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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조선왕조실록

노컷 조선왕조실록

: 무삭제판 조선의 역사

김남 | 어젠다 | 2012년 05월 2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7.6 리뷰 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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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top20 2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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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2년 05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360쪽 | 526g | 153*224*30mm
ISBN13 9788997712007
ISBN10 899771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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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책머리에: “망각은 망국에 이르고 기억은 구원의 비결이다”

1. 조선왕조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
당신은 김씨나 이씨가 아니다
성씨가 있던 사람은 10퍼센트 미만 / 한 마을이 통째로 같은 성씨 / 양반의 상징, 족보를 베끼다
우리는 십중팔구 상놈의 자손이다
노비 값이 조랑말의 절반 수준 / 조선 중기 통계로 본 신분 구성 / 귀한 것은 천한 것 위에 군림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 / 왜 뭉쳐야 사는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길을 잘 닦아 놓으면 오랑캐에게만 이롭다? / 색깔 있는 옷을 입으면 처벌을 받았다

2. 껍데기로만 이어간 왕조 오백 년
햇수만 길 뿐, 의미 없는 오백 년 위선의 역사
“내 어진에 일월오봉도를 그려 넣지 말라.” / 반정공신과 역적이 무엇이 다른가
기록만 하고 볼 수도 없었던 조선왕조실록
왜 실록을 왕도 못 보게 했을까 / 실록은 왕권 견제용 명분의 산물
오백 년간 정신마저 철두철미하게 중국의 식민지
중국이 끌고간 공녀들에 대한 침묵 / 명나라 황제, 만세 만세 만만세 /진상품: 말, 황금안장, 종이…처녀, 고자

3. 끊임없이 이어진 역모와 반역
역모로 시작해서 역모로 끝난 조선 오백 년
1천 회가 넘는 역모 고변 / 동학군의 요구 12개 조항에 담긴 조선의 실체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과는 거리가 먼 잔혹한 형벌제도
서울 한복판에서 능지처참 / 임경업 장군, 국문 두 번 만에 매 맞고 숨져 / 영창대군 역모사건에 희생된 자만 천여 명
첩만 거느릴 뿐 자식은 나 몰라라: 서자들의 잦은 반란
관직은 물론 재산 상속권도 없어 / 서얼 차별은 결국 밥그릇 싸움
그렇게도 많았던 투서와 모함
무기명 투서를 제보한 판관을 파직하라 / 노비와 여자 문제로 인한 모함

4. 언제 한번 죽기 살기로 싸워본 적이 있는가
대마도 원정은 승리한 전쟁이다?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
솜이불을 펼쳐서 적탄을 막자? / 호미를 녹여 만든 칼과 일본도의 대결 / 조총이라는 것이 쏜다고 다 맞는 것입니까?
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청군은 어떻게 바람처럼 서울에 당도했을까 / 쌍령전투의 치욕 / 앉은 채로 당할 형세는 아니었는데…

5. 굶어 죽고 병들어 죽다 망한 나라
해마다 수만 명씩 굶어 죽는 시체 왕국
경신 대기근 때 최소 수십만이 굶어 죽어 /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떠나가고… / 왕도 대신들도 피해가지 못한 전염병
서양 사람들의 눈에 비친 한심한 조선
조선인들의 악덕 중 하나, 식탐 / 양반들의 비열한 관습 / 담배 피는 조선의 궁녀들

6. 애국이란 단어는 없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왕은 부친도 형도 믿지 못했다
절대로 1등 하지 마라
조선의 관헌은 전과자? / 황희의 치정사건에 관한 진실 / 조선 시대 청백리의 운명
한 번도 개혁을 해본 적 없는 나라
박지원의 《열하일기》, 허공의 메아리 / 홍양호의 상소문, 군자들에게 일침

7. 조선 사대부들의 두 얼굴
앞에서는 우국충정, 돌아서면 탐관오리
조선 최고의 탐관오리 / 부패의 고리, 양반 - 기생 ? 아전 / 선정비를 세운 까닭은?
국가는 위기인데 호화별장 세우는 사대부의 낙원
어부사시사 문학의 이면 / 명품 구매의 원조, 조선의 사치 풍조
왕이 양반을 싫어한 까닭은?
포도를 많이 먹고 혼난 임금 /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
욕설 범람하는 우리 사회는 조선의 유산인가
욕을 하라 지시한 임금

8. 국가 최고의 가치관은 허례허식
제사와 행사로 날이 새고 해가 진다
조선의 국력이 소진된 이유 / 인조의 장례절차에 5개월 걸려
한옥은 사람 살기 부적절한 가옥이다
왜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작은 방에서 살았을까 / 한옥의 치명적인 단점
우리는 본래 매장이 아닌 화장 국가였다
매장과 풍수 / 천도, 집권 그리고 풍수
기둥뿌리 썩어가도 고담준론으로 수백 년
민생은 없고 권력 싸움만 있다 / 16년 예송논쟁 / 300년 문묘종사 논쟁

9. 독도는 정말 우리 땅인가
바보야, 안용복이 답이다
독도 문제의 기원 / 조선의 공도 정책 / 일본의 울릉도 도해 면허증 / 1693년 안용복 사건 / 조선 조정의 미봉책 / 안용복의 복수 / 잘못 꿴 단추

저자 후기: 조선이 실패한 원인을 찾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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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비린 조선의 역사, 그 진짜 모습!!

우리는 조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동안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으로 배우진 않았나? 역사는 쓴맛, 비린 맛 가리지 않고 차려진 밥상과 같다. 맛있는 것만 골라 먹는 유아적 식습관은 몸에 이롭지 않다. 그런 것은 양반의 밥상에나 어울린다. 노컷 조선왕조실록은 쓰고 비린 역사를 가감 없이 차린 진짜 조선의 밥상이다.

왜 이제 와서 쓰고 비린 역사의 속살을 뒤집어 보자는 것인가

집집마다 족보가 없는 집은 드물다. 그리고 내 선조가 내로라하는 양반이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요즘처럼 먹고사는 게 팍팍해진 시대에 무슨 족보 타령이냐고 하겠지만 좀 살 만해지면 자기 집안의 내력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자신의 학력까지 위조하는 세상 아닌가. 그런데 이런 과시욕이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될 일이 아니고 총체적으로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를 거슬러 조선 시대의 신분사회 문제를 추적해 보면 그 원인과 배경이 밝혀지고 만다.

또한 오늘날 일본과 가장 큰 외교적인 마찰은 독도 이슈다. 일본은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독도 영유권에 대한 교육을 강화시키고 있다.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항의 표시를 하며 맞대응을 하지만 간혹 석연치 않은 발언을 함으로써 정부대책에 대한 국민의 의구심을 사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모호한 행태가 이미 조선의 조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국토의 난개발, 사대외교, 고위직 부정부패, 1% 대 99%, 욕설이 난무하는 사회, 민생은 뒷전인 권력 투쟁. 이런 말들이 오늘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이지만 조선 시대에 적용하는 데도 전혀 다르지 않다. 저자는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현대사의 굴곡에서 온 잔재가 아니라 이미 오백 년 조선의 역사 속에서 잉태되어 자라온 문화라고 지적한다. 문제의 근원은 조선에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조선의 역사가 어떻다고……

천기누설, 민심 혼란 유발, 불경죄. 이 책에 열거된 내용의 평가를 조선 시대의 아전의 입을 빌려 표현한다면 그런 식이 아니었을까. 시대가 변했길 망정이지 조선 시대에 이러한 유형에 해당되는 내용의 발설을 했다면 참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도대체 조선의 역사가 어떻다고 했기에….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

“경차관을 각도에 나누어 보내어 처녀를 선택하게 했는데, 천민은 제외하고 양가의 처녀 13세 이상 25세 이하를 모두 골랐다.” 세자빈 간택에 관한 기사가 아니다. 명나라가 공녀를 요구하자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처녀를 물색해 바쳤다는 내용이다. 세종도 예외는 아니다.

