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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一. 조선 왕실 사람들의 생로병사 1.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이지 않았다 _ 소현세자 2. 무지에서 비롯된 조선 최악의 의료사고 _ 효종 3. 인현왕후 죽음의 진범 _ 인현왕후 4.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 _ 숙종 5. 대머리 임금님 회춘하다 _ 영조 6. 젊은 대비의 단식 투쟁 _ 선의왕후 7. 마마, 갓 태어난 원자가 또 사망하였습니다 _ 여러 왕비들 8. 소박맞은 왕비, 피를 토하며 죽다 _ 정성왕후 9. 임금의 몸에 바글거린 기생충 _ 영조 二 . 조선 왕실 사람들의 희로애락 10. 왕비를 내쫓기 위해 없는 병을 지어내다 _ 장렬왕후 11. 목숨 바쳐 구한 아들 _ 명성왕후 12. 경종 성불구설의 진실 _ 경종 13. 시아버지가 선사한 화병 _ 혜경궁, 명성황후 14. 알고 보니 임금이 정신질환자 _ 인조 15. 장희빈에겐 지병이 있었다 _ 장희빈 16. 왕실의 기형아 _ 명성황후 17. 상상 임신의 전말 _ 효의왕후 18. 뚱뚱보 세자의 슬픔 _ 사도세자 三. 조선 의료인들의 눈부신 대활약 19. 왕실 최고의 외과수술 사건 _ 백광현 20. 역대 최고 포상을 받은 어의 _ 유상 21. 일본 침구학에 펼쳐진 학익진법 _ 김덕방 22. 발 없는 조선 침법, 유럽을 누리다 _ 조선 침범 23.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조선 의학계의 이단아 _ 이공윤 24. 왕실의 보약, 경옥고를 대령하라 _ 경옥고 25. 숙종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뜸 _ 중완혈 수구사 26. 꼬레는 의학이 제일 우수한 나라 _ 동의보감과 꼬레 의학 27. 침략자가 탐냈던 조선의 귀한 약재 _ 죽력 四. 조선 왕실 사람들이 향유한 의료문화 28. 죽 쒀서 왕 준다 _ 타락죽, 녹두죽, 의이죽 29. 왕실의 티 테라피 _ 인삼차, 송절차, 마통차 30. 바쁜 임금이 즐긴 틈새 웰빙 건강법 _ 온천욕 31. 전하의 네일 케어 _ 황납고와 매핵인 32. 왕실 가족을 위한 내의원표 미용크림 _ 육향고 33. 왕이 중독되었다 _ 감두탕과 해독약재 34. 왕실의 출산과 산후조리 비법 _ 달생산, 불수산, 궁귀탕 35. 루이 14세의 약초원과 캐나다 인삼 러시 _ 고려인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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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는 그들을 바라본 정치라는 안경을 벗어던지고자 한다. 역사의 인물들을 그냥 한 인간으로서 바라보고자 한다. 정치적인 사건을 이야기할 때에는 사건이 우선적으로 중요하고 등장인물은 부수적일 것이다. 하지만 한의학을 연구한 우리 9명의 저자들은 이와는 다른 시각을 가졌다. 오롯이 한 인간으로서의 왕실 인물을 보고자 했고 그들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사건은 그저 그들을 잘 이해하기 위한 배경이 될 뿐이었다.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 그들이 겪어야 했던 인생의 파고(波高)에 대해 좀 더 애정 어린 시선을 가지고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이 책을 저술한 우리들의 관점이다. 「프롤로그」--- p.12
소현세자의 죽음은 당시 어의의 진단처럼 학질로 인한 것도 아니었고, 세간의 소문처럼 독살로 인한 것도 아니었다. 소현세자는 만성화된 간 기능 저하로 인해 지속적인 어지럼증, 만성피로 등의 전신 증상을 호소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만성 간 기능 저하는 혈액순환 장애로 인한 혈관염을 가져올 수 있다. 소현세자의 우측 하지의 피부 병변역시 혈관염이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까맣게 타버린 시신의 얼굴과 사망 당시의 출혈 역시, 간 기능 저하와의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소현세자의 전신적인 기력 저하는, 죽기 직전 기침 및 호흡곤란 증상을 보이는 폐렴을 유발하였다. 폐렴으로 고통 받던 소현세자는 결국 사망하게 되었다. 