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라는 유일, 이 착각이 착각으로 회귀하는 시간 앞에서도 어떤 진실함이 그곳에 있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싶습니다. 믿음은 다짐의 한 종류, 대상의 실체와는 별개로 끝없이 마음을 다잡는 일입니다. 거대한 증거를 두고 불신을 선택할 수도, 허상과 무의미 앞에서 믿음 안에 머물기로 작정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라는 우리 안에서 걸어나가는 까닭은 ‘우리’보다도 이 다짐을 신뢰함에 있습니다. 그러니 함께 반투명해지길 원합니다. 반투명은 ‘더 반투명하다’거나 ‘덜 반투명하다’고 할 수 없으니까, 누구도 우리를 측정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투과하거나 투과하지 못하는 각자를 인정하면서, 우리만의 투시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좋은 꿈을 꾸는 아이의 얼굴처럼, 반쯤 사랑스럽고 어딘가 서글픈 표정으로. --- p.28, 이옥토, 〈사랑하는 겉들〉
지금까지 수없이 봤던 ‘사랑-사진’들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떠들어대는 것은 아닐까.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부둥켜 안고, 성기를 부대끼고, 눈물을 흘리고, 절규하고, 때로 입관의 순간까지도 따라붙은 카메라는 너무 수다스러운 것이 아닐까. 그렇게 모든 시작부터 모든 끝까지 끈질기게 카메라로 따라붙는다면, 그 사진은 사랑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을까. 이 허망한 질문 앞에서 사진은, 시게루와 다카코처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 p.24, 박지수, 〈사랑, 당신과 나의 시작과 끝〉
이별은 사랑했던 흔적을 최대한 지우는 일을 우선 수행해야 한다. 그 흔적들에 모종의 잔인성이 온전히 소멸하여 기억이 온전하게 기억되려면 그래야 한다. 사랑했던 순간보다 더 깊이 이 이별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했던 순간보다 더 열심히 이별을 간수해야 한다. 이별을 간수하는 가장 용이한 방식이 ‘자르기’를 통한 삭제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는지. 나는 이것이 니키 리가 던진 마지막 질문이라 생각된다. 사랑하는 줄 알았던 가장 소박한 순간들을 비예술적으로 연출하고, 연출된 타인의 시선 속에 들어가 천연덕스럽게 피사체가 되는 것. 피사체가 된 나는 내가 아니라는 단정은 짓지 못하겠다. 그걸 빼면 도무지 나는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아서. 사랑을 사랑하는 사랑이 사랑이 아니지 않냐는 말도 그렇다면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걸 빼면 도무지 나는 사랑을 한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이별과 이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별이 뭐가 나쁜가. 이별과 사랑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 p.14, 김소연, 〈사랑을 사랑-하는-해온-했던 사랑〉
이런 생각을 곱씹어가며 난 〈사랑은…〉을 통해 사랑에 대한 정의보다 단상斷想에 대한 정의를 좀 더 챙겨보고 싶었다. 그간 이 마법의 단어는 세심함의 단초, 일상성을 훈훈하게 표하는 수단이 되어왔다. 특히 사랑에 대해선 더욱더. 하지만 단상의 정의가 마치 라디오에서 시시콜콜하게 들려오는 솔깃한 말주변 정도로 축약되고 말 때, 우리는 단상을 재간 넘치는 삶 속 사연의 일환으로만 대하고 말 것이다. 단상이란 과연 그런 것일까. E. J. 메이저와 그녀의 수신인들이 만들어낸 이 메일 아트 프로젝트는 그저 사랑의 ‘단상’을 끄적거리며 이야기하기 위한 문자적 작업이었을까. 〈사랑은…〉은 매대를 아름답게 장식 중인 소박하고도 제목만 읽어도 금방 지혜로워질 것 같은 착시 어린 에세이의 기운 대신 다른 질문을 우리에게 건네고 있는 건지도. 우리는 정녕 흘러가는 생각을 끊어버릴 또다른 생각의 시간을 부여받고 있을까. 우리는 세간이라는 시간에 치우치지 않고 세간을 거스르는 삶과 사랑에 대한 시를 표현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 p.43, 김신식 〈저는 사랑보다 단상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그러나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낸다. 질문도, 고통도, 그리고 희망도. 죽기 한 해 전에 찍은 이 흑백 폴라로이드 사진의 어두운 테두리는 마치 산 자와 죽은 자들의 영토를 가르는 차갑고 육중한 경계처럼 느껴진다. 카메라 앞에 선 수전 손택은 피안의 세계로 떠난다. 그러나 카메라 뒷편의 사진가 애니 레보비츠는 여전히 세속에 남겨진다. 수전을 사랑했음에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함께 떠날 수도 머무를 수도 없다. 산 자들의 세계에서 혼자 남아 풍화를 견디는 것이 애니의 몫이다.?
