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0년 05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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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40쪽 | 140*210*30mm |
ISBN13 | 9788937490279 |
ISBN10 | 8937490277 |
발행일 | 2010년 05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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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40쪽 | 140*210*30mm |
ISBN13 | 9788937490279 |
ISBN10 | 8937490277 |
1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2 샹젤리제 부티크 3 먼 친척들 4 사무실에서의 밀회 5 푸아예 레스토랑 6 퓌순의 눈물 7 멜하메트 아파트 8 최초의 터키산 과일 사이다 9 F 10 도시의 불빛과 행복 11 희생절 12 입맞춤 13 사랑, 용기, 현대성 14 이스탄불의 거리, 다리, 비탈길, 광장 15 언짢은 인류학적 사실 몇 가지 16 질투 17 이제 내 인생은 당신과 결부되어 있어 18 벨크스 19 장례식에서 20 퓌순의 두 가지 조건 21 아버지의 이야기 : 진주 귀걸이 22 라흐미 씨의 손 23 침묵 24 약혼식 25 기다림의 고통 26 해부도 : 사랑의 고통 27 몸을 뒤로 젖히지 마, 떨어지겠어 28 물건들이 주는 위로 29 그녀를 생각하지 않는 순간은 없었다 30 퓌순은 이제 여기 살지 않아요 31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거리들 32 퓌순인 줄 알았던 그림자와 환영 33 저속한 소일거리 34 우주의 개처럼 35 내 수집품의 첫 씨앗 36 사랑의 고통을 달래 줄 작은 희망 37 빈집 38 여름의 끝을 장식하는 파티 39 고백 40 해안 저택이 가져다준 위안 41 배영 42 가을의 우울 43 춥고 외로운 11월 44 파티흐 호텔 45 울루 산에서의 휴가 46 약혼녀를 두고 가 버리는 게 정상이야? 47 아버지의 죽음 48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해지는 거야 49 그녀에게 청혼할 참이었다 50 이번이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는 거야 51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이 있는 것만이 행복이다 52 삶과 고통에 대한 영화는 진솔해야 돼 |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세계 문학과 다른 이질감을 느끼게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친근감을 주곤 한다. 아무래도 오르한 파묵의 작품에서 펼쳐지는 공간적 배경이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이라는 점 때문인 것 같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이자 동서양 문화의 충돌지점으로서의 이스탄불은 오르한 파묵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내이름은 빨강]에서 오스만 투르크 족의 전통 설화와 페르시안 문학과 서구문명과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문화적 갈등을 로맨스와 추리로 풀어내는 솜씨에 반해 오르한 파묵의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순수박물관》은 오르한 파묵이 노벨상 수상 이후 첫 발표한 책으로 작품을 이루고 있는 주요 뼈대는 ‘남녀간의 사랑’이야기이지만, 남녀간의 사랑을 통해 서구 성문화와 충돌하게 된 이슬람 사회의 혼란을 작가 특유의 서사로 들려주고 있다.
