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익산은 미륵사지 석탑에서 사리봉영기가 발견되기 이전에도 수없이 다채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조선시대 실학자들은 익산을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국가인 고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남쪽으로 이동해서 정착한 마한의 중심지로 믿고 있었다. 또 익산은 고구려 유민인 안승이 세운 보덕국이 있던 땅이며, 견훤이 백제가 시작된 곳이라며 후백제의 정통성을 삼으려 했던 땅이기도 하다.
책에서 다루는 왕궁리유적, 제석사지, 미륵사지, 쌍릉을 둘러싼 다채로운 층위의 이야기들은 왕도 익산, 역사도시 익산을 이해하고 익산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데 작은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제1장 익산 지역 고적조사의 여명
“익산의 유적·유물에는 100년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흔적이 응축되어 있다.”
100년 전 익산이 어떻게 발견되고 그 후 어떻게 고도 익산, 왕도 익산이라는 역사상이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본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의 근대적 고적조사 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익산이 어떻게 인식되었고, 또 단편적 유적 조사 이후 익산의 주요 유적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어갔는지를 언급한다.
1910년 일본인 관학자(官學者) 세키노 다다시 팀에 의한 미륵사지·왕궁리유적·미륵산성 등의 조사, 1915년 미륵사지 석탑의 ‘시멘트’ 보수 공사, 1917년 야쓰이 세이이쓰 팀에 의한 익산 쌍릉의 발굴, 우현 고유섭의 미륵사지 석탑과 왕궁리 석탑 연구, 해방 이후 익산에 관한 최초의 논문인 이병도의 서동설화 연구, 1960년대 왕궁리 석탑의 수리와 사리장엄구의 발견, 백제 무왕 대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내용이 기록된 국내외 유일한 사료인 교토 쇼렌인 사찰의 『관세음응험기』의 발견, 1973년 원광대학교 부설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족과 익산 지역 선사·고대사 연구 핵심 센터로서 연구소의 주요 활동, ‘익산문화권’ 개념의 등장, 정부에 의해 진행된 ‘백제문화권 개발 사업’ 등을 정리하고 있다.
■ 제2장 익산의 백제 왕궁과 사원의 조사
“왕궁리유적과 제석사지는 사비기 백제 왕궁과 사원의 특징이 집약된 곳”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등을 얘기할 때 미륵사지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왕궁리유적과 제석사지를 알아본다. 1976년 시작되어 30년이 넘는 왕궁리유적의 발굴 과정 동안 이 유적에 대한 시각의 변화, 왕궁리유적을 통해 밝혀진 백제 왕궁의 특징에 대해 소개하며, 왕궁 동쪽에 조영된 제석사지와 그 폐기장 유적(선사시대 조개더미를 제외하고 역사시대 유적 중 유일한)의 발굴 성과도 함께 설명한다.
왕궁리유적에서 발견된 공방지, 왕궁리 공방지 동서 석축 배수로 남쪽에서 발견된 3기의 수세식 대형 화장실(최초로 확인된 삼국시대 화장실 유적) 유구와 그 내부 출토 기와·토기, 왕궁리 5층 석탑과 그 사리장엄구 등을 통해 왕궁리유적 성벽의 축조나 왕궁리유적의 유구·유물들이 7세기 초까지 그 시기가 소급되며 백제 멸망을 전후한 자료들과 명확히 구분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익산 지역 고대사 서술은 큰 전환을 맞게 된다. 이후 왕궁리유적 발굴은 사비기 백제 왕궁의 실상을 밝히는 방향으로 추진되었고, 일례로 왕궁이 사원으로 바뀌는 과정이 논의 및 연구 주제로 부각되었다. 이를 통해 익산 주요 유적의 장기적 발굴에서는 7세기 전반 익산에 부여에 버금가는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었음이 점차 드러나게 되었다. [어떤 연구자들은 익산을 별도(別都), 행궁(行宮), 이궁(離宮), 별부(別部)로 보기도 하고, 무왕이 익산 천도를 계획했지만 실제 단행하지는 못했다는 의미에서 ‘익산 경영(經營)’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 제3장 미륵사지 발굴과 동탑의 복원
“미륵사지 발굴은 5개년씩 총 3차에 걸쳐 이루어져 1994년 말에야 끝이 났다.”
1980년부터 1994년 말까지 15년간 진행된 미륵사지 발굴의 성과, 동원 석탑의 복원 과정, 도립 미륵사지유물전시관의 건립 과정 등 미륵사지 서탑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현하기 전까지 이루어진 미륵사지의 발굴·보존·활용 상황을 차례로 살핀다. 동탑 복원의 문제와 한계도 들여다본다.
미륵사지 동원과 서원 사이에 배치된 중원 금당지와 목탑지의 발견으로 확인된 삼원병렬식 가람배치(각기 중문·불탑·금당으로 이루어진 동원·중원·서원의 3개 사원을 나란히 병치해 1개의 대사(大寺)를 만드는 가람배치)는 미륵사지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고대 사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이다. 미륵사지 발굴 과정에서 7만 810평(약 23만 4,083제곱미터)이나 되는 넓은 유구 면적이 조사되었고 1만 8,710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동탑을 7층과 9층 2개 안 중 9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하기까지의 과정과, 복원 이후 과거의 옛 모습이 아니라 20세기의 현대식 건축물을 세웠다는 혹평을 면치 못하는 사정이 자세히 밝혀진다. 이러한 미륵사지 발굴은 1997년 미륵사지유물전시관(2019년 2월 국립익산박물관으로 승격, 2019년 말 개관 예정)의 설립으로 이어지며 문화유산의 보존·활용·전시·교육에서 긍정적 의미든 부정적 의미든 다른 유적들의 선례가 되었다.
