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은 중독 문제를 다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듯이, 우리가 신경을 써서 해야 할 일은 실상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정직하게 그 질병과 대면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중독 행위자가 건강성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사회도 질병을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사회 그 자체가 질병이란 뜻은 아니다. 다만 사회가 스스로 질병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면, 그 사회에 회복 가능성이 생긴다는 이야기다.
사회가 중독이라는 질병을 갖고 있다는 깨달음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설명이나 해결책들에서 이제까지 빠져 있던 부분이다. --- p.19
이걸 눈치 채는 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는데, 그것은 그녀가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짐작하듯 원래 알코올 중독자는 늘 술에 절어 있지 않던가! 그러나 늘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알코올 중독자의 ‘행위’는 계속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녀를 통해 새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질병이 집 안 곳곳에 스며들어 온통 혼란스러워졌고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동안 알코올 중독 ‘시스템’에 깊숙이 빠진 나머지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알코올 중독 문제를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우리가 점점 많이 배울수록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그 질병을 불러들였을 뿐 아니라 그것과 잘 타협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어떤 중독 시스템들과 마찬가지로 알코올 중독 시스템은 전염성이 아주 강하다. 그래서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감염되고 만다. 그리하여 알코올 중독자가 보이는 행동이나 패턴이 다른 구성원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기 쉽다. --- pp.35~36
다른 심각한 질병과 마찬가지로 중독이란 질병 또한 진행성이 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적극적으로 치유와 회복을 하려 들지 않으면, 중독은 우리를 죽음으로 내몬다. 과연 중독이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이것이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나는 이 책에서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보일 것이다.
우선 중독은 우리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중독에 빠지면 우리는 화, 통증, 우울, 혼란, 심지어 기쁨과 사랑마저 제대로 느끼지 못하거나 혹시 느끼더라도 단지 희미하게만 느끼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된다. --- p.48
지난 수년 동안 중독 치유의 무게중심이 약간 변했다. 즉 알코올이나 마약 또는 그 어떤 것에든 중독에 빠진 경우, 그것을 남용하는 당사자만 치료해서는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었다. 그 특정 개인을 넘어 온 가족 시스템, 즉 중독 시스템을 치유해야 비로소 그 개인도 제대로 치유가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치유의 무게중심이 개인에서 시스템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 이제는 동반중독자 치유에 더 많은 강조점이 간다.
동반중독증은 그 자체로도 매우 흥미로운 질병이다. 이것은 우리의 사회 문화에 의해 지지되고 촉진될 뿐 아니라,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아주 긍정적인 것처럼 수용된다. 다시 말해 중독 시스템은 동반중독자를 지극히 정상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이것은 각 개인이 그 중독 시스템 전체 그리고 그것이 내포하는 그 모든 것을 이미 받아들였다는(내면화) 증거에 불과하다. --- p.70
중독자 치유 상담을 해 본 사람이라면, 중독자가 제대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정직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우리가 정직해진다는 건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느낌과 접촉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속이지 않고 솔직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변화할 수 있다면 (그 이후에 비로소) 중독자들은 타인이나 세상과 정직한 관계를 맺으며 회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정직함은 때때로 고통스럽거나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정직함은 결코 파괴적이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다. 반대로 부정직함은 항상 파괴적이고 해롭다. 앞서 말한 중독 시스템은 부정직함 위에 구축된다. 중독 시스템에서는 사람들이 세금과 관련해 할 수 있는 한 많이 피해 가려고 온갖 편법을 쓰려고 발버둥 친다. 그러니까 중독 시스템은, 오직 바보들만이 정직하다고 가르친다. --- p.122
이런 부정주의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한 인간관계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내게 상담을 받으러 오는 많은 고객들은 자신이 ‘좋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그것이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 보면, 그들의 대답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남편은 나를 때리지 않아요. 그이는 나를 속이지도 않죠. 그리고 돈도 잘 줘요.” 여기서 알 수 있듯, 그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끔찍한 일이 없다는 말에 불과하다! 요컨대 중독 시스템 안에 살다 보면, 우리는 우리 삶에서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인지 개념을 명확하게 갖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 p.173
나는 우리 모두 각자 내면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악한 것인지에 대해 나름의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각자 나름의 도덕성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거짓말을 할 때나 좀 이기적인 행동을 할 때, 우리 자신은 그것을 잘 안다. 또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안다.
중독 시스템은 이런 경우마다 각자 자신의 개인적 도덕성과 타협하도록 유도한다. 더욱이 시스템은 우리에게 그런 타협 또는 타락을 더 잘할 수 있는 도구를 아낌없이 제공한다. 자기중심성, 통제 환상, 비정상적 사고 과정, 부정, 방어적 태도, 두려움, 얼어 버린 느낌, 그외 이 중독 시스템이 가진 다른 모든 특성들이 대를 이어 전승된다. 이 모두는 우리가 도덕적이고 책임성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피해 가게 돕는 장치들이다. 이들은 모두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우리 내면의 목소리를 철저히 잠재우는 역할을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옳다고 믿게 된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아니고 바로 우리가 그것을 하기 때문이다. --- p.200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이것이 제대로 건강성을 회복하게 돕고자 한다면, 우리는 현재의 시스템이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사는 이 시스템은, 몸이 엄청 망가지거나 퇴화하는 중인 알코올 중독자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중독 행위자로 되어 버렸다. 실제로도 그렇게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병적 과정에 더 이상 참여해서는 안 된다. 전혀 다르게 살아가야 한다. 이제 더 이상의 부정은 안 된다. 지금까지처럼 코끼리의 다리나 꼬리만 만지는 일은 그만두고, 그 총체성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중독 시스템이 바로 그 전체 코끼리다.
--- pp.21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