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힘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병신 취급을 당하는 것도 좋았다. 다 참을 수 있었고, 실제로도 참아왔다. 그는 남과 다른 자였다. 남과 다르다는 죄를 지은 자였다. 세상은 그가 걸음마를 할 때부터 이미 그를 배척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마침내 그가 제 발로 집 밖에 나가는 순간 배척이 시작되었다. 박사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운명이라는 게 그런 거라면 수긍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돌직구’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건 수긍할 수도 없었고 참을 수도 없었다. --- p.38
‘그러니까 힘내서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다면 싸울 필요도 없지만 이길 수 없다면 싸워야 하는 거야.’
‘그것 참 끝내주는 헛소리네요. 아저씨,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헛소리하는 데 아주 대단한 재능이 있군요.’
섀클턴은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박사는 그의 헛소리를 되새겨보았다. 이길 수 있다면 싸울 필요도 없지만 이길 수 없다면 싸워야 하는 거야. 신기하게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그 헛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봐도 헛소리인데도 그랬다. 어쩌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서 마음에 쏙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 p.60
“그렇겠지. 비난한 게 아니니까. 난 널 칭찬한 거야. 어니, 너는 내가 만나본 가장 훌륭한 바보야. 너는 실패할 거야. 실패함으로써 성공할 거야. 똑똑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보이기 때문에 실패하고, 그렇게 해서 비로소 성공할 거야. 세상은 알아주지 않겠지만, 결단코 알아주지 않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너는 너 자신이 성공한 걸 알 테니까. 그리고 나도.” --- p.105
내 스타일이란 게 별건 아니고 정신 나간 놈들이 등장해서 되는대로 사고를 치고 헛소리나 찍찍 내뱉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엉터리이고 헛소리로 일관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도 내게 문학상을 안겨준 심사위원들은 그런 스타일을 신인 작가의 패기라고 좋게 평가해주었고 독자들의 반응도 괜찮았다. 내 유일무이한 장점이었던 것인데 그게 망가져버린 것이다. 문학 비슷한 거라도 써보겠다는 생각에 초심을 잃고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더니 내 글은 무척 진지한 헛소리가 되고 말았다. 진지한 헛소리는 헛소리가 될 수 없었다. 재미도 없고 미학적 가치도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다. --- p.145~146
추웠다. 텐트에 방한복에 침낭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배터리 달린 전기스토브가 있었지만 그래도 추웠다. 최저기온이 영하 43도까지 떨어졌다. 내륙으로 갈수록 더 추워진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겪어보니 이건 사람이 견딜 수 있는 추위가 아니었다. 용변 보러 잠깐만 밖에 나갔다 와도 머리카락이며 눈썹에 얼음이 맺혔다. 손발이 시려서 이러다 가죽이 벗겨지겠다 싶을 정도로 손발을 비비고는 했다. 백 년 전의 탐험가들은 도대체 어떻게 남극을 탐험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다 슈퍼맨이었던 걸까. --- p.206
“굴복할까요?”
“내가 먼저 물었잖아.”
“먼저 물었으니까 대답도 먼저 해보세요.”
“그건 매너가 아니지.”
“누가 영국인 아니랄까 봐 매너를 따지시네요.”
알맹이 없는 썰렁한 대화를 나눈 다음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웃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킥킥대며 조용히 웃다가 이윽고 어깨를 흔들고 온몸으로 구르면서 웃어댔다.
우리는 왜 웃었을까. 그때도 알 수 없었고,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미쳐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우리는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대자연의 위엄이 두려웠고 우리의 나약함이 절망스러웠지만 우리는 근본이 미친놈들이라 웃었다. --- p.215~216
“누가 말을 하고 있는 거지?”
“펭귄입니다. 하늘을 나는 펭귄을 보고 제가 총을 쐈거든요. 맞지는 않았지만 놀란 모양이에요.”
“하늘을 나는 펭귄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우리 펭귄들은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내가 대답한 게 아니었다. 제3자의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어느새 펭귄들이 땅에 내려와 있었다. 얼른 봐도 천 마리는 될 듯한 펭귄들이 설원에 우르르 몰려 있는 모습은 귀여우면서도 장엄했다. --- p.249
“발가락을 자른 건가?”
“예, 썩은 부위는 다 잘랐습니다. 의논도 하지 않고 일을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자네가 나를 살린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박사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나는 박사의 발에 소독약을 퍼붓다시피 한 다음 거즈로 감싸고 붕대를 친친 감았다. 그리고 상처가 썩지 않게 해달라고 섀클턴 경에게 기도했다. --- p.267
어쨌든 우리의 사랑은 끝났다. 다 끝났기에 나는 비로소 말할 수 있었다.
“미안해. 네가 반드시 들어야 하는 말, 누군가는 반드시 들려줘야 하는 말을 단 한마디라도 찾고 싶었는데 찾지 못했어. 어쩌면 그런 말은 남이 아니라 너 스스로 찾아야 했던 건지도 모르겠어.”
혜진은 울면서 말했다.
“바보. 그런 말은 남이 찾아줘야 하는 거야. 다른 말은 자기가 찾아서 자기 스스로 들려줘도 되지만 그 말만은 남이 찾아서 남이 들려줘야 하는 거야.”
“어쩜 그런지도. 그렇다면 나를 위한 말은 네가 찾아주지 않을래? 너를 위한 말은 내가 찾아줄 테니까. 어쩌면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한번 시작해보지 않을래?”
혜진은 웃으면서 말했다.
“탐험을 하자는 거지?”
“그래, 탐험이야.”
나는 일곱 빛깔 무지개 끈을 혜진에게 내밀었다.
--- p.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