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9년 10월 06일 |
---|---|
쪽수, 무게, 크기 | 328쪽 | 482g | 128*188*30mm |
ISBN13 | 9788954608992 |
ISBN10 | 895460899X |
발행일 | 2009년 10월 06일 |
---|---|
쪽수, 무게, 크기 | 328쪽 | 482g | 128*188*30mm |
ISBN13 | 9788954608992 |
ISBN10 | 895460899X |
공무도하 작가의 말 |
지친 일상에 차 한잔이 재충전의 휴식을 안겨주듯 복잡한 책들을 보던 사이 잠깐 쉬어가고 싶어 집어든 책이다. 역시 믿고 보는 작가다.
책을 읽으며 몰랐던(처음 접하는) 단어들을 정리해 본다.
던적스럽다 : 하는 짓이 보기에 매우 치사하고 더러운 데가 있다.
버마재비 : 사마귀
우듬지 : 나무의 꼭대기 줄기
신산(辛酸) : 1. 맛이 맵고 심. 2. 세상살이가 힘들고 고생스러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가섭불(迦葉佛) : '카시아파'부처
풍편 : 어떤 말을 누구에게랄 것 없이 간접적으로 들었을 때를 이르는 말.
푸새밭 : 풀들이 많이 자라고 있는 넓은 땅.
나문재 : 명아줏과의 한해살이풀.
칠면초 : 명아줏과의 한해살이풀.
세거(世居)하다 : 한 고장에 대대로 살다.
들까부르다 :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다.
'인문학의 대중화는 힘겹고 또 느리게 밀고갈 수밖에 없을 터이지만, 인문화된 대중의 힘이 거꾸로 출판의 갈 길을 이끌어줄 것이다.'
이 작품은 김훈의 장편소설로, 고대시가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의 제목을 차용해서 창작한 것이다. ‘사랑아, 강을 건너지 마라’라는 부제목은 제목인 <공무도하>를 그대로 번역한 것인데, 실제의 내용은 고대시가인 ‘공무도하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고대시가 <공부도하가>가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도 강 혹은 바다와 같은 ‘물’이 아주 중요한 제재로 활용되고 있다. 장마 기간에 한강의 범람이라는 소재로 시작되는 작품의 서두에서부터 바닷가 마을 해망이라는 공간 역시 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자인 문정수는 아마도 작가 자신의 기자 생활을 반영하여 형상화된 것으로 이해된다. 작품은 장마철 가상으로 설정한 서울의 서북경찰서에 근무하면서, 한강물의 범람에 따른 침수 위험을 시시각각으로 접하고 기사를 작성하는 문정수의 상황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새벽이 되어 기사 송고를 마친 문정수는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노목희의 집으로 향한다. 노목희는 고향 창야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동류들을 밀고하고 잠적한 장철수와 연결되는 고리이며, 그는 개에 물려 죽은 아이의 부모를 찾아 떠난 바닷가 마을 해망에서 문정수가 만나게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백화점의 화재 현장에서 보석을 빼돌린 박옥출은 그 이후 10년 동안 몸담았던 소방서를 떠나, 장물을 처리하여 해망으로 떠나서 정착한다.
이렇듯 작품은 기자인 문정수와 출판사 편집자인 노목희가 등장하는 서울이 하나의 배경이고, 그들과 이리저리 얽힌 인물들이 하나씩 자리를 잡게 되는 해망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삼아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 미군의 폭격장으로 사용되었던 해망에서, 창야에서 자취를 감췄던 장철수는 베트남 출신의 여성 후에와 바닷속의 포탄 잔해를 건져내는 일을 한다. 해망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해망의 바다는 생존의 터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해망은 누군가 그곳으로 스며들어 정착하기도 하지만, 그곳을 떠나는 이들도 공존하는 장소이다.
중국 학자인 타이웨이 교수가 쓴 역사이행서 <시간 너머로>의 편집을 담당한 노목희는 출판에 이어, 초빙 강연까지 주관하는 등 바쁘게 지낸다. 그리고 타에에이의 두 번째 책을 출고한 다음날 노목희는 유학을 떠난다.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 가운데 누군가는 익숙한 공간에서 다시 일상을 영위하지만, 누군가는 몸담고 있던 공간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강을 건너지 마라’는 말과는 다르게, 어쩌면 우리는 익숙한 공간에서 떠나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는 의미일까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제목이기도 한 <공무도하>의 의미가 어렴풋하게 잡히는 듯도 하다. 이 작품의 처음과 마지막은 서울의 경찰서를 전전하면서 기사거리를 찾는 문정수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문정수는 취재한 내용 가운데 기자로서 써야할 기사거리가 있는가 하면, 기사가 되지는 못하지만 누군가에게 말하고픈 내용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은 취재가 끝난 이후 새벽에 찾아간 노목희에게 기사거리가 되지 못한 사연들을 풀어놨지만, 이제 그녀가 떠난 이후에는 그저 자신의 가슴에 담아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이야기들을 통해서, 아무리 만류하더라도 사람들은 언젠가 ‘강을 건널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여겨진다.(차니)
?"개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견딜 수 없다면 또 어떻게 할 것인가."