해미읍성에 가면 서문 밖에 자리개돌이란 널따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피가 묻어 있다. 칼로 목을 치기에는 사형수의 숫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이 바위에 사람을 패대기쳐서 죽였다. 사람을 처형하는 데 이런 잔인한 방법을 쓴 것은 중국에도 예가 없다.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는 표현을 두 번 다시 쓰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 군대는 최신 무기를 가지고 쳐들어 왔는데, 조선의 군사는 무기가 없었으며 군중에는 군량이 없어서 군사들은 언제나 굶주렸다. 장수마다 명령이 달라 도원수가 전진 명령을 내리면 순찰사는 후퇴 명령을 내렸다. 조정은 서울에서 급히 군대를 모았지만 다 도망쳐 버리고 동원 가능한 숫자는 겨우 300명이었다. 선조는 압록강가에서 왜 조선군은 한 번도 이기지 못하느냐고 화만 냈다.

《어부사시사》는 우리 고전문학의 보고다. 그 시의 저자가 유배된 보길도는 호젓한 유적지이자 관광지로 유명하다. 수려한 경관에 감탄이 절로 나오는 연못과 정자. 술잔을 기울이면 시한 수가 혀를 타고 목청을 되돌아 마술처럼 나비가 되어 온 사방을 가득 채울 기세다. 아! 유감이다. 이때는 병자호란으로 극심한 흉년이 일고 굶주린 백성이 줄지어 죽어나가고 있었으니.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민을 동원해 산의 나무를 베어 25채의 집을 짓고 연못 안에 섬을 만들고 무희의 춤을 감상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국가나 백성들은 외면한 채 혼자만의 낙원을 이룬 섬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율곡은 상소 「만언봉사」를 통하여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이야말로 진실로 나라가 아닙니다”라고 피 끓게 부르짖었다. “날로 심하게 썩어 하루가 다르게 붕괴되어 가는 큰 집에 불과합니다.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너지는, 어느 대목도 손을 댈 수 없는 집입니다.” 조선의 실정을 정확히 지적한 표현이 아닐까.

그러면 조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동안 우리는 조선왕조에 대하여 너무 자랑만 일삼아 왔다. 빛나는 역사와 문화, 심지어 임진왜란 같은 국란도 우꺸가 승리한 전쟁이라고 가르쳐 왔다. 과연 조선은 그런 장밋빛의 왕국이었나? 사실 우리나라가 해 돋는 동쪽의 아름답고 고요한 나라라는 표현도 별로 적합한 것이 아니다. 우아한 예절과 선비의 나라였다는 것도 착각에 가깝다. 그럼 가장 정직한 표현은 무엇일까? 우리 조선은 대체 어떤 나라였나? 이 책이 시종일관 추적하는 문제다.

이스라엘은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로마군에게 전멸당한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으려고 2천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사관생도로부터 어린아이들까지 요새에 오르게 한 뒤에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마라(Forgive but not forget)”를 복창시키고 있다. 유대인이 학살당한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기념관의 마지막 코너에는 동판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망각은 망국에 이르고 기억은 구원의 비결이다.”

우리는 실패에 대한 분석을 잘 하지 않는다. 오로지 성공하는 비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실패는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는 격언이 무색할 따름이다. 개인에게든 집단에게든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실패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과거에 왜 그런 실패가 발생했나를 엄중히 따지고 반성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꼭 성공을 위한 길만이 목적은 아니다. 역사의 진실을 바로 알고자 한다면 긍정적인 것이 됐든 부정적인 것이 됐든 공평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까지 역사가 한쪽에 편중되어 있었다면 다른 쪽의 진면목을 살펴보는 자세는 어쩌면 성숙한 사회의 자신감의 발로가 아닐까. 진짜 조선의 밥상을 차려내는 변론이다.

회원리뷰 (7건) 리뷰 총점7.6

혜택 및 유의사항?
백지원보다 더 하다, 어떻게 이럴수가... 내용 평점1점   편집/디자인 평점1점 YES마니아 : 로얄 x***2 | 2012.05.26 | 추천21 | 댓글10 리뷰제목
  얼마 전, 새로 나온 책이라길래 바로 구해서 읽어 보았다.     그런데 읽고 난 소감은 "세상에 이럴수가..."였다.     내가 그동안 줄곧 비판해온 재미교포 저술가 백지원씨의 괴작인 <왕을 참하라>와 <조일전쟁>, <완간 고려왕조실록>, <대양시대 개막>보다 더 하다, 더해.     최근 개인적인 저술 활동에 바빠서 남의 책을 읽고&n;
리뷰제목

  얼마 전, 새로 나온 책이라길래 바로 구해서 읽어 보았다.

 

  그런데 읽고 난 소감은 "세상에 이럴수가..."였다.

 

  내가 그동안 줄곧 비판해온 재미교포 저술가 백지원씨의 괴작인 <왕을 참하라>와 <조일전쟁>, <완간 고려왕조실록>, <대양시대 개막>보다 더 하다, 더해.

 

  최근 개인적인 저술 활동에 바빠서 남의 책을 읽고 긴 리뷰는 남기지 않으려 했지만, 그래도 남겨야겠다. 이대로 그냥 지나가면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

 

  1. 이 책의 저자 소개란을 보니,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을 정독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나는 의구심이 든다.

 

  <조선왕조실록>의 글자 수는 49,646,667자인데, 설마하니 이 많은 글자를 저자가 다 읽어 보았단 말인가? 자그마치 4천 9백만개의 글자들을?

 

   대학에서 역사만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교수들도 <조선왕조실록>을 정독했다는 말은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전문 역사 연구가나 학자도 아니고, 소설이 본업이던 저자가 언제 <조선왕조실록>을 정독했단 말인가?

 

  아무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인터넷으로 공개된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나 아니면 다른 인문 교양 서적에 실린 흥미 위주의 <조선왕조실록> 중 일부만 읽어본 게 아닐까?

 

 

  2. 내용부터 보니 더욱 기가 막힌다.

 

  당신은 김씨나 이씨가 아니다/ 성씨가 있던 사람은 10퍼센트 미만/ 우리는 십중팔구 상놈의 자손이다/

 

  : 그래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바는 뭔지? 우리는 상놈의 자손이니, 모두 비천하고 더럽고 열등하고 한심한 족속이란 말인가?

 

  조선 시대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족보는 양반만 가지고 있었다."인데, 족보는 양반만이 아니라, 중인 계급들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실제로 노비를 거느리고 있지도 않은 사람들도 노비를 거느렸다고 허위 기적을 한 사례도 있다고 하니, 노비의 수가 그렇게 많았던 것도 아니다.

 

  노비 값이 조랑말의 절반 수준 / 조선 중기 통계로 본 신분 구성 / 귀한 것은 천한 것 위에 군림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

 

  :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저자는 과연 조선시대 노비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의 노비들은 모두 주인 집에서 먹고 살지 않았다. 주인이 가진 토지를 위탁 받아서 집 밖에서 살면서 관리하고, 그 대가로 곡식 등 자기 재산을 모으는 일도 가능했다. 그런 노비들을 외거 노비라고 부른다. 조선 성종 무렵, 임복이란 노비는 자신이 모은 곡식 2천 석을 나라에 바치고, 자기 네 아들과 함께 노비 신분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새로 창설한 훈련도감에는 관공서에서 일하던 공노비(公奴婢)나 양반 댁에서 부림을 당하던 사노비(私奴婢) 등 천민들이 군사로 지원했고, 훈련도감과 비슷한 시기에 창설된 속오군(束伍軍)에도 노비들이 포함되었다. 더해서 속오군에 들어가서 일정 수 이상의 도적을 검거한 천민은 노비 신분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다.