1975년, 이스탄불에서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남자 케말은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재원이다. 아버지의 회사에서 본부장으로 일하면서 스무 살이나 서른 살 정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부하직원으로 둔 케말은 상류층의 신분으로 ‘공무원의 딸’인 완벽한 상류여자 시벨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시벨은 그 자체로 기품있고 상류층에 어울리는 우아한 여자로 그려진다. 가난한 여성이 결혼에 대한 선택폭이 좁은데다가 가난한 노동자계급의 여성들의 불행들을 잘 알고 있는 케말은 혼전 성관계에 대하여 보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 혼전 성관계를 맺는 것은 곧 결혼이라는 의미이기에 시벨과의 결혼을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는 케말은 부와 명예, 아름다운 약혼자까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한다. 적어도 시벨에게 가방선물을 하기 위해 들린 ‘세나이의 가게’에서 퓌순을 만나게 전까지는 그랬다. 가게에서 먼 친척뻘인 어린 퓌순과 우연히 재회 한 후, 어머니가 투자목적으로 사놓았던 멜하메트 아파트를 둘만의 은밀한 밀회장소로 사용한다. 둘의 사랑이 격정에 이를수록 퓌순과 케말의 사랑이 비극을 암시하는 이야기들이 시작된다. 세나이의 가게에 자주 들렸던 이스탄불의 한 여성이 가난하단 이유로 남성에게 버림받은 이야기라든지 케말의 돈많은 친구 자임의 바람둥이 기질과 쌍벽을 이루는 시벨의 여자친구들은 서양의 개방적인 성문화에 열렬한 지지를 보내면서도 혼전 순결을 여성에게 강요하는 1970년대의 터키의 성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혼전 성관계를 하였다는 이유로 평생 결혼하지 못한 채 수많은 남자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여인의 불행과 아버지가 젊은 날 너무 사랑했던 애인의 비극적인 죽음은 모두 '퓌순'의 미래를 예견해주는 장치이다. 시벨과의 아름다운, 상류층다운 사치스러운 약혼식이 끝난 후 퓌순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케말에게서 퓌순의 사랑을 듣게 된 시벨도 떠나버린다.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
그러나, 퓌순을 다시 만났을때는 이미 퓌순은 결혼한 상태였고 케말은 퓌순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퓌순의 영화제작자라는 명분으로 퓌순곁을 맴돈다. 8년을 같은 자리에 앉아 퓌순만을 해바라기 하며 퓌순이 버린 담배꽁초까지 소중하게 보관하는 케말. 이렇게 해서 수집된 물건들은 그대로 순수박물관에 전시된다.
이 작품은 떠나버린 퓌순을 위해서 퓌순과 함께 한 모든 물건들을 '멜하메트' 아파트를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전시 보관하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케말이 죽어가면서 부탁한 퓌순의 사랑이야기를 작가에게 의뢰하였는데 이 소설가의 이름이 바로 '오르한 파묵'이다.(물론 픽션) 이슬람 문화가 지배적인 터키에서 서구의 자유연애 사상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보수적인 터키에서 겪는 문화충돌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사랑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라는 계급의 소유물로 변질되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불행한 터키여성들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난하고 어린 퓌순을 첫 눈에 반해 애인으로 삼고는 시벨과 약혼하기 까지의 케말은 사랑에 대하여 보편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성으로서의 퓌순은 가난한 집안의 여성이 혼전 성관계로 인한 사회적 부담을 끝까지 떨쳐내지 못하는 것으로 불행해진다. 70년대의 터키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작품에서 보여지는 젊은 세대들이 혼전 성관계에 대한 인식을 케말과 퓌순의 사랑이야기와 직조하여 짜낸 박물관은 욕망과 문화의 혼종성이 혼재되어 있는 시대에 한 여자를 순수하게 사랑하고 싶었던 한 남자의 지독한 집착이 만들어낸 '순수의 공간'이다. 한 여자를 향한 남자의 순수한 사랑이 살아 숨쉬는 곳, 그곳이 바로 순수박물관이다.
사랑은 때로 절망적인 균열과 상처를 기꺼이 자처하게 만든다. 당사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 상처들은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상처가 더 깊은 사랑을 가늠하는 잣대는 되지 못한다. 우리는 상처를 기꺼이 선택하며 다가올 허무에도 불구하고, 열정을 다해 삶을 밀고 나가는 자들을 문학 속에서 종종 목격한 바 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여인에게 다가서기 위해서 삶을 탕진한 '위대한' 개츠비와 유령이 되어서라도 연인에게 다가서고자 했던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 같은 자들. 하지만 그들의 사랑과 거기에 연루된 어리석은 열정을 목도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얻는 것은 열정이 아니라 낭만에 대한 환상을 품으면서도 안정된 사랑을 갈구하는데서 파생되는 기묘한 불안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쉽게도 문학 속에 나타난 불꽃 같은 사랑은 우리의 환상을 자극하면서 어떤 상징으로만 머문다. 연인을 위해 미친듯이 부를 쌓는 게츠비의 모습과 목숨을 건 사랑을 했던 히스클리프의 모습은 오늘날 TV 드라마 안에서 오글거리는 대사를 남발하며 순정을 간직한 '재벌 2세 훈남'으로 우스꽝스럽게 변모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환상을 품지만, 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현실에서 그렇지 못한 우리들을 대리만족시키는 순간의 유희라는 사실을. 드라마는 곧 끝나고, 배경과 인물의 배치만 살짝 바꾼 또다른 환상상품이 기다린다. 그것을 소비하면서, 우리는 서서히 시간을 죽인다. 그리고 불안은 더욱 단단해진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의 신작 <순수박물관>은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이다. 1,2권 합쳐서 800페이지를 훌쩍 넘어가는 이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사랑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츠비와 히스클리프의 그것처럼, 짧은 기간의 사랑이 아니다. 무려 30년이 넘는 시간을 두고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는 슬프면서도 발랄하다.