사랑하는 이를 찍은 사진은 우리가 결국 다른 몸을 지닌 타인이라는 것을 잔혹하게 상기시킨다.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한 명이 카메라 앞에, 한 명은 뒤에 서야만 한다. 아니 설령 둘이 함께 카메라 앞에서 서로를 절박하게 껴안더라도, 혹은 심지어 격렬하게 교접하는 모습을 찍더라도 사진은 그것이 결국 두 개의 다른 육체가 만나서 벌이는 일이라는 것을 정확히 보여준다. 살은 섞이지 않는다. 우리가 섞을 수 있는 것은 그저 한 모금의 체액과 타액에 불과하다. 다른 운명을 지닌 두 개의 몸은 카메라 앞에서 잠깐 만났다가, 각자의 방식으로 늙어갈 것이다.--- p.76, 김현호 〈애니를 잃은 수전은 사진 속에서〉
나는 이제 이렇게 점점 불쌍해지는 일만 남은 것일까. 정신 없이 연민에 빠져 서울에 도착했다.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하루 보내고 합주를 하려고 그 다음 날 집을 나서는 길에 ‘누가’를 마주쳤다. ‘누가’는 등을 돌리고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나와 있었을까. 귀마개도 하고 장갑도 끼고 패딩 조끼도 입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줄넘기 하는 걸 내가 본 것만 일 년인데 이제는 연달아 한번에 두 바퀴씩도 돌리고 한 발씩 번갈아가며 할 줄도 알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누가’는 여전히 자꾸만 제 발에 걸려 멈추는 줄을 다시, 다시, 다시 넘기고 있었다. 그때마다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출렁했다.
그것을 보는 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눈물이 투투 튀어나왔다.
그날 나는 무대라는 것이 뒤통수 쪽으로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쪽에서는 어쩌면 내가 초라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 p.135, 요조 〈정말 재미있다〉
우리는 코모도 호텔로 가는 길에 콩코드 호텔을 우연히 발견했다. 버려진 수영장에는 낙엽이 가득했고 갈라지기 시작한 아이보리색 벽면에서 시멘트 가루가 떨어졌다. 오후 네 시였고 기울어진 햇살이 호텔 뒤편 산책로를 비추었다. 한기와 상우는 외투를 벗고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어떤 우연이 있고 우연들이 겹쳐서 일어나면 그것을 우연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미 일어난 일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일이 겹치는 걸 좋아하고 일을 생각하고 바라보면 어느 순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서히 일의 중력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게 보인다. 그러니 어디로든 가야 한다. 무엇이든 읽어야 하고 어떤 이야기라도 해야 한다. --- p.217, 정지돈 〈팬텀 이미지〉
이영준 : 원리나 내부를 이해할 공학적 지식 없이도 기계는 그 물질적 존재감만으로도 경이로운 충격을 준다. 프로펠러는 치밀하고 필연적인 공학적 계산의 산물인데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워지는가? 물론 미학은 아름다운 것 뿐 아니라 추한 것, 놀라운 것, 끔찍한 것에 이르는 미적 경험을 모두 다룬다. 예를 들어 12세기에 놀라움과 충격을 준 기계는 자동인형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자동인형이 어떤 존재자로서 내 앞에 섰을 때 그걸 무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항공기나 기관차와 같은 것들은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20세기 초반은 이 존재감에 대해 두려움과 찬탄을 함께 느끼던 시기다.
--- p.214, 이영준·김현호 〈사진집 아나토미: 기계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