- 김훈,「개」중 pp182~183, 푸른숲, 2005.
딱히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의 소설은 아니었더랬습니다만, 또한 인용해 놓은 위 세 문장이 그 소설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어쨌든, --- 작가 김훈의 장편소설「개」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지금의 제 삶을, 어쩌면 우리들 대부분의 삶들이 이러하지 않을까하는, 뭔가 짠한 생각을 (읽을 당시에도 그러했으며, 심지어는 지금도 여전히) 지워낼 수 없더군요. 견딜 수 없는 것을 어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허나 그렇다고 그것을 견딜 수 없다면 또 어찌할 것인가,
아, 이거 참, 정말...
…………………………………………………………………………………
(문학 전공자가 아닌 저이기에) 소설의 대표값이란 결국 줄거리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라 생각하게 됩니다만, 한 편으로 그 대표값이란, 적어도 겉으로 보여지는 대표값이란 어찌 보면 --- 작가가 해당 소설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감싸고 있는, 일종의 포장지일 수도 있겠다란 생각을 갖게해 준 작품들도 꽤 있었습니다. 얼핏 꼽아지는「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든가,「위대한 개츠비」등이 저에겐 그러한 소설들이었지요.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이 작품,「공무도하」의 (예의 포장지에 불과할 뿐인) 줄거리 속에 난무하고 있는 우연한 인간 관계의 얽힘이라든가, 그 폭의 좁음 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도 않으며, 심지어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된다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한 우연과 좁음은 324페이지라는 한정된 지면 속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관을 펼쳐 놓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제약 조건하 최적의 결과물이기 때문이지요. ?
·
·
·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1.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 (p35)
적어도 제가 이해하는 바의, 이 소설을 통해 작가 김훈이 표현하고 있는, 표현하고자 하는, 이 세상에 대한, 또한 인간에 대한 관점은 이러합니다. 비루하고 치사하며 던적스러운 온갖 군상2들이 서로 모여,
바다사자의 앞지느러미는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바다사자의 뒷지느러미는 일어설 수 없는 몸을 일으키려고 바닥을 치며 몸을 뒤틀었다. (p230)
이루어 낸다는 것이 실은 가능하지 않은, 어쩌면 심지어 존재하지조차 않는 무언가를 희망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희망을 여전히 희망으로 갖고 이루어내려 살아가기에 (결과적으로) 그 삶은 비루하고 치사하며 던적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라는,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다 생각됩니다. 너무 비관적인 이해일까요? 다행히도,
"태어나보니, 나는 개였고 수놈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기는 소나 닭이나 물고기나 사람도 다 마찬가지다. 태어나보니 돼지이고, 태어나보니 사람이고, 태어나보니 암놈이거나 수놈인 것이다. (p10) …… 나는 수컷으로 태어났으므로 수컷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일은 아니었다. (p150)
- 김훈, 위의 책 중.
작가는 그것이 당신 / 우리의 탓만은 아니라 말해줍니다. 나와 당신으로 이루어지는 '우리'만이 그렇게 비루하고 치사하며 던적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수많은 '우리'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전체 구성원들 모두가 그렇게 - 이 이유가 원래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이기에 이런 세상이 된 것인지, 혹은 원래 세상은 이렇기에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렇게 되어버릴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든지에 상관 없이 -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창야에서 사람들은 남들과 같은 말을 하고, 말의 흐름에 동참함으로써 안도했고, 그 안도감 속에서 소문은 소문의 탈을 쓴 채 믿음으로 변해갔다. (p161) …… 방조제가 들어서기 전에는 삶이 건강했고 평화롭고 충만했다고 말할 때, 그들은 그 말의 대부분이 거짓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더 큰 거짓이 작은 거짓을 눌렀다. 그들의 말 속에서 방조제 이전의 삶은 늘 평화롭고 충만했다. (p241)
굳이 무엇이 진실인지를 캐묻지 않고 또한 알고 있지 않다하더라고, ---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그렇게 묻지 않고 알고 있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놈의 세상, "신문에 쓸 수 없는 것들, 써지지 않는 것들, 말로서 전할 수 없고, 그물로 건질 수 없고, 육하(六何)의 틀에 가두어지지 않는 세상의 바닥"(p125)에 두 발 딛고 살아가는 데에는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라는, 더 도움이 된다라는 걸, 서로서로 묵인하고 있으니, 이 세상을 통째로 바꾸어버릴 수 있기 전에는 이런 세상에 속해 살아가고 있다라는 사실에 자책하거나 그리 슬퍼하지 말하는, 위로 아닌 위로... 뭐 그렇게, 이 소설의 의미가 저에겐 받아들여지더군요. 그러하기에,
마치, 일 년치 주간지를 한데 모아 읽고 있는 듯한, 사건과 사고가 쉴 새 없이 이어져 서술되어 있는 이 작품 속에서 작가는 이러한 '고의적/의도된 무지'가 "추적할 수 없고 전할 수 없는 세상"(p218)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비정상적은 아닌) 삶의 방식임을, 그러한 반복의 형식을 빌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 "죽은 애가 개 주인이야. 그러니 아무 일 없는 거지. 조용한 거야." (p65)
● "쥐를 사살할 때 분대가 일제히 지향사격을 했으므로 탄도가 뒤엉켜 누가 쏜 총알이 어느 부위를 맞혔는지 밝힐 수 없었다. 해안대대 죽은 자들의 침묵에 안도했다. 그들의 침투와 이동경로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p79)
● "환경전문지 기자가 물었다. 공룡의 시력과 청력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고생물학자가 대답했다. 연구된 범위 안에서 질문해주십시오." (p147)
● "경찰서 수사과장은 정보입수경위는 본래 밝힐 수 없고 또 물어서도 안 된다는 답변을 반복했다." (p161)
● "어류의 생태와 능력을 인간이 모두 다 알 수는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p174)
………
"댐 잇! 페이 노 어텐션!" (p52)
…………………………………………………………………………………
결국 /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렇게 ………
노목희는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눈 앞의 문정수를 바라보았다. (p128)
적어도 이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작가 김훈의 시선은 이러하다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선이 그의 일반적인 시선이지 않을까 싶은, 그러하기에 --- "소통은 끌어안고 뒹굴어야 가능한 것이 아니고, 독립된 이성을 가진 개체들이 적당히 아름다운 거리에 떨어져 있을 때, 소통이 가능하다. 여러분과 다른 생각일지는 몰라도, 군중들이 한자리에 모여 같은 구호를 외치고 뒤엉키는 건 소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3라는 작가의 말이 가능하지 않나 싶기도 하지요.
