대개는 갈등이 종식되고 한참 뒤에도 그래도 남거나 심지어 강화됐다. 양차대전 사이의 시기에 절주와 금주정책이 서구세계 곳곳으로 확장됐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미국으로, 미국은 1920년에 전국적인 금주령을 도입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 직후에 소위 술이라는 악마를 근절하려고 노력한 나라는 미국 딱 한 곳뿐이었다. --- p.382

‘prohibition(금지)’이라는 단어는 미국에서 내려진 금주령의 약칭으로 자주 쓰인다. 미국에서 금주령은 1920년부터 1933년까지 나라 전역에서 알코올성 음료의 생산과 판매를 금지하는 효력을 가진 국가적 정책이었다. 이 시기는, 이 시기가 될 때까지 이끈 반알코올 운동들과 더불어, 미국의 술 역사를 지배했다. 그런데 미국의 금주령은 미국의 술과 폭넓은 문화사에도 중요하지만, 더 폭넓은 글로벌한 맥락에서도 역시 중요하다. 이슬람이 무슬림의 (그리고 무슬림이 지배하는 영토에 거주하는 다른 이의) 술의 생산과 음주를 금지시킨 이후로, 미국의 금주령은 전국적인 기반에서 포괄적으로 제정된 정책 중에 가장 엄중한 정책이면서, 정책이 도입된 시기에 그런 종류의 정책으로는 단연 유일한 정책이었다. --- p.406

대공황의 도래는, 그 자체로, 금주령을 지지하는 목소리의 기반을 흔들었다. 술 없는 미국은 평화와 행복, 번영으로 가득한 곳이어야 했다. 하지만 1930년대가 시작되면서, 미국에는 비참한 이들과 가난한 사람들만 사는 듯 보였다. 물론, 금주령이 대공황의 원인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금주령은 절망적인 분위기를 몰고 왔다. 지극히 평범한 의미에서, 금주령은 적당량을 마시는 평범한 미국인들에게서, 그렇지 않아도 암울한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기쁨을 제공할지 모르는 비어 1병이나 위스키 1잔을 앗아갔다. --- p.425

20세기의 첫 20년 동안 앞선 2,000년보다 더 체계적인 규제가 술의 생산과 소비에 가해졌다. 러시아/소련과 미국이 행한 고결한 실험과 그리 고결하지 않은 실험들, 그리고 캐나다와 스칸디나비아, 멕시코 일부 지역에서 행한 준(準)금주령이 거기에 해당된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나라가 특별한 난국을 해결하려고 제정했지만 이후로도 오래도록 유지한, 거미줄처럼 복잡한 규제?생산과 음주연령, 태번과 바의 영업시간에 대한 규제?들도 있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 이어지는 몇 십 년 동안, 많은 나라의 의원들이 공중보건과 사회 질서를 위해 술의 소비를 제한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더 자유로운 술 관련 제도로 돌아가려는 내재하는 갈등을 붙들고 씨름했다. 술의 생산과 소비는 때때로 이런 정책을 반영했지만, 불황과 번영이라는 경기순환, 권위주의국가가 채택한 계급이나 인종 기반 정책,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도 받았다. --- p.440

나치는 (결근과 질병, 가정폭력, 범죄, 교통사고를 포함한) 음주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결과 때문에 일반적으로 음주에 비판적이었지만, 술을 금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랬을 때 얻는 가치보다 더 큰 갈등과 저항을 초래할 것이라고 판단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실용적이기도 했다. 나치는 미국에서 금주령이 폐지된 바로 그해에 정권을 잡았다. 그래서 그들은 금주령의 결과를 살펴보는 특권을 누리는 입장에 있었다. 나치 리더들은 술은 유대인이 독일 민족을 허약하게 만들려고 채택한 물질이라는 것 같은, 그들 내부에서 제기된 일부 과격한 주장에도 그다지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 p.458

미국이 상대적으로 자유방임적인 술 정책들을 채택하면서 전국적인 금주령에서 벗어난 이 무렵, 미국인들은 거의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로이 술을 구입하고 마셨다. 앞서 봤듯, 주마다 상황은 제각각이었지만, 1933년 이후에 금주령을 택하기로 한 주의 수는 전국적으로 금주령이 시행되기 전보다는 상당히 적었다. 금주령에 뒤이어 채택된 전국적인 정책들이 앞선 정책들보다 더 자유방임적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은 예외적인 사례였다: 노르웨이와 스웨덴, 소련, 핀란드, 캐나다의 여러 주에서, 국가는 금주령이 폐지된 후에도 술 소비를 규제하기 위해 술 소매를 직접 통제하는 권한을 취했다. 금주령 정책을 실행한 적이 없던 국가들조차 술과 관련해서는 20세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에 이전에 그랬던 것보다 더 규제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예를 들어 영국과 뉴질랜드에서,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부과됐던 (퍼블릭 하우스의 영업시간 같은) 일부 술 관련 규제들은 20세기가 저물 때까지 유지됐다. 이런 다양한 방식으로, 금주령 이후의 세계는 금주령의 실행 경험, 그리고 그와 관련된 절주 아이디어들에 의해 오래도록 영향을 받았다.--- p.470