간 기능 저하와 함께 온 폐렴 증상의 악화가 소현세자의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왕위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미움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조가 아들을 죽일 만큼 비정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타국에서의 고된 인질생활에서 얻게 된 심적 고통과 질병으로 인해, 소현세자는 짧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죽이지 않았다 --- p. 22~23 임금의 상태를 살펴본 신가귀는 조심스럽게 대답하였다. “종기의 독이 얼굴로 퍼져 농이 생겼으니 반드시 침으로 나쁜 피를 제거해야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듣고 있던 유후성이 반대하였다. “종기의 상태가 심각하니 경솔하게 침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효종은 1년 전 신가귀에게 침을 맞은 후 빠른 차도를 겪어봤기 때문에, 이번에도 침 치료로 금방 회복할 것이라 여겨 유후성의 말을 무시하고 신가귀에게 침을 놓으라 명하였다. (중략) ‘이 피고름만 다 빠지면 임금이 병석에서 완전히 회복하리라.’ 그러나 모두의 예측은 빗나갔다. 출혈이 계속 되어 피가 샘솟듯이 콸콸 쏟아졌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급히 혈갈을 가루 내어 들이라!” “왜 이리 늦느냐. 혈갈을 많이! 최대한 빨리 들이라!” 응급 상황이었다. 한시가 급했다. 혈갈은 출혈을 멈추는 데 효능이 있는 기린갈나무의 진이다. 가루 낸 혈갈을 출혈 부위에 발랐으나 이미 종기의 독이 흉부까지 퍼진 상태라 효용이 없었다. 「무지에서 비롯된 조선 최악의 의료사고」 --- p.29. “뭐라? 또 새로 태어난 왕자가 사망하였다고? 벌써 몇 번째 일이란 말인가. 어찌 이런 일이 계속 되는가!” 철종은 총 11명의 자녀를 낳게 되는데 어찌된 일인지 단 한 명만 제외하고 모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게 된다.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 소생 왕자 1명, 귀인 박씨 소생 왕자 1명, 귀인 조씨 소생 왕자 2명, 궁인 이씨 소생 왕자 1명, 숙의 방씨 소생 공주 2명, 숙의 김씨 소생 공주 1명, 궁인 박씨 소생 공주 1명, 궁인 이씨 소생 공주 1명 등 총 10명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 철종의 살아남은 자식은 숙의 범씨 소생 공주인 영혜옹주뿐이었다. 그러나 장성했던 유일한 딸인 영혜옹주도 박영효에게 출가한 지 3개월 만에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죽고 말았다. 「마마, 갓 태어난 원자가 또 사망하였습니다」 --- p.74~75 영조 32년(1756년) 이후엔 영조가 회충을 토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 된다. 이렇게 되자 영조도 어느 정도 포기하고 회충과의 공생(共生)을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른다. 영조 35년(1759년) 1월 21일 내의원 제조 이창수가 여느 때와 같이 회충의 증상에 대해 문안하자 영조가 대답한다. “회충이 나오지는 않았는데 목구멍에 걸려 있는 느낌이다. 회충을 사람 안에 있는 용이라고 이르지 않느냐?”라고 이야기하며 몸속에 있는 회충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영조는 이후 뱃속 가득히 회충이 있음을 느끼며 수차례 더 회충을 토하였다. 처음 회충을 토할 때는 많이 놀랐던 영조가 이 시기 쯤에는 회충을 토하면 가슴 속이 뻥 뚫린 것 같다고 좋아하기도 하고, 회충이 목구멍에 걸려 있을 때 내관에게 빼내게 하면 내관이 놀라서 물러나는 것을 보며 웃기도 한다. 영조 37년(1761년) 12월 14일 영조가 회충을 토하면서 말하길, “방금 전 목구멍이 가려워 회충이 나오니 가슴이 뚫린 것 같다. 회충은 사람과 함께 사는 인룡이니 천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임금의 몸에 바글거린 회충」 --- p. 95~96 바깥에 오래 서 있기조차 힘든 매서운 한겨울이었다. 