 

  임진왜란 중 천인 백운상(白雲常)은 군공으로 3품직인 훈련정에 기용되었으며,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의 천첩자인 홍계남(洪季男)은 호서 지방을 보전한 공으로 수원판관 겸 경기도조방장으로 기용되었다.

 

  이밖에 조선 후기인 1745년에 편찬된 법전인 ≪속대전≫에는 사노비의 경우 100냥, 즉 쌀 13석의 속전을 지불하면 면천종량할 수 있도록 그 값을 법제화하기에 이르렀다.

 

  즉, 조선은 노비라고 해도 자기 재산을 모을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해서 모아진 재산으로 얼마든지 자기 신분에서 벗어나 양민으로 신분 상승을 하는 일이 가능했던 사회였던 것이다.

 

  이렇게 자기 힘으로 신분 해방을 이룬 노비들이 양반 족보를 사서 자기들이 양반인 것처럼 꾸민 일을 두고 저자와 같은 사람들은 매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본다. 조선은 후기에 이르러 전국민의 양반화가 진행될 정도로 신분 제도가 유동적인 사회였다고 말이다.

 

  양민이 된 노비가 자기가 번 돈으로 양반의 족보를 사서 양반 계급으로 행세하는 일이 정말 큰 잘못일까? 그렇다면 한 번 노비였던 사람은 영원히 노비로 지내야 할까? 그게 합당한 일일까?

 

  이런 말을 하면 혹시 저자는 "전 세계에서 노비가 돈으로 양반 족보를 사서 거짓 양반 행세하는 나라는 한국만이 유일하다! 한국은 세계에서 제일 썩어빠진 나라야!"하고 고래고래 날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구의 프랑스에서조차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했다. 원래 프랑스에서 귀족들은 매우 적었는데, 루이 14세 시절에 돈을 벌어 신분 상승을 이룬 평민들이 너도나도 귀족 족보를 돈주고 사서 귀족입네 하고 행세하는 바람에 기분이 상한 귀족들이 "대검 귀족"이니 "법복 귀족"이니 하는 말들을 만들어서, 원래부터 귀족이었던 자와 최근에 돈으로 신분 상승을 이룬 신흥 귀족들을 구분하는 일까지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3. 껍데기로만 이어간 왕조 오백 년/ 햇수만 길 뿐, 의미 없는 오백 년 위선의 역사

 

  : 조선 왕조가 오백 년을 간 것이 불만일까? 그렇다면 조선은 대체 얼마를 갔어야 했을까? 삼백년? 이백년? 사백년? 아니면 그냥 처음부터 생기지 말아야 했을까? 햇수만 길 뿐, 의미가 없어? 그럼 햇수가 짧은 나라들은 의미가 있을까? 무엇이 의미있는 일일까? 칭기즈칸의 몽골 제국처럼 백년 동안 이웃 나라들을 멸망시키고 약탈과 착취로 버티다가, 이민족들의 반격을 받고 원래 고향으로 후퇴하는 길? 아니면 서구 열강들처럼 배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쳐들어가서 원주민들 대량학살하고 식민지배하다가 원주민들의 저항에 다시 식민지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


  오백 년간 정신마저 철두철미하게 중국의 식민지/ 중국이 끌고간 공녀들에 대한 침묵 / 명나라 황제, 만세 만세 만만세 /

 

  : 여기서 저자는 중대한 실책을 저지르고 있다. 저자는 속국과 식민지의 구별도 못 하고 있다. 이런 말은 안 쓸려고 했지만, 저자는 정말이지 기본적인 역사 지식조차 없는 사람이다.

 

  식민지라 함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제 강점기나 로마 제국 시대, 혹은 대영 제국 시대처럼 본국에서 총독이 파견되어 외부 지역 주민들을 직접 통치하는 정치적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 명나라나 청나라에서 총독이 파견되어서 조선을 직접 다스렸나? 조선에게 직접 명령을 내렸나? 조선의 내정에 직접 지시를 했나? 전혀 없다.

 

  저자는 조선이 내내 명나라에 조공 많이 갖다 바치고, 속국이라고 했다는 점을 들어서 조선이 중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지만, 조공은 힘없는 아이가 깡패한테 당하듯이, 일방적인 "삥뜯기"가 아니었다! 겉으로는 조공이지만, 사실은 국가 간의 국제 무역이었다.

 

  한 예로 조선 사신이 명에 가서 황제에게 조공품을 바치면 황제는 그에 따른 답례로 회사(回賜)를 내려 주었다. 그것이 조공의 기본 관례였다. 또한, 조선의 국왕이 죽으면 조선 사신들은 명나라에 가서 왕의 죽음과 세자의 등극을 알렸고, 황제는 이를 승인하며 조선 왕의 장례식을 치를 돈과 조선 왕자의 왕위 계승을 축하한다는 명목의 돈을 하사했다. 명나라의 황제가 죽었을 때는 조문 사절을 보내 위로의 명목으로 조공품을 바치면 황태자는 그에 따른 회사를 내려주었다.

 
  뿐만 아니라 명은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에게 회사 이외에 별도의 은상(恩賞)까지 지급했다. 이런 점을 노려 조선은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을 조공의 빌미로 삼아 더 많은 이득을 타내기 위해 명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1년에 두 번이나 조공을 했으며, 이는 다른 나라들보다 더 많은 횟수였다. 그만큼 조선과 명의 관계가 긴밀했다는 뜻이다.

  몽골의 오이라트 부족은 매년 2천 필의 말을 명나라에 조공했는데, 1448년 명나라에서는 더 이상 조공을 받지 않겠다고 오이라트 사절단이 오는 것을 금지했다. 왜? 그들에게 답례로 주는 선물이 너무 많아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동아시아에서 조선만 명나라에 조공 바쳤을까? 아니었다. 몽골, 오이라트, 티벳, 베트남, 미얀마, 태국, 류쿠, 캄보디아, 위구르, 만주족 등 중국 주변 국가들은 서로 중국에 조공 바치려 애썼다. 심지어 일본조차 아시카가 막부 시절,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명나라 영락제에게 "신(臣) 일본국왕" 운운하며 조공을 바쳤다!

 

  이는 명나라에 조공을 보내면 그 이상의 대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비유를 하자면 명나라(중국)가 주변국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것은 오늘날의 세계 무역 기구인 WTO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조선이 명나라 황제를 존경하고 숭상했다는 사실이 무척 못마땅한가 보다. 하지만 조선 임금과 대신, 양반 사대부들이 아무 생각없이 사는 바보 멍청이라서 명나라를 그렇게 숭상했던 것일까? 아니었다. 조선 시절, 명나라는 세계 최강대국이었다. 초대 황제 주원장은 1백 년 동안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제국을 박살내고 북방으로 쫓아 버렸다. 주원장의 아들인 영락제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히 다섯 번이나 북벌을 감행해 몽골과 오이라트 족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고, 남방의 미얀마와 베트남까지 정복하였으며, 만주의 여진족들을 제압했다. 어디 그뿐인가? 환관 정화에게 3만 명의 수군을 이끌고 인도와 아랍, 동부 아프리카까지의 대항해를 무려 7번이나 강행하여 절정에 달한 국력을 과시했다.

