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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가만히 혼자 웃고 싶은 오후

장석주 | | 2017년 04월 0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2 리뷰 32건 | 판매지수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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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4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296쪽 | 400g | 145*210*20mm
ISBN13 9791158160579
ISBN10 1158160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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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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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진짜로 “시작보다 끝이 더 많아지”는 인생의 ‘오후’에 당도했다. 설렘과 희망으로 맥동하는 아침은 저멀리 사라지고 없지만 지금 당도한 이 ‘오후’가 그다지 싫지 않다. 이 ‘오후’의 여유 속에서 가만히 혼자 웃고 싶다. 안타까운 것은 오후의 시각이 빠르게 주는 점이다. 손에서 모래가 빠져나가듯 시간이 줄어든다. 나는 예전보다 고독에 대한 관용이 더 많아지고, 시작보다는 끝이 갖는 모호한 슬픔에 예민해진다. 어둠이 곧 닥칠 것을 알기에 새 기억보다는 지나간 기억들을 반추하고 회고하는 일이 잦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만나다」중에서

“어때요? 살 만했나요?”
누군가 인생의 맛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테다. 혼자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겠지. 인생이란 아주 씁쓸한 것만도, 그렇다고 달콤한 것만도 아니었지만,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생의 맛이 고작 어제 남긴 식어버린 카레를 무심히 떠서 먹는 맛이라도 말이다.
---「인생의 맛에 대하여」중에서

서귀포에서 보낸 겨울이 지나고, 스무 번도 넘는 겨울이 훌쩍 흘러갔습니다. 그사이 벗들과 푼돈을 걸고 하던 주말의 포커 같은 유흥 일체도 끊고, 술과 담배, 대마초 같은 나쁜 습관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새벽에 차를 끓이고 더러는 명상도 하며 보냅니다.
노느니 장독 깬다고 책 몇 권을 읽고 날마다 몇 문장을 끼적입니다. 저술 목록이 꽤 길어진 것은 그 덕분이겠지요. 외로운 인간은 짐승 아니면 신입니다. 짐승이나 신이 교도소에 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두 번 다시 교도소에 가는 일 따위는 겪지 않았습니다. 나이들어가며 성욕과 기억력이 줄어, 이제 튤립 꽃같이 아름다운 여자를 무심히 봐 넘깁니다. 정수리께 귀밑머리가 하얗게 세고, 늙어간다는 점을 감출 수는 없습니다.

‘세 라비C’est la vie.’
그렇지요, 이게 인생인 겁니다!
---「지나온 인생에 대하여」중에서

정오가 불꽃을 짠다던 발레리의 시구 같은 젊음의 시간은 저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젊지 않다. 젊음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되고, 나는 지독한 자폐감에 감싸인 채 밤을 맞는다.(…)고적하게 보낸 그 많은 시골의 저녁들, 그 시각 나는 감히 빛을 탕진해버린 고독의 제왕이었다. 나는 떠나지도 못하고 머물지도 못하리라. 내겐 어디로 떠날 여비가 한푼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내 여비는 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다. 초여름 마당에 내리는 빛, 흰 꽃봉오리를 막 열어젖트린 수련의 꽃잎 위에 머물던 빛, 배롱나무 가지마다 만개한 붉은 꽃을 부드럽게 감싸던 늦여름의 빛, 어디에 나 하얀 화염으로 거침없이 타오르던 염천의 빛, 빛, 빛, 빛들.
---「저녁에 대하여」중에서

책 읽기 좋을 때란 딱히 정해진 바가 없다. 날이 서늘하든 따뜻하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좋은 책만 있다면 언제라도 책 읽기에 좋은 때다. 반면 걷기는 분명 맞춤한 때가 있다. 걸으려면 먼저 시간과 장소를 정해야 한다. 장대비가 쏟아지거나 폭풍이 올 때는 분명 좋지 않다. 날이 맑고 선선한 바람이 불 때나 벚꽃들이 하르르 지는 봄밤이나 은하수가 흐르는 가을밤이 걷기에 좋다.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보고, 당신이 들은 것을 나도 듣는다. 우리는 풍경이 베푸는 지복들, 빛과 어둠, 비와 바람, 나무들의 아름다움과 위엄, 공기중의 방향들, 오만 가지의 크고 작은 소리들, 계절의 순환이 일으키는 멜랑콜리한 감정들을 함께 나누며 걷기라는 행위의 공모자가 되는 것이다.
---「걷기에 대하여 2」중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겠지요. 당신의 아침은 어느덧 나의 저녁이 되겠지요. 아니, 내 아침이 당신의 저녁이 되겠지요. 당신이 아침에 들른 식당을 나는 저녁에 들르겠지요. 그렇게 서로 엇갈리겠지요. 우리는 다시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먹을까 이마를 마주대고 상의하는 일이 없을 테니까요. 헤어진다는 건 그런 겁니다. 아무리 슬퍼도 나는 혼자 제주항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고 우도에 건너가지는 않겠어요.
---「작별 인사에 대하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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