하얀 속옷 차림의 왕대비의 모습은 비장함 그 자체였다. 북과 징의 울음소리가 굿의 시작을 알렸다. 작두 위에서 춤을 추는 막례의 손짓에 따라 궁녀가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퍼서 왕대비의 몸에 부었다. 입술이 파래지고 턱이 덜덜 떨렸다. 왕대비는 두 손을 모아 정성스럽게 기도를 드렸다. (중략) 온몸의 근육이 칼에 잘게 찢겨 나가는 고통이었다. 흐려져가는 의식의 끝에 주상의 얼굴이 보였다. 명성왕후는 병석에 있는 아들을 생각하니 정신을 놓을 수가 없었다. “주상! 이 어미가 주상을 살릴 수 있으니 걱정마세요. 당장은 고통이 심하겠지만 조금만 기다리세요. 힘든 시련도 이제 거의 끝나갑니다.” 손가락과 발가락의 감각이 점점 무뎌져갔다. 이승인지 저승인지 알길 없는 아득함만이 남았다. 굿은 무사히 마쳤지만, 왕대비는 끝내 의식을 잃고 혼절하였다. 「목숨 바쳐 구한 아들」--- p.116 무사히 원자를 출산한 명성황후는 미역국과 밥을 잘 들고 소화도 잘 시키고 있었다. 결혼 5년 만에 왕자를 출산하게 된 명성황후는 얼마나 기뻤을까.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해산의 고통이 조금씩 잊혀져가고 산후조리에 힘쓰던 황후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져온다. “뭐라? 다시 말해보거라. 왕자가 해시에 어떻게 되었다고?” 왕비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힌다. 애통하게도 명성황후의 첫 번째 원자는 태어난 지 5일 만에 항문이 막혀 변을 보지 못해 사망하게 된 것이다. “내 아들 원자가 죽다니. 어떻게 얻은 원자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이는 필시 산삼 때문이다. 원통하고 또 원통하구나.” 왕자의 죽음에 대해 명성황후는 원자에게 달여 준 약에 산삼을 많이 넣게 한 흥선대원군을 의심하게 된다. 「왕실의 기형아」--- p.163~164 이후 사도세자의 뚱뚱함에 관련한 영조의 말들은 아들에 대한 걱정보다는 흉을 보거나 나무라는 모습이 많이 비춰진다. 영조 20년(1744년) 4월 14일에는 “세자는 식사량이 너무 많고 식탐을 억제하지 못해 뚱뚱함이 심해지고 배가 나와 열 살의 아이 같지 않다.”고 하였고, 5월 16일에는 “세자가 뚱뚱해서 더위 견디는 걸 힘들어 하고 걸음걸이 역시 심하게 더디고 늦으니 이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날 뿐이다.”고 하였다. 5월 28일에는 “음식을 좋아해서 정말 답답하다. 식탐을 조절하지 않으니 날로 살찔 뿐이다.”, 7월 12일에는 “세자의 은진(?疹, 두드러기) 증상은 오랜 시간 누적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이는 분명히 뚱뚱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고 하였다. 7월 28일, 세자의 다리에 부스럼이 생겼을 때 “서연(書筵)할 때 다리의 병이 있으면 꿇어 앉아 있기 어렵고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대개 이는 뚱뚱하여 습(濕)이 같이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9월 15일에는 “글을 이해하는 이치는 자못 뛰어난데 뚱뚱해서 얼굴 생김새가 별로라 답답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영조는 세자가 앓고 있는 피부병의 원인을 뚱뚱함에서 찾았으며, 세자의 총명함에 대해서만 언급해도 될 텐데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뚱뚱한 외모까지 굳이 언급해 지적한다. 이렇게 『승정원일기』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영조가 사도세자를 미워하게 된 계기가 사도세자의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에서 비롯되었다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뚱뚱보 세자의 슬픔」 --- p.184~185. 18. 덕승(Isaac Titzing)은 1779년부터 1794년까지 일본, 인도네시아, 인도에서 근무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책임자이자 의사였다. 