 

  명나라의 국력이 쇠퇴기로 접어들던 16세기 말경에도 명나라의 위세는 여전히 강력했다. 북방에서 침입하던 만주족을 방어하기 위해서 국경 지대에 50만이나 되는 대군을 배치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고통받던 때, 명나라는 자국의 손해를 무릅쓰면서도 두 번이나 대규모 군대를 보내서 조선을 도와 일본군을 물리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명나라를 조선 선비들이 숭상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나라를 숭상해야 옳았을까? 일본? 만주족?

 

  조선의 조공과 사대주의에 대하여 어떤 분이 남긴 글을 인용해 본다.

 

  - 사대주의는 굴욕적인 것이 아니라 강대국 중국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민족의 지혜였다. 동아시아 역사의 전문가인 라이샤워 교수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조공은 오히려 중국 쪽에 더 큰 손해였고, 중국이 조선더러 너무 자주 오지 말라고 말렸다. 중국에 조공 바치러 갈 때마다 무역을 하고 새로운 문물을 도입할 수 있어서 조선은 오히려 더 갈려고 중국에 간청했다.
  사대주의를 나쁘게만 본다면 우리 조상들에 대한 커다란 모독이 될 수 있다.
  만약 강대국에 무모하게 저항했다면 로마에게 맞서다 멸망한 유태인들처럼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난을 당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자기 본질은 튼튼히 지키면서도 감당할 수 없는 힘 앞에서는 최소한 타협을 하고, 그 어려운 고비를 넘김으로써 7천만 대민족을 오늘날까지 보존해 온 우리 조상들에게 감사를 해야 한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저서인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서 발췌

 

 

  4. 끊임없이 이어진 역모와 반역

  : 이건 좀 일일이 다루기 어려운데, 이 세상에 역모나 반역이 없었던 나라도 있었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과는 거리가 먼 잔혹한 형벌제도

  : 현대 이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나 형벌제도는 잔혹했다. 서구 선진국? 중국? 아랍? 일본? 그네들도 조선에 못지 않았다. 아니, 조선보다 더 잔혹한 면도 있었다.

 

  아래 글은 러시아의 국회의원이자 모스크바 국제 관계 대학의 교수인 블라지미르 메진스키가 쓴 <러시아와 그 적들 그리고 거짓말>에서 참조한 내용이다. 서구 선진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의 형벌제도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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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시대에 공개처형을 관람하는 것은 서유럽 성인들의 놀이문화였다. 유럽의 사형관람은 오락이자 구경거리였다. 극장에 가듯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사행집행인의 이름과 그들이 어떻게 사형을 집행하는지 논의하며 아는 척하는 것이 매너로 여겨졌다.

 

  유럽에서는 교수대와 사형 도구를 가리켜 '마셴카 교수대', '여윈 표클라(사형용 도끼)', 같은 애칭으로 불렀다. 영국은 마셴카를 '리틀 메리'라고 불렀고, 사형용 도끼를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는 '여윈 거트루트', 아우크스부르크에서는 '빠른 알베르트'라고 불렀다.

 

  계몽사상이 뚜렷하고 3권 분립이 이루어진 시기의 영국에서는 창고 2개를 불지른 죄로 8세 소년을 사형시켰다. 사람들은 이를 구경하면서 노래하고 웃었다. 영국에서는 어린 아이가 손으로 사형수를 만지면 행복을 가져다 주고, 교수대의 나무조각을 빨거나 이쑤시개처럼 사용하면 치통을 막는 약이 된다는 미신도 널리 퍼져 있었다.

 

   독일에서는 사형수를 목매달아 죽인 밧줄이 집안에 행복을 가져다 주고, 프랑스에서는 사형수의 손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해준다는 미신도 생겨났다. 1788년 영국에서는 사형당한 죄수에게 군중들이 달려들어 말 그대로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시신을 부위별로 나누어 가진 사건도 있었다. 운이 좋았던 어느 선술집 주인은 사형수의 머리를 가져가 썩은 냄새가 나기 직전까지 자신의 가게에 걸어놓고 손님들을 끌어 모았다.

 

  프랑스 파리의 그레브 광장에서 벌어진 공개처형은 파리 시민들을 흥분시켰다. 그들은 사형 장면을 보면서 즐기고 노래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러시아 작가인 표트르 드미트리예비치 보보리킨은 1864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리에 반 년만 살면 알 것이다. '라 코케트' 감옥 근처에서 집행된 공개처형이 얼마나 잔혹한지! 이보다 더 잔혹한 장면은 상상할 수 없다. 호색가, 고급 매춘부와 퇴물, 바람둥이, 도둑, 도망간 유형수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의 사람이 주변 술집에 모여 술에 취해 형편없는 노래를 불렀다. 새벽이 되어서야 사형수들이 매달려 있는 광장을 둘러싼 경비대쪽으로 다가가 이 소름끼치는 기구를 불렀다. 멀리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매혹적인 구경거리를 기다리며 사형장에 있다는 기쁨으로 환호하며, 즐겁게 밤을 지세웠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교수대가 기요틴(거대한 칼날을 장착해 죄수의 목을 자르는 기계)으로 대체된 후, 프랑스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서 다시 교수대로 바꾸라고 요구했다. 이런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나폴레옹 시대와 부르봉 왕조 시대 이후, 프랑스의 사형 집행 기구는 다시 교수대로 바뀌었다. 파리에서 최후의 공개처형은 무려 2차 세계 대전 바로 전에도 벌어졌다.

 

   소련의 배우, 알렉산드르 베르틴스키는 그가 사랑하는 파리의 광장에서 군중들이 소리지르고 즐긴 공개처형 장소에 있었다. 사형장면을 본 알렉산드르는 그가 본 참혹한 광경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실만큼, 사형을 저속하게 평가했다. 그의 오랜 팬이었던 연미복을 잘 차려 입은 어느 신사가 다가와서 술집에서 그를 만나 같이 술을 마셨다. 이 신사는 그에게 공개처형은 예술활동에 좋은 것이 아니니, 더 이상 그런 구경거리에 가지 말라고 부탁했다. 알고 보니 이 신사는 파리의 공식 사형집행인이었다!

 

   이밖에도 19세기, 영국 상류사회의 신하들은 금요일이나 토요일마다 부인을 데리고 감옥으로 행차했다. 감옥에 갇힌 창녀들이 서로 대결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미리 좋은 좌석을 사 구경거리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잡아달라고 감옥소에 부탁까지 했다.

 

   영국의 신사숙녀들은 이 흥미로운 행사에 다니면서 사형 집행인의 이름, 그들의 행동, 창녀들을 파악했다. 지난 경기, 또는 다른 창녀와 비교하거나 예전의 상처와 비교하는 일을 에티켓으로 삼았다.

 

  1810년에서 1826년까지 영국 런던의 미들섹스 백작령에서만 2755명이 사형을 당했다. 미들섹스 백작령과 런던 전역에는 약 800만 명이 살았다. 3천명 당 한 명이 사형당한 것이다.

 

  런던의 명소 중 하나가 사형대인데, 어떤 사형대에는 여러 높이의 기둥과 21개의 올가미가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약 500년 동안 연속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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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첩만 거느릴 뿐 자식은 나 몰라라: 서자들의 잦은 반란

  : 그래도 조선에서는 서자라도 왕의 아들로 태어나면 왕이 될 수 있었다. (선조) 하지만 서양에서는? 왕의 아들이라도 정비가 아닌 첩이나 애인에게서 태어난 자에게는 아예 왕위 계승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자의 권리 면에서는 조선이 서양보다 더 나았던 것일까?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홍계남은 서자였는데도 군사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건 저자가 알까?