재벌 2세이며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청년 카멜은 연인 시벨과 약혼을 앞두고 들떠 있다. 어지러운 터키 국내 정치상황 속에서도 사업은 번창하고 있으며, 곧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게 된다. 밤마다 친구들과 비싼 술을 마시며 노닥거리는 이스탄불의 부르주아 카멜에게 고민 따위는 없다. 수도 이스탄불은 민족주의자와 분리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뒤섞여 연일 서로에게 테러를 일삼고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혼돈 그 자체이지만 상류층 유학파들로 구성된 카멜과 그의 친구들은 연일 호화로운 파티에 열중한다.
그러던 어느날 카멜은 연인 시벨에게 줄 핸드백을 사러 가게에 갔다가 18세의 사촌동생 퓌순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곧 서로에게 끌리고, 이 불가능해보이는 사랑은 마침내 사건을 만들게 된다. 그렇다. 그것은 사고로 보이는 사건이다. 사고가 '해결'과 '은폐'를 지향하는데 반해서 사건은 그것에 대한 나름의 '반응'과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카멜은 할아버지가 남겨준 멜하메트의 아파트에서 퓌순과 날마다 만나 섹스에 몰입한다.
보스포로스 해협을 가운데 두고 유럽과 연결되어 있는 터키의 70년대는, 그러니까 소설의 주인공 카멜처럼 이중적인 위선이 지배했다. 유럽의 자유분방함이 유입되고 있었지만 이슬람 사회의 전통은 얼룩처럼 남아 있었고, 대다수 젊은이들은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를 선호했지만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함을 제어했다. 카멜과 같이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자들은 극소수였으며 빈부격차는 심각했다. 무엇보다도 유럽과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시행하기에는,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르메니아 인과 투르크인들의 분리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서 군부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군부 독재와 혼란스러운 정치상황, 세대 간의 인식 차이, 빈부격차, 부폐한 관리들. 1970년대말 터키는 그 시기의 우리처럼 가난과 부폐와 억압과 저항이 뒤섞인 혼란의 도가니와도 같았다.
<순수박물관>에서 1970년대 터키의 정치 상황은 모두 몇 줄의 언급으로만 그친다. 카멜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적 입장이나 국가와 사회가 아니라 오직 사랑이었으니까. 44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멜하메트의 아파트에서 카멜과 사랑을 나누던 퓌순은 카멜의 약혼식 다음날 사라지고 만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진보적이며 똑똑한 아내와 젊고 섹시한 정부를 동시에 가지려던 카멜은 퓌순이 실종된 후에야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다. 339일 동안 퓌순을 찾아 헤매던 카멜은 마침내 퓌순을 만나지만 339일 동안 상황은 바뀌어 버렸다. 퓌순은 22세의 젊은 시나리오 작가와 이미 결혼한 상태였던 것이다. 퓌순 때문에 시벨과 파혼까지 감행했던 카멜은 낙담하지만 결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 카멜을 향해 약혼녀 시벨은 냉소적으로 말한다.
