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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의 탄생

모서리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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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8년 02월 08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404g | 145*205*30mm
ISBN13 9788954438315
ISBN10 8954438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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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이 사라진 눈두덩에 어둠이 고이고 곧이어 빠르게 뛰던 심장이, 간이, 쓸개가 사라진다. 이제 쓸 만한 내장이 모두 빠져나간 몸에서는 피이, 피이, 바람 빠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바람의 웅성거림처럼 사람들이 속삭인다. 외딴집 쓰레기통 옆에서 아기 시체가 나왔다고. 시체는 끝 여름, 도로변을 굴러다니던 매미 껍질같이 속이 텅 비어 있었다고. 비어 있던 몸이 어쩐지 투명하게 보이더라고. 나쁜 냄새가 퍼지는 것처럼 거리가 술렁인다.
---「당신은 말한다」중에서

당신은 이런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당신은 당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조금 더 드라마틱하게 연출되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갑자기 아기를 잃어버린 사람들과 아기를 데려간 사람들의 배후, 그 배후에 기생하는 무수한 이야기들. 그것이 양산되는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당신은 아주 잘 알고 있다.
---「당신은 말한다」중에서

나는 그렇게 매일 다른 당신을 만난다. 그러나 모두를 기억하지 않는다. 공평하게 기억하고 공평하게 잊는다. 그렇지만 내게도 명치와 같은 것이 있어서 이따금씩 툭, 하고 걸리는 사람들이 있다. 철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 살지만 똑같은 날들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나는 그들에게 단 한 번도 문 닫은 적 없는 카페고 술집이다. 모든 밀어와 욕설, 말하지 못하는 비밀과 진실을 엿듣는 조용하고 긴 의자, 나는 벤치다.
이름이 네 개인 여자를 안다.
---「네 개의 이름」중에서

여자는 어쩐지 다시는 평안한 어느 날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예감한다. 몸에 난 균열과 마찬가지로 여자의 가슴 어디에도 쩍, 하고 금이 간 것을 깨닫는다. 붙일 수도, 꿰맬 수도 없는 좁고 날카로운 틈. 하지만 여자는 그토록 다행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다. 언젠가 그 틈을 빠져나가면 만나게 될 것들에 대해 몹시 알고 싶어진다.
---「점심의 연애」중에서

풍선을 부는 것처럼, 너는 가벼운 마음으로 나에게 생을 선사했다. 네 아비와 어미가 너에게 부여했던 그것처럼, 내게도 어쩔 도리가 없는 삶이 생겨났다. 네가 튜브에 바람을 불어넣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온몸은 따뜻한 숨으로 가득 채워졌다. 기대에 부푼 너는 더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린 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보다 조금 더 뜨겁고, 조금 더 단 바람이 나의 은밀한 곳까지 밀려왔다. 풍만한 가슴과 완곡한 허리 곡선이 드러났다. 그리고 마침내, 가파른 숨이 가늘고 긴 발목에까지 이르렀을 때 너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신음처럼 내 이름을 뱉어냈다. 엄마.
---「사막의 뼈」중에서

허공에 동그란 원을 그렸다. 의자 위에 올라서서 까치발을 하면 알맞게 얼굴이 들어가는 높이. 그 높이에 손가락 굵기의 밧줄을 매듭져 걸어놓은 이미지. 텅 빈 방 가운데 누워 있는 1102호는 허공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상상했다. 상상 속의 밧줄은 묵직한 무엇인가가 걸려 있기라도 한 듯 추처럼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내는 그 줄에 몇 번이나 목을 걸어봤을까. 머릿속에 아내의 낯선 모습이 떠올랐다.
---「미싱 도로시」중에서

남자의 머릿속에 모든 것을 뒤엎는 단어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뒤집어진 뱃머리를 깨고, 악다구니를 치듯 엉망진창으로 뒤엉킨 사건의 전말을 깨고, 주기도문처럼 불경처럼 외던 시오라팔룩을 깨고, 깨고, 깨고. 남자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 남자는 온몸을 비틀며 오열했다. 마치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 같았다. 여권을 쥔 손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머릿속에 도돌이표 같은 단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극」중에서

허공에 매달린 전구 뭉치를 올려다보고 있는 너의 머릿속에 물살을 가르는 정자의 미끄덩한 머리와 꼬리가 스친다. 그렇게 억지스러운 매치도 아니라고 잠시 생각한다. 전구 뭉치와 투명하고 푸르스름한 정자들의 뭉텅이. 검은색 플라스틱 통에 담겨 있을 너의 그것. (……) 상상은 하나의 이미지를 밑도 끝도 없이 분열시킨다. 너를 닮은 얼굴 하나가 흐릿해지더니, 마침내 까만 머리통이 투명해지기 시작한다. 몸통에 붙어 흐느적거리던 팔과 다리가 서서히 짧아진다. 이윽고 올챙이를 닮은 꼬리가 생겨난다.
---「홀로, 코스트코」중에서

처음 여자의 그곳을 봤을 때 나나는 조금 웃었다. 여자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여다본 기분이 들었고, 생각보다 초라하다는 생각을 했다. 딱 여자의 나이만큼 검고 붉은, 작은 구멍은 탄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이 여자는 화가 났을까?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일까? 나나는 여자의 거웃 위에 따뜻한 스팀 타월을 올렸다.
---「브라질리언 왁싱」중에서

인어였다. 분명히. 암흑의 물속에서 저 혼자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유영하던 것. 사람의 몸통에 물고기 꼬리를 가진 것을 인어라고 부른다면 분명히. 기괴한 물고기라고 생각한 그것은 움푹 들어간 눈꺼풀을 껌뻑거리며 한을 향해 헤엄쳐 오고 있었다. (……) 미끄덩하면서 동시에 꺼칠한 비늘의 촉감이 손끝에 선명하게 맺혔다. 그것의 팔에 매달린 채 뭍을 향해 유영하고 있었다. 낮고 고요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가서 살아남아, 물거품이 되지 않게.
---「인어」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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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희의 소설에서 고통은 “쓰지 않던 근육을 썼을 때 나타나는 증상”과 비슷하다. 큐비즘적인 방식이라고 이야기했으나, 그 핵심은 정당한 신음조차 지르지 못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자기 세계를 회피해온 사람들에게 마치 요가 수업처럼 굳은 자신의 몸을 재발견하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모서리의 탄생』은 이처럼 타자의 입체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자기 내부의 고통을 보다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한 통증의 모음집이다. 딱딱해진 언어의 근육을 다시 자극하고 비로소 세계를 제대로 발음하기 위해 목소리를 찾으려는 날카롭고 섬세한 시도이다.

박인성(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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