 

  언제 한번 죽기 살기로 싸워본 적이 있는가

  : 이 사람은 대체 조선왕조실록을 제대로 읽은건지나 모르겠다. "언제 한번 죽기 살기로 싸워본 적이 있는가"? 임진왜란 때를 보자. 진주성 전투와 행주대첩, 이치 전투, 북관대첩, 웅치 전투, 금산 전투, 명량대첩, 노량해전은 다 뭔가? 이 전투들이야말로 정말 조선 관군과 의병들이 "한번 죽기 살기로 싸워본" 전투였는데?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

  : 그렇다면 그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임진왜란"에서 왜 일본군은 끝내 조선을 점령못하고 물러갔을까? 조선은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웠"는데? 일본군은 조선군보다 더 한 "허깨비 군사력으로 싸운" 것이었을까?

 

  솜이불을 펼쳐서 적탄을 막자? / 호미를 녹여 만든 칼과 일본도의 대결

  : 저자가 군사사와 전쟁사에 관한 상식이 너무나 없어서 뭐라고 반박하기도 힘들다. 물에 적신 솜이불은 구식 조총탄에 대해 충분히 방호력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 대원군이 만들었던 목면 갑옷은 미군의 총탄도 잘 막아냈을 정도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일본군, 하면 무조건 일본도만 떠올리는데 이거야말로 짧은 식견이다. 실제로 전국시대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6세기, 일본군의 주요 무기는 긴 창과 활 및 조총이었고, 일본도는 부수적인 역할에 그쳤다. 호미로 녹여 만든 칼 어쩌고 하는데, 전쟁이 칼 하나로만 하나? 조선군이 일본군과 싸웠을 당시, 제일 많이 사용했던 무기는 활과 대포였고, 칼은 역시 부수적인 역할에 그쳤다.

 
  조총이라는 것이 쏜다고 다 맞는 것입니까?

  : 임진왜란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무모한 기병 돌격을 펼치다 전사한 일과 그가 출전하기 전에 유성룡과 나눈 대화에서 “왜군이 조총을 갖고 있다지만, 그게 어디 쏠 때마다 맞는답니까?”하고 말한 일화를 기억할 것이다.
  이 일화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신립의 식견이 모자랐다느니, 총의 위력도 제대로 모르는 한심한 장군이라느니 하면서 비웃는데 온당치 못한 일이다.
  신립이 “조총이 쏠 때마다 맞느냐?”라고 말했던 배경에는 조선의 개인용 화기였던 승자총통을 염두에 두고 그런 것이었다. 승자총통은 최대 사정거리는 2백 미터나 되었지만 유효 사정거리가 매우 짧았고, 탄도의 명중률도 낮아 실제 살상 효과보다는 큰 소리로 적을 놀라게 하는 효과를 노리고 만들어진 무기였다. 그래서 임란을 거치면서 조선에 조총이 보급되자 승자총통은 얼마 못 가 사장되고 만다. 
  비단 승자총통뿐만이 아니었다. 현대의 총기들과는 달리, 근대 이전의 개인용 총기는 동서양 어디에서나 명중률이 낮았다.
  임진왜란보다 2백년 후인 18세기 말, 미국의 독립 전쟁 당시에도 총의 명중률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이유는 아직 총기 안에 총탄이 회전하면서 날아갈 수 있도록 한 장치인 강선(라이플)이 없어 총탄이 멀리까지 안정적으로 발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의 장군들은 병사들에게 “적의 눈동자가 보일 때까지는 총을 쏘지 마라.”라고 명령했을 정도였다.
  미국의 독립 전쟁을 다룬 헐리우드 영화 <패트리어트>에 보면 재미있는 전투 장면이 나온다. 미국 독립군과 영국군이 서로 대열을 이루며 다가가다 바로 가까이에서 서로 총구를 대고 지휘관의 구령에 따라 일제 사격을 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우스꽝스럽지만 거기에는 총기의 낮은 명중률을 집단 사격으로 인한 화망 형성으로 극복하려는 양군 지휘관들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더구나 16세기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총기는 1분 당 총탄을 두 번 발사하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장전 속도가 느렸다.

 

  어떤 바보라도 막을 수 있었던 병자호란

  : 역사를 공부할 때, 유념해야 할 사실은 제발 현재의 눈으로 그 시대의 일을 판단하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삼국시대나 조선시대 사람들을 가리켜 "왜 그 때 사람들은 핵폭탄이나 비행기를 안 만들고 말타고 싸웠을까요? 되게 멍청한가 봐요."라고 비웃을 수 없는 이유다.

 

  병자호란을 못 막았던 조선인들이 바보라고? 병자호란은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이 아니라, 처음부터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7년 당시, 청나라는 추위로 인해 농사가 흉년이 들어 굶주림에 시달렸고, 설상가상으로 명나라와의 무역도 끊겨서 경제적으로 무척 궁핍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청나라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자 부족을 해결해야 했고, 그래서 반드시 조선을 공격해 물자를 약탈해와야 했었던 절실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사실이나 제대로 알련지 모르겠다.


  쌍령전투의 치욕 /

  : 쌍령전투에서 조선군이 참패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병자호란 내내 조선군이 패배하지만은 않았다. 광교산과 금화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조선군이 청 태종의 사위인 양구리를 전사시키는 승전을 거두기도 했으며, 청나라 군대의 돌격을 저지하고 격파하는 전공도 세웠다.

 

  굶어 죽고 병들어 죽다 망한 나라

  : 이보셔요, 근대 산업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은 한 번 기근이 들면 수십만씩 굶어죽어나갔답니다. 특히나 조선이 굶주림에 시달렸던 경신 대기근 무렵은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라고 불릴만큼, 기온이 낮아서 농사가 잘 안 되었던 때였어요. 일본? 일본도 텐메이 대기근 당시, 무려 90만명이 굶어 죽어나갔던 일은 알아요?

  그나마 조선에서는 대기근이 닥치면, 나라에서 직접 창고에 보관된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먹이고, 세금을 면제해 주고, 심지어 사이가 나빴던 청나라에 부탁을 하면서까지 곡식을 얻어와 어떻게 해서든 백성들을 구휼하려고 애를 썼답니다.

  근데 일본은? 그런 거 전혀 없었어요. 이웃 번에서 백성들이 굶어죽어가도 나몰라라 했어요. 왜냐? 에도 막부 시대 일본은 엄연한 봉건 국가였거든요. 따라서 남의 번은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였어요. 이건 아나요?

 

  

  조선인들의 악덕 중 하나, 식탐

  : 30년 전쟁이 일어났던 17세기 무렵, 독일 농민들은 1년 동안 번 돈을 모두 결혼식 잔치에 써버렸다. 부유한 귀족이나 가난한 평민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랬다. 어느 독일인은 "우리들은 번 돈을 모두 뱃속에 퍼붓는다."라고 말할 만큼, 독일인들은 먹고 마시는 일에 열중했다. 그렇다면 독일인들도 식탐이란 악덕에 빠져있던 나쁜 사람들이었을까?

 

  담배 피는 조선의 궁녀들

  : 여자가 담배피면 안 되나? 설마 저자는 성차별주의자인가?

 

  왕은 부친도 형도 믿지 못했다

  : 어디 다른 나라 왕실들은 언제나 가족들이 모두 훈훈하게 지냈던 사이인지 알아보고 그런 말을 하십시다. 유럽이나 중국의 왕실, 일본의 막부 통치자들은 부친과 형이 서로 믿던 화기애애한 관계였을까요?