"우리 관계에서처럼, 사랑은 끼리끼리의 예술이야. 부유한 처녀가 단지 잘생겼다고 관리인 아흐메트 씨나 건설 노동자 하산 씨를 사랑해서 결혼하는 것을 터키 영화 말고 다른 데서 본 적 있어?"
"나는 터키 영화를 믿어."
시벨과의 파혼 이후로 카멜은 날마다 네시베 고모(퓌순의 어머니)댁으로 찾아나서 저녁을 먹고 그 집 식구들과 시간을 보낸다. 무려 2864일 동안! 유부녀가 된 퓌순은 여전히 냉담하고 동네 사람들은 수근거리지만 카멜은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핑계를 만들며 고모댁에서 저녁을 함께 먹는다. 퓌순에게 다가서기 위해서 퓌순의 남편 페리둔의 시나리오로 만들 영화 제작비를 지원하고 네시베 고모댁의 생활비를 대주는 등 카멜은 2864일동안 거의 그 집 식구가 되어간다. 이 시간 동안 카멜은 퓌순과 관련된 물건들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퓌순이 버린 담배꽁초, 수건, 귀걸이, 빈 향수통, 퓌순이 그린 그림, 단추, 립스틱, 그녀와 봤던 영화의 포스터 등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이 카멜의 수집대상이 된다. 카멜은 그렇게 모은 물건들을 그들이 44일 동안 사랑을 나누었던 멜하메트의 빈 아파트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다. 그리고 퓌순이 보고 싶을 때면 아파트의 침대에 누워 수집품들 사이에서 그녀의 체취를 느끼며 안정을 찾는다.
부르주아 친구들과 멀어지고, 마흔이 넘어서도 카멜의 열정은 온통 퓌순에게만 머문다. 퓌순의 남편 페리둔이 영화계에서 만난 여배우 파파트야와 불륜에 빠지면서 상황은 다시 반전된다. 퓌순이 마침내 페리둔과 이혼한 것이다. 카멜은 다시 퓌순을 안으며 다시 얻은 연인을 결코 놓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다. 그러나, 운명은 카멜의 오랜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다. 퓌순과 함께 약혼식을 대신한 여행을 떠난 카멜은 여행지에서 퓌순을 잃고 만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카멜은 홀로 여행을 떠난다. 페테르스부르크, 베를린, 파리, 로마, 런던, 마드라스 등 무려 273군데의 박물관을 돌아보는 '박물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카멜은 자신만의 박물관을 건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설가 '오르한 파묵'씨에게 자신의 31살(퓌순을 만난 나이)이후 30여년의 삶을 털어놓으면서 자신이 만든 박물관에 대해 기록해줄 것을 부탁한다.
"나의 박물관에서는, 전시실 어디에서도 모든 수집품들과 진열장들, 그 모든 것이 보인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오르한 씨. 모든 곳에서 동시에 모든 물건들, 그러니까 내 모든 이야기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잊을 겁니다. 삶에서 가장 커다란 위안은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본능으로 만들어지고 정렬된 시적인 박물관에서 사랑하는 옛날 물건들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이 사라졌기 때문에 위안을 얻는 겁니다." (2권, 386쪽)
소설가 오르한 파묵씨는 "객관적인 기록"을 위해서 카멜의 주변 친구들을 인터뷰하려는 계획을 포기한다. 사랑에 있어서 객관적인 사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케말의 사랑은, 사고가 아닌 한 사람이 자처해서 휘말린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주관적인 경험을, 어긋날지라도 밀고 나가는 열정의 다른 이름이다. 누군가는 케말의 행위들을, 단순한 집착이라고 폄하하리라.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맹목적인 집착이며 정신병적인 수집증일 뿐이라고. 그러나 케말의 사랑은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세상의 가장 큰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머무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는 용기는 흔하지 않다. 그 말은 영화 속의 대사나 고객의 주머니를 노린 광고카피의 한 줄로 소비될 뿐이다. 케말이 버린 가장 큰 것은 돈이나 열정이 아니라, 바로 시간이다. 그러나 케말은 그것을 이렇게 기억한다.