그후 1795년 청의 황제 건륭의 연회에 네덜란드 대사로 참석한 서양인으로 오늘날 일본과 중국에서는 지명도가 있지만,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의학의 세계화에 가장 기여한 일등 공신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16세기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에 전해진 김덕방의 조선 침법을 18세기에 일본에서 직접 배우고, 김덕방의 조선 침법이 담긴 『침구극비초』와 경혈의 위치를 새긴 혈자리 동인상을 유럽으로 가져왔고, 『침구극비초』 번역 필사본을 직접 작성하였다. 또 한글을 유럽에 최초로 소개했으며, 조선의 역사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일본 역사가, 하야시 시헤이가 1785년에 발간한 『삼국통람도설(三國通覽圖說)』과 『삼국접양지도(三國接壤之圖)』를 유럽에 소개한 인물이다. 「발 없는 조선 침법, 유럽을 누비다」 --- p. 228~229 숙종은 집권 46년 동안 무쇠를 휘두르듯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 그에 반해 온갖 병에 시달린 고달팠던 몸을 갖고 있었다. 성격적으로 꼼꼼했고 급했으며 한번 정해지면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겼다. 적장자로 왕의 자리에 올랐던 숙종이 온몸으로 짊어진 업무 스트레스는, 불규칙한 식사와 잠자리 때문에 위장병과 화병으로 이어지고 해수병이 일생을 따라다니게 되었다. 또 숙종은 다발성 관절통과 통풍(痛風)을 해수병만큼 자주 앓으며 고생했다. 그러나 숙종의 장기 집권에는 숨겨진 비법이 있었으니, 바로 뜸 100장을 뜨는 중완혈 수구사였다. 고달팠던 몸과 급한 성격 때문에 숙종은 늘 아팠지만 중완혈 수구사라는 맞춤 치료법을 찾아낸 후 장기간 집권할 수 있었다. 「숙종의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뜸」 --- p.264 한양과의 거리 1,660리. 고요했던 심양관(瀋陽館)에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어닥쳤다. 풍증(風症)이었다! 그것도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만주족의 수장, 청나라 황제의 풍증이었다. 황제가 호소한 증상은 극심한 어지러움이었고,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닌 뇌졸중의 전조증상이었다. 한양에서는 급히 침의와 약의가 채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 청인이 꼭 구해야만 했던 것은 황제를 다시 일어나게 만들 치료약이었다. 청나라 황실 의사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꼭 조선에서 온 것이어야만 했다. (중략) 청나라 황제의 중풍 소란이 있기 4년 전, 인조도 이 약을 먹고 병석에서 회복한 적이 있었다. 인조 17년(1639년) 10월 15일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인조는 초저녁부터 열담(熱痰)으로 심하게 앓았고 내의원에서 급히 올린 이 약을 두 사발 먹고서야 비로소 회복될 수 있었다. 열담은 머리와 얼굴에 후끈후끈 열이 나고, 가슴이 몹시 답답하며 심계항진 등을 동반하며 심하면 정신을 잃기도 하는 병증으로, 당시의 백관과 재상들 사이에서도 왕의 병세로 인해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고 전해진다. 사경을 헤매던 인조를 병석에서 일어나게 만든 이 약, 이것은 바로 대나무 기름이라고 불리는 ‘죽력(竹瀝)’이었다. 「침략자가 탐냈던 조선의 귀한 약재」 --- p.276~277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다. 내의원 마당에 솥이 걸리고 잘 마른 장작들이 수북이 쌓였다. 이번에는 특별히 뽕나무 장작으로만 모아 오라는 특별 지시가 내려진 터다. 바람 잘 드는 내의원 뒤뜰에서 잠자고 있던 꿀 항아리가 다시 나왔다. 장작에 불을 붙이고 솥에 물을 담아 항아리를 중탕하기 시작했다. 항아리가 적당히 따뜻해지자, 뒤집어 체에 걸러 찌꺼기는 버린다. 여기에 얼굴빛을 곱게 해주는 삼내자 가루, 염증을 가라앉혀주는 용뇌 가루, 얼굴 반점을 없애주는 동아씨 가루를 고루 섞은 뒤 몇 번 더 채에 거르자, 미리 준비된 작은 백자 단지엔 고운 입자를 머금은 금빛 크림이 담겼다. 마침내 육향고가 완성되었다. 육향고(六香膏)는 본래 춥고 건조한 겨울철, 손발이 트고 갈라지는 피부에 바르는 동상 치료제였다. 