 

  욕설 범람하는 우리 사회는 조선의 유산인가

  : 세상에 한국어에만 욕설이 있고, 다른 나라 언어에는 욕이 없답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욕 안하고 사나요? 미국 영화나 드라마 보니까 배우들이 하는 대사마다 온통 퍽(fuck)이란 말이 빠지지 않던데, 그 퍽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욕설의 제왕이었던 건 아나요? 성경 볼까요?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은 마귀에서 태어난 자들이니, 아비인 마귀의 욕심대로 행동한다."

  "내 집을 기도하는 곳이라 말했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구나."

 

  대충 생각나는 것만 이 정도.

 

  나머지는 생각나면 따로 올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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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립박수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플래티넘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자**국 | 2013.05.13 | 추천3 | 댓글0 리뷰제목
아는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진정성.  역모사건이 많은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많은줄은 몰랐다.   다모를 본다 너무 재미있다 하지만 그 왕의 조상도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이 아닌가.  과거에 나도 '김연아와 이성계' 라는 글을 다음카페에 올린 적이 있다.  우리 국민중 5%만이 양반이라는것 청나라도 몽골이 겁이났;
리뷰제목

아는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진정성.

 

역모사건이 많은줄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많은줄은 몰랐다.

 

다모를 본다 너무 재미있다 하지만 그 왕의 조상도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이 아닌가.

 

과거에 나도 '김연아와 이성계' 라는 글을 다음카페에 올린 적이 있다.

 

우리 국민중 5%만이 양반이라는것 청나라도 몽골이 겁이났기에 그들을 승려로 만드는 정책을 썼다.

 

조선도 무기를 버리게하기 위해 5대재까지 급제를 못하면 집안이 몰락한다하여 정릉의 신덕왕후 강씨의

 

집안사람들은 현종떄 세원지우라는 말이 생기게 했나보다.

 

노컷 조선왕조실록이 조선에 대해 비판하는 아주 좋은 내용이 많다 특히 역사교육에 매진해야할 국가가

 

역사교육을 등한시하는 시점에서 조선도 몰랐던 조선이란 책 다음에 나온 훌륭한 내용과 마음의 책이다.

 

90페이지쯤인가 우리 정치권이 잦은 아니면 말고식 폭로는 사실 조선의 관습이었던 셈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동서냉전시절 미국의 메카시즘이 원조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다른이야기지만  사람들은 조선이 망한건 사람들이 당파싸움이라고 하는데 이건 어느나라나 반대파가

 

존재해서 싸운거지 당파싸움이 나라망한거랑은 관계없다 단지 식민지교육일뿐이지...

 

스페인은 잉카멸망시절 2%의 귀족이 95%의 땅을 차지했고 러시아는 90%가 농노였으며 미국인의 인디

 

언멸절사도 끔찍하다. 영국은 똥이 하도많아 거리가 어저고저쩌고란 말이 나돌고 의회에서는 여름인데도

 

템즈강에 냄새가나 항상 창문을 닫고 있었다한다 프랑스도 베르사이유궁전에 화장실이 없어 여자들은

 

봉지를 들고다녔다는 신화같은 이야기 일본도 너무 먹을게 없어 임진왜란부터 1868년 메이지까지

 

인구가 안 늘었고 딸을 낳으면 유관에 파는게 다반사였다하니 메이지이후 다이쇼,쇼와,헤이세이

 

시절까지가 일본최고의 전성기가 아닐까 -난 이제껏 남의 입장만 보았지 자화상은 못본것 같다.

 

선교사들이 조선인의 식습관을 인용하는 부분에선 웃음이 자꾸터져 자화상인데도 웃겼다.

 

아주 자세한 좀더 세밀한 내용까지 파고든 작가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특별히 지적할건 없다 오래도록 보관했다 아이가 크면 물려주어도 좋은 책인것 같다.

 

학창시절 전남대에 가봤는데 학교가 참 좋던데 다시 호남으로 여행갈 일 있으면 가봐야겠다.

 

한가지 느낀점이 있다면 조선이나 대한민국이나 그게그거란걸 느낀다 옷만 서양식으로 바꿔입었을뿐

 

신분제도는 말그대로 아직도 존재한다는 느낌이든다.

 

탄핵역풍이 있었다 나도 그때 씩씩거렸는데 동네어르신왈 '그늠이 그늠이여'하신다 겪어보니 그늠이

 

그늠이었다  잃어버린 10년 그건 김대중,노무현시대가 아닌 노무현,이명박시대가 아닐까

 

.(여보 나 좀 도와줘,김대중 자서전,신화는 없다,- 참조)

 

책 -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를  읽고 몇자 추가로 적어봅니다.

 

제목 " 만약 권율장군이 역모의 수괴였다면?

 

 

학교에서 배운다. 소중화주의 한국은 작은 중국이라는 뜻이다.

 

중국은 여진,조선,일본을 오랑캐라 부르고 한국은 여진,일본을 오랑캐라 부른다.(대쥬신을 찾아서)

 

권율장군은 충신이고 영웅이다. 소설을 한 번 써보자.

 

권율장군이 어디 권씨인지는 모르겠지만 철원권씨라고 가정해본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전 조선이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 시비를 건다.

 

만약 연산군때까지 일본에 공녀를 바쳤던 조선이 중종때부터 자주개혁을 선언하며

 

이를 단절시켰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다시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이 이를 요구해따.

 

10만양병설은 후대에 꾸며낸 허구이나 만일 실미도처럼 잘 훈련된 군대를 권율에게 맡기고

 

총지휘권을 주어 절벌하라 명했는데 낙동강쯤가다 지금은 농번기라 안되고 비가 많이와 활이

 

느슨해지니 안되고 북쪽에 있는 나라가 남족에 있는 나라를 치는건 예의가 아니다라며

 

회군해 개혁을 단행하고 있는 조선왕조를 쓰러뜨리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국명을 권율의

 

고향인 철원으로 하오리까 가야라 하오리까 여쭌다.

 

이에 고무된 도요토미는 가야란 이름이 아름다우니(일본고대사서중 하나엔 임라일본주 즉

 

가야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란 허구적이야기가 나온다.)

 

그후 가야의 태조 권율은 자신의 역모를 감추기 위해 소왜국주의사상을 내세워 조선은

 

작은 일본이라 칭하며 일본은 아버지의 나라라하여 큰나라에 빌붙어 사는 사상인 사대주의로

 

일관한다. 동국여지승람의 동국도 중국의 동쪽에 붙어있는 중국의 속국이란 뜻이다

 

.(전통생태와 풍수지리)

 

아들이 아버지를 칠 수는 없다. 그럼 권율(이성계)이 낙동강(위화도)에서 쿠데타를 일으킨게

 

정당화된다.

 

그리고 다시 공녀제도를 부활시켜 매번 공녀를 뽑아 왜국에 상납하고 그 반작용으로 조혼제도가

 

가야시절 내내 자리를 잡는다.

 

이게 오랫동안 정착되어 1909년 민적법에 의해 성씨가 없는 노비나 백정,망나니,재주꾼들은 기왕이면

 

왕족의 성씨를 갖자며 철원권씨난 김해김씨를 가져가고 이들의 후손들 ㅈ우 성공한 사람들은 진짜족보를

 

사서 종친회에 나온다.(노컷, 조선왕조실록)

 

한술 더떠 어떤 이들은 진짜임을 강조하고자 권씨가 아니라 궐씨라고 고쳐부르기도 한다.

 

몽고는 세계를 휘두른 국가다 원도 몽고족이 세웠고 러시아인도 한꺼풀 벗겨내면 몽고인이라는(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이었다) 말이 있을 정도다.

 

인도 무굴왕조,타타르까지 전세계를 휩쓸었다 황인종을 몽골리안이라 부를는 것고 여기서 유래한다.