내가 살았던 삶은, '시간'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금이라는 순간들이 결합한 선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은 무척 고통스럽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순간들을 결합시켜 선을 만들거나, 우리 박물관에서처럼 순간들을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을 결합시켜 선을 만들면, 결국 선은 끝에 다다르고 죽음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사람들은나이가 들수록, 선 그 자체에 별로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깨닫고 슬퍼한다. (2권 36쪽)
순간에 충실하기보다는 '선'으로 결합된 시간을 계산하고 낭비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자들이 가득한 세계에서, 사랑은 끝이 예정된 삶 속에서의 유희로 그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인간에게 감정마저 빠르게 소모하고 빨리 잊기를 종용한다. 기억이 강렬할수록 삶은 느려지고, 비효율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빠르게 잊고 빠르게 정리하는'쿨'한 자세를 흉내내면서 우리는 중요한 것들을 상실하는데 익숙해지며 늙어간다. 기억하지 않는다면, 사랑은 소비와 유희로 전락하고 만다.
세속의 관점에서는 케말의 삶이 무모한 낭비와 집착으로 점철된 기이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열정과 기억이 없었다면 삶은 건너기 어려운 한낱 장애물일 따름이다. 케말의 박물관에 전시될 마지막 물품은 오르한 파묵씨가 입수한 34년전 퓌순의 사진이다.
"케말 씨, 이 사진을 박물관에 전시하세요."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에 나오는 나의 마지막 말은 이것입니다. 오르한 씨, 잊지 말아주세요."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퓌순의 사진에 사랑을 다해 입을 맞추고는, 재킷의 가슴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나를 보며 승리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아주 행복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2권, 403쪽)
맨하튼 섬의 불빛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던 게츠비처럼, 우리는 불멸의 사랑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인물을 알게 되었다. 이스탄불의 케말이라는 사내를 말이다. 사랑을 믿는다면, 그리고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기억하라. 기억하는 모든 것은 사랑이 될지니.
덧붙여 이 매혹적인 소설을 읽고도 집착이냐 질병이냐의 관점에서 케말의 사랑을 의심하는 자들은 부디 깔끔하고 안정적이며 낭만적이면서도 상처 없는 사랑을 계속 갈구하며 늙어가길 권한다.
케말 씨의 박물관은 실제로 올해 8월, 이스탄불에서 개장한다. 소설 속에는 그 박불관의 약도와 입장권이 들어있다. 참고하시길.
터키어로 된, 터키가 배경이 된 소설은 처음이다.
옮긴이의 번역 솜씨가 매우 훌륭하다는 생각도 했다.
재미있다는 말로 평을 하기가 미안할 정도다.
<본격소설>이란 일본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정말 깊고도 끈질긴, 질병과도 같은 사랑을 표현한 소설이란 생각을 했었다. <순수박물관>은 그 소설 보다 더 미쳤다.
난 아직 사랑의 감정을 그렇게 길게 끝없이 표현한 소설은 보지 못했다.
2권이나 되는 두꺼운 책.
한 호흡도 그냥 두지 않고 사랑을 파헤치고 노래하고 아파한다.
한 여자를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매고,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으며, 30년 동안 그리워하고 추모하고 산 남자의 이야기.
숫자의 나열이 말해주듯, 이 남자의 시간은 오직 그녀를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찾는 것에만 의미가 있었다.
우연히 만난 한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헤어지게 되고, 찾아 헤매고, 드디어 찾았지만 이미 결혼을 한 몸이었고, 그래도 못보 는 걸 견딜 수 없어 8년을 그 집을 드나들고, 드디어 결혼을 할 수 있게 된 그 날, 사랑을 나누고 난 다음날, 교통사고로 그녀를 잃는다.
그녀를 잊을 수 없고,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박물관을 찾고, 그녀에 관한 모든 걸 전시할 박물관을 세울 결심을 한다. 박물관의 도록이 될 그들의 사랑이야길 써줄 소설가를 찾아 글을 부탁하고 그 이야기가 바로 <순수박물관>이 된다.
이정도 이면 그녀는 그에게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