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좋은 사회란 사회 구성원들 한 명 한 명이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사회다. 그런데 매우 상식적인 이 말이 현실세계에서는 참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어른이든 아이든, 여자든 남자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기혼이든 비혼이든,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사람은 각기 다른 존재의 향기를 지니고 살아간다. 어른이라고, 아이라고, 여자라고, 남자라고, 모두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얼굴과 목소리가 다르듯, 개별인은 각기 다른 자신만의 존재 방식이 있다.
다양한 존재 방식을 그대로 인정하고 서로 포용하는 것은 삶을 보다 의미 있고 행복하게 만든다. 여성혐오, 성소수자혐오, 이슬람혐오, 장애혐오 등 다양한 얼굴의 혐오들은 각각의 존재 방식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줄기가 있다면, 그것은 존재 방식의 획일성을 강요하는 폭력성을 넘어서 모든 개별인들이 서로를 온전한 존재로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 p.7
변혁적 낮꿈은 나와 너, 우리와 그들이 ‘상호연관된 존재’라는 인식으로 구성된다. 현재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누군가가 배제되고 차별받는다면, 그 배제와 차별의 폐혜는 결국 나의 삶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에서 나온다. 나의 삶은 너의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살아감이란 결국 ‘함께-살아감’이기 때문이다. --- p.22
학생이나 주변 사람들이 일을 시작할 때 내게 그 일이 실현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어 하면 해주는 말이 있다. 실현 가능성과 불가능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당신이 만들고 창출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실현 가능한지 아닌지를 묻기 전에, ‘왜’ 그것을 하고자 하며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 치열하게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열정이 포기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하고 ‘선언’하라고 한다. --- p.26
희망과 절망, 낙관과 비관은 서로 반대말이 아니다. 그 두 축은 나선형처럼 얽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존재와 삶 속에 자리 잡고 있다. 희망이나 절망은 쉽사리 주어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살아 있음의 엄숙한 과제는 값싼 희망이나 성급한 절망이 아니다. 한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가 해야 하는 일은 거창한 희망도, 암흑 같은 절망도 아니다. 단지 이 땅에 두 발을 굳건히 딛고서, 자기만큼의 ‘한 걸음’을 떼는 일일 뿐이다. --- p.35
여기서 우리가 직시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페미니즘은 이제까지 많은 사람이 절대적 진리라고 여겼던 것에 ‘근원적 NO’를 제기하는 것이기에 ‘불편한 진실’이라는 점이다. ‘진실’이지만 그 진실을 대하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불편을 느끼고, 거부하고 싶은 생각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논의할 때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것은 ‘우리-그들’ 또는 ‘옹호자-적대자’라는 상충적 대립의 축을 굳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다 나은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각기 지니고 있을 ‘인식론적 사각지대’를 어떻게 일깨우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 p.103
나는 늘 ‘평범한’ 모습이던 이 학생이, 자신의 열 손가락 손톱에 매니큐어를 하고 왔다는 사실보다 그것에 대한 주변 반응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 누구도 매니큐어에 대해 별다른 질문이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열두 명이 둘러앉아 있는 세미나 형식의 수업이니, 그들의 ‘무반응’은 매니큐어 한 남학생의 손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에 대한 존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p.147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이유가 경제적이든 또는 여타의 다른 이유에서든 주장의 정당성은 찾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생명과 연관된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교육권?학습권과 연결된 ‘인권’의 문제이며, ‘정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선 물어야 할 것은 ‘토론의 주제’에 관한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토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주제는 토론을 거친 투표를 통해 그 의미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장애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을 위한 교육시설의 문제다. ‘모든’ 인간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 p.174
지하철 화장실 입구 한 귀퉁이에 서서 허공을 향해 빈 물병을 계속 휘저으며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 여자가 있었다. 허공을 향해 반복하는 그 몸짓이 너무나 절절해 보여서 길을 가던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 절실한 몸짓을 통해 그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어떤 갈망을 간절하게 품고서 허공을 향한 몸짓을 반복하는 걸까. 끝없이 오고 가는 지하철역의 인파는 아무도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몸은 ‘이곳’ here에 있지만 ‘저곳’ somewhere else에 존재하는 사람, 그래서 그녀는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 ‘살아 있는 죽은 자’다. --- p.181
나는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신이 최초의 인간이라는 아담과 하와를 신이 창조했을 때, 두 사람의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갓난아기였다면 누가 그들에게 젖과 음식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키웠을까” “아기가 아니라 성인으로 창조되었다면 도대체 몇 살이었으며, 그들의 피부색은 어땠을까?” “신은 그들과 어떤 언어로 소통했을까?” 대부분의 학생은 이런 질문을 처음 받아본다고 한다. 물론 누구도 이 질문에 ‘절대적 답안’을 제시할 수는 없다. 성서는 ‘사실적 묘사’를 담은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 p.210
대형교회의 세습은 종교가 ‘구원 클럽’의 의미로 전락하였음을 의미한다. ‘구원’을 담보로 권력의 중심에 선 종교지도자나 단체는 자신들의 이득과 권력 확장을 ‘신神 사랑’으로 옷 입힌다. 정치인들이 권력 확장의 욕구를 ‘나라 사랑’으로 가장하는 것과 같다. 이 점에서 종교와 정치는 이란성 쌍둥이 같다. 종교는 선-악, 구원-심판, ‘신 사랑’을 창출해내고 정치는 친구-적, 평화-위기, ‘나라 사랑’의 서사를 지속적으로 창출해내면서 다층적 권력의 유지와 확장을 끈질기게 모색한다. --- p.215
초·중·고·대학생 사이에서도 한 학년만 높아도 저학년에게 ‘갑질’을 서슴지 않는다. 교수는 학생에게, 선배는 후배에게, 남자는 여자에게, 직책이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에게, 부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비장애인은 장애인에게, 어른은 아이에게, 아파트 주민은 경비원에게 다양한 얼굴로 ‘갑질’을 한다. --- p.298
우리 인간은 대부분 조금씩 이기적이고 계산적이지만 또 그런대로 괜찮은 존재다. 나는 여타의 ‘영웅적 서사’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변혁이나 저항 등의 역사적 사건들은 사실상 소수의 ‘영웅’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조금씩 부족한 개인들이 ‘인간됨’의 모습을 지켜내면서, 아주 작은 귀퉁이에서 자신과 타자들에 대한 책임을 다할 때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택시운전사」에서 나는 그러한 ‘탈영웅적 저항’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 p.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