 

고려는 세계속에 그것도 몽고 바로 옆에 있다 모든 나라가 복속해야했듯 고려도 항제에서 왕으로

 

 격하되고 앞에 충성충자를 왕에게 붙였으며 공녀를 바쳐야했다 이건 고려만의 일이 아니라

 

 세계적인 일이었다.

 

명은 원을 물리치고 중원만 통일한다 그리고 고려가 감당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건다.

 

물론 여기엔 공녀도 포함된다. 고려 공녀는 공민왕이 등극함과 동시에 없앤제도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힌 고려는 전군의 총지휘권을 이성곙에게 맡기고

 

명을 치라 명한다.

 

고려는 문무를 겸비한 국가로 무인기질이 강했고 여러 전란을 거듭하면서 실전경험이

 

풍부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전권을 갖게된 이성계장군은 위화도에서 우기가 오길 기다리다(욕망하는 지도) 지금은 비가

 

 많이와 활이 느슨해져 안되고 농번기라 안되고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치는건 예의가 아니라며

 

 창끝이 겨눈 방향을 반대로 돌린후 고려를 무너뜨리고 고려에 싸움을 건 적의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새로 생긴 왕조의 국명을 이성계의 고향인 화양이라고 하오리가 조선이라고 하오리까 묻고

 

명태조 주원장은 이에 고무되어 조선이라는 이름이 아름다우니 (고조선은 중국이 지배했다고

 

중국은 아직까지도 우기고 있다) 조선이라고 하거라라고 한다.

 

이 때 고려의 대신 이인임이 이성계의 선조라고 자기네 사서에 기록해두고 후손들이 조선에 대한

 

외교적 히든카드로 써먹도록 조치하고 이를 임진왜란 직적 오키나와 상인들에게 전운이 감돈다는

 

정보를 입수한 명의 관리들이 이 히든카드를 써먹는다.(풍수화/김용운)

 

홍역관과 병부상서 석성의 이야기는 얼굴마담일 뿐이다.

 

공녀를 보자 이성계는 즉위하자마자 공녀제도를 다시 부활시킨다.

 

명태조가 죽을때 순장당한 16명의 여인중 조선왕조에서 보낸 공녀도 끼어있었다고한다.

 

그리고 조혼의 풍습이 조선내내 이어지지만 지금의교과서엔 조선의 공녀이야기나 조혼이야기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온통 고려공녀 충성충자 고려임금 이야기뿐이다.

 

우리 조상들도 항상 그랬으니까 조선이 중국을 사대주의로 떠받들고 사대로 일관하는 건

 

당연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래야 자기들의 죄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개척한 갈라전(동북3성과 함경도일대)도 윤관의 동북9성도 흥남부두일대로

 

왜곡되어 있거나 함경도로 국한되고 교과서엔 온통 세종대왕의 4군6진이야기뿐이다.

 

태종 이방원은 고려군관 출신이고 세종의 대마도 정벌도 사실은 태종의 작품이다.

 

다시 말해 고려의 무인기풍이 세종때까지는 남아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군권은 모두 임금에게 집중시키는 체제를 만들고 공맹사상만을 강조하는 문치시스템에만

 

역점을두어 결국엔 임진왜란과 36년국치를 만드는 원인을 제공한다.

 

몽골제국시절 세계각 몽고에 머리를 조아리며 공녀를 바쳤지만 명나라시절 세계에서 명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공녀를 바친건 조선뿐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진짜 전주이씨임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은 이씨가 아니고 리씨라고

 

주민등록증에 달고다닌다.

 

악인열전을 보자 히틀러가 있다 600만명의 유대인을 독가스로 살해한 인물 독가스를 누가 나치에게

 

팔았는가 유대인재벌 로스차일드가문 그 후손들중 일부와 관계자들은(가난한 아빠 부자 아들 1,2,3)

 

AP,UPI,로이터,워시턴포스트,헐리우드,뉴욕타임스,뉴욕포스트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위인전을 보자 이성계,쿠데타로 집권하고 스페인에서 학살을 일으킨 나폴레옹(지식의 미술관)

 

 모두 역모의 수괴인데 그 잔당들은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었다.

 

너무 작아도 안보이지만 너무 커도 안보인다.

 

나폴레옹은 남의 나라 사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역모의 수괴인 이성계 이제 그만 이완용 같은

 

반열인 악인열전에 올릴때도 되지 않았을까

 

 

 

 

제목 : 동해 일본해 & 성폭력범죄자의 특징

 

 

 

 

요즘엔 전자발찌를 차거나 화학적거세를 한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처벌수위는 비슷하다.

 

그런데 이들은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5분내지10분의 쾌락을 위하여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짖밟아버리는 범죄.

 

5~10분의 자신의 쾌락 떄문에 , 이게 성폭력을 즐기는 이유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페탱원수의 비시정부이다.(먼나라 이웃나라)

 

페탱원수는 1차대전의 영웅이었고 대통령까지 되었다가 2차대전떄 프랑스 온천도시 .

 

비시에 나치가 조종하는 비시정부의 수반이 되어 프랑스 국토의 1/3을 다스리다 전쟁이

 

 끝난후 처벌받는다.

 

독일이 프랑스를 지배한건 3~4년이고 프랑스가 독일에게 문화적 혜택을 받은건 없어도

 

빼앗기거나 당한건 많다.

 

이성계를 보자 한족 부흥운동인 백련교도의 난으로 홍건적이 쳐들어왔을때 무찌르고

 

60년간의 일본남북조시대에 남조의 패잔병들이 남원쪽으로 진군했을때 황산에서

 

대파시켜 전쟁영웅이 된다.

 

여러대째 다루가치집안이었던 그는 (몽골은 왜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나) 명나라 토벌을

 

 명받고 위화도까지 갔다 쿠데타를 일으켜 자주국인 고려를 멸망시키고 만주와 요동이

 

 우리땅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들을 모두 죽이거나 귀향보내고(오백년 도읍지를~)


 명나라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 나라이름을 지어달라고 애원한다.

 

조선은 500년내내 임금의 권한을 수행하려면 중국황제의 허락을 받아야했고 세자를

 

 지명하려해도 그 지명이 유효하려면 중국사신의 허락이 있어야 그 지명이 유효한

 

중국의 유일한 식민지였다.(대장금)

 

500년동안 중국만 바라보며 사대주의 쇄국을 하던 조선은 근대 서양문물을 1543년부터

 

 받아들인 일본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의 이권을 먹으려면 먼저

 

식민지관계를 청산해야되는걸 알기에 강화도조약 1조에 '조선은 독립국'이란걸 명시해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분리독립시킨다.

 

우리는 36년이라 배웠고 지금은 35년이라 가르치지만 사실 50년이 맞고 이건

 

이토 히로부미의 계략이었다.

 

3국간섭을 보자 중국땅을 점령했지만 서양세력이 간섭해 할양받을 땅을 포기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비스마르크를 보자 나폴레옹3세와 전쟁후 파리를 함락시키고 배상금을 요구하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대신 가지라고 했을때 그는 다른 나라들이 간섭할 걸

 

 우려해 돈으로 달라고 한다. (비스마르크평전)

 

만일 2차대전후 미국이 전쟁배상금을 일본정부에 요구했다고치자 그리고 대신

 

조선을 가지라고 했다면 우린 기분이 어떨까 그런데도 우리는 프랑스를 찬양하면서

 

 우리와 같은 역사를 안고 있는 월남은 무시한다.(호치민평전)

 

일본이 조선과 전쟁을 안한 두번째 이유는 군사력도 얼마안되고 아직도 활이

 

주력인 나라 학교도 지어주고 철길과 도로도 놔주어 조선사람들은 좋아하나 나중엔

 

 조선을 삼키기 위한 포석인걸 안중근의사등 몇몇분만 빼놓곤 모른다. (시일야방석대곡)

 

그래서 1909년에 하얼삔에서 그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토의 자제 요청으로 조선을 삼키지 못한 일본은 바로 다음해 조선을 병합한다.