육향고를 바르면 거칠었던 피부도, 갈라져서 피가 나던 피부도, 새 살이 다시 나는 듯 고와지곤 했다. 게다가 그윽한 향기는 이루 설명할 수 없었다. 좋은 꿀이 향기로운 약재, 피부를 좋게 하는 약재와 만나 춥고 건조한 계절에 거칠어진 피부를 부드럽게 해주는 왕실 보습크림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왕실 가족을 위한 내의원표 미용크림」--- p.328. 조선 왕실에서 내의원의 임산부 관리는 시기에 맞는 적당한 한약을 사용함으로써 태아의 순산을 유도하고, 산후의 산모에게는 적당한 조리를 시행하였다. 출산 약 한 달 전부터 순산을 준비하는 달생산을 복용하면서 출산일이 되면 분만촉진제와 같은 불수산을 복용하여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게 했다. 출산과 동시에 산모에게 어혈과 오로 등을 제거하는 궁귀탕까지 복용하게 하면 임신부터 출산 후까지 완벽한 관리가 마무리된다. 「왕실의 출산과 산후조리 비법」--- p.353. 인삼은 서양인들에게 아시아인들의 문화와 사회 환경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동아시아 의학을 대표하는 처방을 직접 경험한 그들의 역사이기도 했다. 인삼 경험을 통해 본 동아시아 의학이란 그들에게 병을 치료하는 효과적인 비법들이었다. 그들은 동아시아 의학에 대해 ‘타박상 및 상처에 더 우수하다’, ‘정성과 인내심이 대단하다’, ‘섬세하다’, ‘효과가 빠르다’, ‘상처 부위가 깨끗하다’, ‘처방이 간단하고 자연적이다’와 같은 시각을 갖게 되었다. 「루이14세의 약초원과 캐나다 인삼 러시」 --- p.366 |
반전과 미지의 기록 『승정원일기』에서 찾은 조선 왕실 사람들의 생로병사의 비밀,
그 속에 숨겨진 우리 역사의 보물 같은 이야기가 마침내 드러난다! - 영조가 사도세자를 미워했던 이유는 뚱뚱해서였다? - 인조는 소현세자를 독살하지 않았다? - 건강했던 효종은 조선 최악의 의료사고로 죽었다? -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는 단식투쟁을 하다 죽었다? - 영조는 왜 웃으며 목구멍의 회충을 손으로 뽑아냈을까? - 명성황후의 첫째 아들은 왜 항문이 막혀 죽었을까? - 숙종의 천연두를 낫게 하기 위해 어머니 명성왕후는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 장희빈의 아들 경종은 정말 성(性)불구자였을까? - 정조의 부인 효의왕후는 왜 산달이 훨씬 지나도록 아기를 낳지 못했을까? - 의관 백광현은 인선왕후의 목에 생긴 거대한 종기를 어떻게 말끔히 치료했을까? - 청나라 황제가 말년에 다급하게 구하라 한 조선의 명약은? - 겨울철 건조한 피부를 보습해주는 최고급 왕실 미용크림이 있었다? - 임진왜란 당시 전해진 조선 침법, 어떻게 일본에서 번성해 유럽에까지 퍼졌나? - 꼬레는 의학에서만큼은 중국보다 우수한 나라였다? √ 『조선왕조실록』에는 없고 『승정원일기』에만 있는 선조들의 생로병사-희로애락 이야기 이 책 『조선왕조 건강실록』의 바탕이 된 『승정원일기』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의학에 관한 이야기도 많다. 왕실 인물들이 언제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어떻게 치료했는지, 매일 시행된 의료 관련 기록들이 아주 세세하게 남겨져 있다. 이 기록들을 연구하면서 저자 9명은, 조선 왕실 사람들의 생로병사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희로애락을 엿볼 수 있었다. 기쁘고, 슬프고, 안타깝고, 황당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행복하고, 서럽고, 참아내는 등, 평범한 인간으로서 겪는 인생의 파고(波高)에 초점을 맞춘,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다. 