물론,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눈 앞의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옳다라 말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단지 그러한 시선을 견지하는 것에 동의하느냐의 여부가, 이 작품에 깃든 작가 김훈의 세계관에 동의를 하느냐와 연결될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호·불호에까지도 연결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물론, --- 저는 이러한 김훈의 세계관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지요. 아주/매우 전적으로!!!
새들은 지상의 그 어느 곳에서도 신호를 보내오지 않았다. 기자들이 방조제 도로 위에 설치된 조류 탐지 안테나 주변에 몰려와 돌아오지 않는 도요새의 행방을 취재했다. 새들이 신호를 보내오지 않았으므로 취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자들은 취재가 불가능한 사정을 취재해서 송고했다. … 기사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않았고, 새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신호는 접수되지 않았다. (pp227~228)
접수되지 않는 신호에, 소설 속 미군처럼 "댐 잇! 페이 노 어텐션!"의 무대응으로 대응할 것이 아닌, 그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일종의 '반응'을 보내야 한다는 (뭐랄까) 이런 시대를 독자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작가로서의 의무 같은 것이, 혹은 그러한 '반응'을 보내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願)이, 작가 김훈으로 하여금 이 소설을 쓰게 하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해 봅니다. 딱히 '행복한'이란 형용사로 표현할 수 있는 등장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행복하지 않은 사회가 아닌, 행복하지 않은 사회이기에 그 속에서 살아가고/내고 있는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것일 뿐이라고, 일종의 (자기 최면스러운) 위안이나마 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건 마치,
"나는 세상의 개들을 대신해서 짖기로 했다. 짖고 또 짖어서, 세상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눈부시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다. … 인간이 인간의 아름다움을 알 때까지 나는 짖고 또 짖을 것이다."
- 김훈, 위의 책 중 p6.
한 마리의 '개'로 분신했던 작가가 인간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바로 그 메시지와 동일한 바로 그것이 아닐까... 뭐 그런 추측말입니다.
…………………………………………………………………………………
"님아 강을 건너지 말랬어도 / 기어이 건너려다 빠져 죽으니 / 어찌하랴 님을 어찌하랴"
- 여옥의 노래
우리 역사상 최초의 문학작품이라 배웠었던 기억이 나는, 이름 모를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아내 혹은 여옥이란 여인이 지었다는 고대 가요를 이 작품의 제목으로 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소설을 다 읽고나니 더 궁금해졌습니다. 연애소설이 아님이 틀림없는 이 작품에 도대체 왜... 그러다 문득,
노래의 화자인 여옥은 님을 죽게한 '강'과, 굳이 그 강에 들어간 '님' 중 누구를 원망했었을까, 혹 그런 선택을 한 님을 사랑한 '자신 스스로'를 원망한 것은 아니었을까란 의문이 들더군요. 이에 대한,
제멋대로의 이해/해답을 적어보자면, 이 작품의 제목을 '공무도하'로 삼은 작가 김훈은 아마도 --- 제 3자적 관점에서 '님'과 '여옥'의 관계를 원망했던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가져 봅니다. '님'과 여옥이 연인 관계가 아니었다면 최소한, (측은지심의 인류애적 뭐시기는 애초에 차지하고) 한 (치기어린?) 백수광부의 익사에 대한 여옥의 슬픔은 아예 존재하지/생겨나지 않았었을테니까요.4 그렇지 않고서는,
나는 나와 이 세계 사이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p325)
뭔가 섬뜩한 느낌마저 선사하는, 책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에 등장하는 위 혐오와 불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읽어본, 작가 김훈의 작품들 :「개」·「남한산성」·「칼의 노래」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마저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