전후 세계에서 술 소비와 관련 정책은 광범위한 사회적·문화적·경제적 변화뿐 아니라 국가와 지역 각각에 특유한 상황들도 반영했다. 거의 모든 서구국가 인구의 연령구조를 바꿔놓은 베이비붐 세대와 출생률 하락이 그런 상황에 해당된다. 독특한 음주나 비음주 패턴을 가진 비유럽인 수백만 명의 이주 같은 인구이동이 유럽의 많은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1960년대 이후로 술 소비를 향한 공식적인 입장은 일반적으로 더 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동했지만, 그런 흐름에 역행하는 음주운전과 폭음(binge-drinking) 같은 특유한 이슈들과 관련된 경향들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부 사회는 술과 관련된 심각한 난제들에 직면하고는 더 엄격한 통제로 대응했다. --- p.472

현대세계의 술은 지난 몇 세기와 밀레니엄 내내 추적해볼 수 있는 이슈들을 상기시킨다. 소비에 대한 친숙한 우려들이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런 우려가 다른 지역에서보다 더 날카롭게 표명되지만, 아무튼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 이런 우려가 존재한다. 오늘날 술의 위험성은 훨씬 더 정확한 용어들로, 때로는 상이한 용어들로 묘사된다: 간(肝)질환과 심장질환에 걸릴 위험성은 생생하게 설명되고, 음주운전의 위험성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음주와 그들의 도덕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는 무척이나 준 반면, 남성들이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수단으로 술을 활용하는 행각이 한층 더 강조된다. 일반적으로 젊은이의 술 소비에 대한 우려는 훨씬 심해졌다. 긍정적인 면을 보면, 술은 거의 100년 정도의 휴지기를 보낸 후에 약국으로 돌아왔다. 프렌치 패러독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얼마 안 있어, 레드와인만이 아니라 적당량을 소비하는 한 모든 와인이 건강에 유익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남용이나 과음에 대한 논의는 하나같이 용인 가능한 술 소비량 수준을 넌지시 내비친다. 적당량이 얼마인지를 찾아내려는 조사는 술을 철저히 금지하지는 않은 거의 모든 나라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고, ‘적당함’의 정의와 사람들에게 적당히 마시라고 설득하는 수단들을 찾으려는 노력은 술의 역사의 심장부에 자리 잡고 있다. --- p.495

여성의 술 소비에 대한 남성들의 불안감은 역사적으로는 꾸준한 듯하지만, 상이한 시기에 상이한 형태를 취했다. 고대 로마에서, 방점은 결혼한 여성의 와인 소비에 찍혔다. 술에 취한 부인이 간통을 저질러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녀의 남편이 친자식이 아닐지도 모르는 아이를 키우게 될 거라는 공포 때문에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여성이 술을 마셨을 때 내리는 처벌?때로는 사형, 어떤 때는 이혼?이 불륜을 저지른 여성에게 부과된 것과 동일한 형벌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와 반대로, 18세기 초 영국에서 진 소비에 대한 패닉은 아내로서 여성이 아니라 어머니로서 여성에 초점을 맞췄다. 앞서 봤듯, 진은 마더 진이나 마더스 폴리(Mother’s Folly)로 알려졌고, 호가스의 유명한 판화 [진 레인]은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를 중심 이미지로 묘사했다. 출생률과 인구 증가가 18세기에 가장 큰 걱정거리에 속했고, 당시에 출판된 많은 소책자가 진이 아동과 출생률에 끼치는 해로운 영향을 강조했다는 게 우연일 수 있을까? --- p.500

술이 그런 효능을 갖고 있더라도, 그리고 우리가 역사적인 소비량 수준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의 술 소비량은 경제적으로 발전한 많은 나라에서 역사적으로 낮은 수준이고, 앞으로도 더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통계학적 증거의 신뢰성이 훨씬 높은 시기인 20세기 초 이후로 많은 서구 국가에서 술 소비량은 확실히 감소해왔다. 젊은이의 음주에 대한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이들 나라의 높은 술 소비량 수준은 일반적으로 노년층 집단에서 비롯된다. 술 소비량은 금전적인 자원과 함수관계일 수도 있지만, 젊은 세대가 술이 제공하는 상태를 성취하려고 술이 아닌 다른 수단들을 채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많은 종류의 마약, 특히 마리화나가 널리 인기를 얻고 있고, 젊은이들은 카페인으로 (때로는 카페인과 알코올 모두로) 강화한 음료도 흔하게 소비한다. 젊은이들은 앞선 세대보다 음주운전과 관련한 법규를 더 잘 준수하는 경향도 있다. 종합해 보면, 젊은 세대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상당히 많은 술을 마시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소비량이 많았던 세대들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1인당 소비량이 훨씬 더 줄어들 거라는 예상이 가능하다.
--- 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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