강력한 왕권으로 신하들을 제압하고 세자의 생모에게 사약을 내린 냉혹한 면모를 보였지만 실제로는 자주 아프고 집권 내내 여러 병증을 달고 살며 건강하지 못했던 숙종, 정치에는 노련했지만 가족들과는 많은 마찰을 일으켰고, 소식과 채식을 즐기며 작은 병증에도 일희일비했던 영조, 폐비가 된 후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며 지내다 환궁 후 옆구리에 생긴 종기로 고생하다 죽은 인현왕후, 아들의 병을 낫게 하려고 한겨울 냉수목욕으로 치성을 드리다 허무하게 죽은 명성왕후, 오랜 기다림 끝에 결혼 5년 만에 생긴 자식이 항문폐쇄증이라는 기형 때문에 출생 후 3일 만에 죽어 오열했던 명성황후, 등 이 책 『조선왕조 건강실록』에는 수많은 조선 왕실 인물들의 생로병사, 희로애락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한 조선 최악의 의료사고로 허망하게 죽은 효종, 왕자를 낳아 왕실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심각한 중압감과 스트레스로 상상임신까지 하게 된 효의왕후, 결혼 첫날밤 이후 남편인 왕의 사랑을 후궁 조씨에게 빼앗기고 평생을 응어리진 가슴으로 살다가 죽기 직전 한 대야의 피를 토하고 죽은 장렬왕후 등, 역사상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긴 왕도 아니었고, 조선 정치사에서 중요한 사건의 주인공도 아니었던 왕실 인물들의 이야기도 조명하고 있다. 비록 겉으로 봐서는 왕이었고 왕비였으나 그들도 아프고, 고단하고, 인내하는 삶을 살았던 나약한 인간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 경희대 한의과대학원 동학(同學) 9명이 찾아낸 조선시대 우리 의학의 위대한 활약상 경희대 한의과대학원에서 함께 『승정원일기』를 연구하며 뜻을 같이 한 9명의 동학(同學)이자 저자들은, 조선시대의 훌륭한 한의학과 관련된 지식을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쉽게 들려준다. 허준의 『동의보감』외에는 지금의 후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 의료인들의 훌륭한 활약상과 조선 한의학의 높은 위상에 대한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17세기 당시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천연두(두창)에 걸린 숙종을 치료한 어의 유상의 이야기, 인선왕후의 목에 생긴 거대한 종기를 조선 최고의 침술로 완벽하게 치료한 의관 백광현 이야기, 병치레가 잦았던 숙종이 46년간 장기 집권할 수 있도록 해준 ‘중완혈 수구사’ 이야기, 임진왜란 당시 의관 김덕방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조선 침법이 머나먼 유럽 대륙의 침구학 발전에 기여한 이야기, 청나라 태종이 말년에 다급하게 찾은 최고의 명약 조선의 죽력(竹瀝) 이야기, 그리고 조선의 ‘고려인삼’이 캐나다에 인삼 러시를 불러왔던 이야기 등, 자랑스러운 우리 의료기술과 의료인의 활약상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다른 역사 관련 책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은 내용들도 있는데, 17세기 프랑스 문헌에 ‘꼬레아 침이 최고다!’라는 문장이 기록되어 있으며, 19세기 문헌에는 “다른 산업 분야들이 기본적인 수준에 머물러있다면 단 한 분야, 의학은 예외이다. 중국 의학의 기본을 잘 적용하면서도 중국보다 훨씬 우수한 수준에 도달했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이 향유했던 선진적인 의료문화와 미용문화 이 책 『조선왕조 건강실록』은 지금보다 의학기술이 훨씬 뒤쳐졌던 수백 년 전에는 어떻게 병을 치료하고 건강하게 생활했을까에 대한 소중한 정보가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유산이자 아시아의 보물이라 칭송 받은 허준의 『동의보감』뿐 아니라 수많은 의학적 지식과 기술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 앞섰던 조선의 한의학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에서 온 사신들도 감탄했었다. ‘약과 음식은 그 근원이 같다(藥食同源)’는 철학으로 마시는 차 한 잔, 죽 한 모금까지도 몸의 상태에 맞춰 먹었던 우리 선조들의 소소한 맞춤형 건강법은 무분별한 식생활로 온갖 생활병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왕실에서 사랑 받던 보습 미용크림인 육향고나 왕실 최고의 보약으로 중국 사신들도 탐냈던 경옥고, 그리고 왕실 왕비들이 출산 때 복용했던 각종 탕약(달생산, 불수산, 궁귀탕) 등 왕실에서 향유한 고급 의료문화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도 적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