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그린 것인지, 못 그린 것인지 구분되지 않은 꼬불꼬불한 그림과 손으로 긁어 쓴 글씨들. 가만히 다가와 묘한 울림을 남기는 이 작은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내 삶과 나를 둘러싼 세계를 깊이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발견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 근처의 한 괜찮은 아파트에서, 아마도 평범하다고 불러야 할 삶을 살고 있던 저자(대니 그레고리)의 아내가 어느 날 지하철 사고를 당해 하반신 불구가 된다. 그때까지 장애인이라고는 한 사람도 몰랐던 그레고리는 절망에 빠져 아이와 함께 거실 흔들의자에 앉아 앞으로의 삶을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조용한 저녁, 그레고리는 휠체어에서 내려와 소파에 앉아 있는 아내, 패티의 그림을 그리며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로 빠져든다. 마음을 비우고 그저 바라보는 대상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던졌을 때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충만함.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주 에로틱한 그 경험”에 매혹되어 버린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지금까지 자신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진정으로 알지 못한 채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그저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고정관념에 빠져 사람과 사물을 유형에 끼워 넣고 그에 따라 생각해 온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보는 모든 것들이 생각해 왔던 것과 그렇게도 다르다면, 지금 처한 자신의 비참한 상황도 어쩌면 자기만의 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나무에 대해 생각해 왔던 것들이 실제 나무와 달랐듯이, 나는 장애인 아내와의 삶이 어떤 것인지 정말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다려 봐야 할 것이다....”
그는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시 바라보고, 다시 느끼며 직접 판단하려는 것이다. 머리핀, 쿠션, 부엌칼, 술병, 가족사진, 자신이 모으던 박제들...... 그리고 그 사물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한두 줄씩 덧붙이며 그림일기를 만들어 나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글과 그림에는 진실함이 느껴진다. 직업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혹은 글을 쓰는 사람이 공을 들여 만들어 낸 작품이 아닌, 서툴지만 마음을 담아 쓴 글에서 느껴지는 소박하고 잔잔한 맛.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그 묘한 힘은 아마도 저자의 말처럼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내 그림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언제나 내 삶을 풍요롭게 채워 주는 것들을 깊이 알고, 기록하고, 간직하기 위해서. 우선 제일 가까이 있는 것들부터. 내 노트에 떨어지는 햇살. 냉장고에 붙여놓은 잭이 새로 그린 그림들. 식탁 아래 살며시 구르는 먼지덩이. 나는 이들의 축복을 느끼고 싶고, 또한 나 자신이 이들의 일부이자 원인이 되고 싶다. 그림 자체보다는 이러한 유대감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이다.”
이윽고 집 안에 있는 것은 모조리 그려 버린 그레고리는 우리를 더 넓은 세상으로 안내한다. 평범한 뉴욕의 길거리, 유령이 나온다는 마크 트웨인의 집, 줄리 게오르그의 예술농장, 출장길에 들른 런던...... 가는 곳마다 그는 그곳에 사는 사람과 사물들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포착해 낸다. 그 시선 속에는 우리가 평소에 놓치고 사는 무언가가 들어 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는 띄지 않는,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전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그레고리의 마음속에 있던 고통이 말끔히 씻겨 내려간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고, 한 번의 깨달음으로 단번에 해결되어 버릴 만큼 간단하지도 않다. 그 이후에도 그와 그의 가족에게는 여전히 힘든 날들이 있었으며, 가끔은 자신이 하고 있는 작업에 대해서도 회의를 가진다.
“내가 삶을 지금보다 더 즐겼던가? 삶의 무게가 전에는 더 가벼웠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아는 것은 그림을 그리거나 무얼 만드는 걸 내가 이전보다 훨씬 덜 부끄러워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장미꽃 향기를 맡으려고 훨씬 자주 멈춰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니면 내가 그저 나 자신에게 속고만 있는 걸까? 때로는 내가 느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그는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작은 깨달음을 살아가며 실천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모든 날이 소중하다.”는 저자의 말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이라면 모두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소망, 바로 ‘행복해지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너무나도 약한 존재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올곧게 바라보려는 저자의 따뜻한 시선에 공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번역한 것을 직접 한 줄 한 줄 손글씨로 작업한 것은 이러한 저자의 마음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배려이다. 감정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저자의 글씨체와 글자의 크기, 그리고 중간 중간 들어 있는 장식적인 타이포그래피를 속도와 편의만 중시한 컴퓨터 폰트들은 담아내지 못했다. 저자가 그러했듯이, 속도도 느리고 가독성도 떨어지지만 그 느리고 애정 어린 시선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똑같은 만큼의 마음이 담긴 사람의 손길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바쁜 사람들에게 사람의 손길과, 사람의 눈길이 듬뿍 담긴 이 책은 좋은 처방이 될 것이다. “이 일만 끝나면 휴가를 받아서 좀 쉬어야지...”, “난 아무 문제없어, 다만 지금은 조금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하자...,” 만약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있다면 이 책이 들려주는 작은 이야기들에 귀 기울여보자. 모든 날을 채우는 모든 사물과 시간들이 지금의 내게 진정으로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다면 세상이 좀 더 아름답게 느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