■ 제4장 미륵사지 서탑의 보수와 선화공주
“사리봉영기에는 백제 왕후로 사택적덕의 딸만 등장할 뿐 선화공주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1999년 4월 문화재위원회에서 미륵사지 석탑(서탑, 국보 제11호)의 해체 수리 방침이 결정되고, 서탑 해체 수리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서탑 남서쪽 모서리에서 발견된 석인상, 서탑의 사리용기인 금동제외호·금제내호·유리병과 진신사리, 6개 청동합과 각종 공양품 등), 특히 미륵사지 서탑 사리장엄구의 특징과 역사적 의미, 이 사리장엄구 발견 이후 모든 논의를 휩쓸어버린 선화공주 실체/실존 논쟁의 대표적 견해들을 차례로 소개한다.
2009년 1월 서탑 해체 과정 중 ‘639년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자 백제 왕후’가 미륵사 발원의 주체로 기록된 사리봉영기가 발견되면서 그간 미륵사의 발원자로 알려진 선화공주의 실존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미륵사지와 사리장엄을 주제로 2009년 한 해에만 최소 6차례의 학술대회가 열렸고 30편 이상의 논문이 쏟아졌다. 백제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문헌사, 고고학, 미술사, 불교사 연구자들은 모두 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기서 가장 큰 관심은 단연 선화공주의 실존 여부였다. 지금까지도 학계의 반응은 크게 둘로 양분된다. 하나는 백제 당대인이 남긴 1차 기록을 믿고 선화공주의 실체를 부정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639년 당시 백제왕후가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왕후라고 해도 백제 무왕의 왕비가 여럿일 수 있다는 점에서 선화공주를 여전히 긍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전자 측은 백제 무왕 대에는 백제-신라 간 전쟁이 빈번해 백제와 신라 사이에 혼인이 맺어질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후자 측은 국가 간 혼인은 정치적·외교적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양국 사이에 긴장관계가 높아질수록 역으로 혼인이 더 쉽게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고 반박한다. 이 내용은 제5장으로 연결된다.
■ 제5장 쌍릉의 재조사와 백제 무왕
“소왕묘의 분명한 피장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익산 쌍릉(대왕묘와 소왕묘)의 피장자(被葬者) 문제를 이야기한다. 1917년 일제강점기 당시 이루어진 쌍릉 발굴의 재보고서가 거의 100년 만인 2015년 12월에 간행되면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과 대왕묘 재발굴을 통해 그 무덤 주인이 밝혀지는 과정을 알아보고, 나아가 소왕묘의 무덤 주인을 밝히는 일이 선화공주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핵심임을 강조한다.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1920년 작성한 쌍릉 발굴 보고문은 본문 1쪽, 사진 2컷, 도면 2컷이 전부였다. 이에 국내외 할 것 없이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수집·정리하려는 노력을 거쳐 나온 국립전주박물관의 『익산 쌍릉』 보고서에서는 쌍릉의 피장자가 무왕 부부가 아닌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대왕묘가 선화공주의 묘일 가능성이 크다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는 학계의 통설(대왕묘=무왕의 묘, 소왕묘=무왕 왕비의 묘)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미륵사지 사리봉영기에서 시작된 선화공주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이 이제는 쌍릉의 피장자 문제로 옮아가게 된 것이다. 이를 기화로 2017년 9월 대왕묘의 재조사(익산시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착수하게 된다. 이 대왕묘 재조사에서 부여 최대 고분보다 더 큰 대왕묘의 석실에서 발견된 인골의 분석 결과는 대왕묘가 백제 무왕의 무덤일 개연성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또한 대왕묘와 소왕묘에서 출토된 밑동쇠와 山자형 장식 세트의 제작 기법 변화 추이를 통해 소왕묘 유물이 대왕묘 유물보다 조금 더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따라서 소왕묘가 대왕묘보다 먼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소왕묘의 피장자가 적어도 서탑 사리봉영기의 ‘사택왕후’는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사택왕후는 대왕묘에 묻힌 무왕보다 더 나중에 죽었기 때문이다. 대왕묘의 묘도(무덤길) 조사를 통해 대왕묘가 그 피장자가 살아생전에 미리 준비한 수릉(壽陵)이고, 또 무왕이 사비기 왕과 왕비의 무덤이 주로 축조된 부여 능산리 일대가 아니라 익산에 수릉을 만든 것이 무왕의 익산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 에필로그
“이제 비로소 문화유산의 보존 원칙이나 보존 철학에 대해 고민하는 직접적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익산과 부여 두 지역에는 모두 ‘서동공원’이라는 이름의 공원이 있다. 익산 사람들은 마를 팔던 어린 서동이 왕위에 오르기 전 성장한 곳이 익산인 만큼 익산에 서동공원을 두는 게 당연하다고 말한다. 부여 사람들은 수도 남쪽 연못가에서 무왕의 어머니가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현재의 궁남지 옆에 서동공원을 만드는 게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말한다. 지역사회에서 이처럼 문화유산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이유는 무얼까? 그것은 문화유산의 발굴, 보존·정비, 특히 활용 문제가 고도의 정치성이 포함된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문화유산의 발굴, 보존·정비, 활용 논의가 점차 각 지역의 특수성만을 강조해 지역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와 함께,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 이후 나온 감사원의 지적과 문화재청의 반박의 입장을 살핌으로써 문화유산의 보존 원칙이나 철학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장이 펼쳐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