 

500년동안의 식민지배체제,쇄국정책을 이성계가 만들었고 그를 주도한 인물이 그의 군사(참모)

 

정도전인데 지금 이들은 자신들의 계략에 세뇌된 국민들에 의해 영웅이 되어 있고

 

너도나도 전주이씨라 자랑한다.

 

세계의 노예제도가 없어진건 1860~1870년 사이이고 일본도 1872년에 노예제도를 없앴지만

 

워낙 강고한 중국은 1903년에야 없애고 우리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제일 늦은 1909년에야

 

없앨 수가 있었다. (노컷조선왕조실록,청사)

 

누가 그런다 프랑스는 반민족 처벌했는데 우린 못했다고 그들은 3~4년 동안 우리는

 

50년 가까이  지배를 받았는데 상황이 같은가 앞이 안보이는 상황인데 같은가 해방후

 

빨치산들이(권오석) 남한을 전복하려고 총파업,도로,철도 운행중단시키는데 이걸 막으려면

 

남로당같은 공산당을 색출할 능력이 있는 집단은 친일경찰뿐인데(한국보수세력연구) 상황이


같은가 우리의 근대문물은 거의 100% 일본이라는 필터를 거쳐 들어왔다.(돈가스의 탄생)


교육,문화,법률,의료,과학 혈액형별성격테스트도 한국과 일본뿐이다.(헌혈,사랑을 만나다)

 

김구선생님꼐서 해방후 말씀하신다.

 

마지막까지 내곁을 지킨 사람은 넷뿐이었다고.....

 

지금은 보는 사람마다 자기가 거기에 속한단다.

 

이완용은 독립협회 회장이었고 갖은 수난을 당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지만

 

노후생활의 안락함을 위해 변절한다.(한국분,한국인,한국놈)

 

유신반대 독재반대를 하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철은 노후생활의 안락함을 위해 KTX승무원을

 

등친후 먹튀한다.(그대들을 희망의 이름으로 기억하리라:KTX여승무원문집)

 

그리고 우린 어떤 범죄자에겐 감투를 어떤 범죄자에게 전자발찌를 채운다.

 

다시 말해 조선은 중국이라는 다국적기업의 현지인 사장체제였고 36년식민지는

 

 일본이라는 다국적기업의 본사파견제 사장체제였다는 이야기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보자 개막식때 천장철도가 잠시 나온다. 이건 티벳에 대한 식민지배

 

 말뚝박기인데 우린 그런가보다한다.(중국의 거대한 기차)

 

폐막식때 보자 동해를 일본해라 표기하고 있다.

 

중국이 일본에 감정이 더 많을까  한국에 감정이 더 많을까

 

이건 이이제이,원외근공의 오랑캐토벌 수법이다.

 

 

한족은 강대국 요나라를 물리치기 위해 멀리 있는 오랑캐인 금나라를 이용해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여진이 세운 금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후일 원나라를 세운

 

몽골을 이용해 금나라를 멸망시킨다.

 

멀리 있는 오랑캐를 시켜 가까이 있는 오랑캐를 멸망시키는 원외근공전략 폐막식때

 

일본해가 바로 그래서 나온 것이다.

 

지금 양국에게 가장 급한건 서로때리기 서로방어하기가 아니라 전권을 위임받은 양국의

 

대표학자 몇몇이 모여 양국국민이 인정할 수 있는 동해,일본해의 새로운 대안명칭을 찾는 것이다.

 

지금 양국은 명칭문제로 막대한 국력을 외교전으로 소모하고 있고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중국은 어부지리한다.

 

몽고,거란,여진,한국,일본,오끼나와까지 모두 알타이어족인 흉노유목민의 후손들이다.

 

(대쥬신을 찾아서1,2, 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성서의 뿌리 p63,254)

 

오랑캐끼리 싸움붙이는 중국의 이이제이전법에 이젠 그만 놀아나자 가장 좋은예가


임진왜란이다.(풍수화/김용운)

 

중국은 지금 칭기즈칸과 을지문덕을 중국인이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동북공정 고구려사)

 

만주와 요동이 한국땅이란걸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우리는 중국을 어버이로

 

 섬겨야한다는 소중화주의를 자신들의 6년간의 치부를 위해 자손들에게 심어주고

 

 우리는 오랑캐가 아니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몇몇 동이족 반역자들의 논리에

 

 이제는 그만 놀아나자

 

성폭력범이 5~10분의 쾌락을 위해 한 사람의 일생을 망친것과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가

 

 6년간의 왕노릇을 해보는 쾌락을 만끽하기 위해 나라를 500년간 중국의 식민지배체제로

 

만든 역사의 과오에서 이제는 벗어나야한다.

 

시간나시면 단양 도담삼봉에 한 번 가보세요  Re-born 888

 

 

 

3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3 댓글 0
조선의 감춰진 아픔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오* | 2012.05.28 | 추천3 | 댓글1 리뷰제목
이 책은 저자가 조선왕조 500년이라는 화려한 현판을 달고 서술한 역사서가 아니다. 조선왕조의 여유로움을 대변하는 양반들의 도포자락 밑에 숨겨진 비루한 역사를 들춰내고자 작정을 하고 쓴 책인 것 같다. 너무 불편한 진실만 늘어놓다보니 조금은 껄끄럽고 어조가 한쪽으로 치우친 느낌도 있다. 하지만 책의 제목에 걸맞은 톤의 이야기들이다. 나는 우리네 삶이라는 것은 여유로움;
리뷰제목

이 책은 저자가 조선왕조 500년이라는 화려한 현판을 달고 서술한 역사서가 아니다. 조선왕조의 여유로움을 대변하는 양반들의 도포자락 밑에 숨겨진 비루한 역사를 들춰내고자 작정을 하고 쓴 책인 것 같다. 너무 불편한 진실만 늘어놓다보니 조금은 껄끄럽고 어조가 한쪽으로 치우친 느낌도 있다. 하지만 책의 제목에 걸맞은 톤의 이야기들이다. 나는 우리네 삶이라는 것은 여유로움과 구차함을 씨실과 날실삼아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 짠 직물과 같다는 생각이다. 두 부분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배제하고는 우리네 삶이 살아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의 용기로 인해 화려한 조선왕조라는 이름하에 감춰진 아픔들이 빛 속으로 걸어 나와 억울한 원혼의 씻김굿을 할 기회를 얻은 것 같다. 조선 역사속의 아픔조각들을 마주하고 나니 현재의 우리의 삶이, 그 아픔들을 이겨내고 이어져온 우리의 생이 더욱 소중한 그리고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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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7건) 한줄평 총점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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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5점
도현신(xyz12) 자신의 의견과 뜻이 안맞으면 군중속에 숨어 뒷통수에 돌던지는 작가
4명이 이 한줄평을 추천합니다. 공감 4
YES마니아 : 플래티넘 자**국 | 2017.09.05
구매 평점5점
조선왕,양반들의 무능과 폭정 한심하다 못해 욕만 나온다.
2명이 이 한줄평을 추천합니다. 공감 2
********************** | 2020.08.15
평점5점
조선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한단면을 보게 해 주는 솔직한 책
2명이 이 한줄평을 추천합니다. 공감 2
l***2 | 201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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