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제자가 기업에 들어가 하는 일은 인격적으로나 경영학적으로나 한참 부족한 창업주 아들, 딸의 뒤치다꺼리였다. 아니, 이 말은 거짓이다. 뒤치다꺼리에도 서열이 있다. 입사하고 20년 정도 초고속 승진을 해야 그것도 할 수 있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제자가 기업에 들어가 서 하는 일은 엄밀하게 ‘창업주 2,3세 뒤치다꺼리하는 이들의 보 조’다. 한마디로 꼬붕의 시다바리다.
제자의 한마디에 나는 생각했다. ‘한국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책을 써보자.’
나는 ‘스토리텔러’다. 같은 팩트를 놓고 누구는 정치적으로, 누구는 경제적으로 해석하지만 나는 이야기로 푼다. 유머와 해학을 가미한 스토리로 21세기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을 헤집는 것. 이게 이 책을 쓴 목적이다.
이야기는 이야기다. 사실도 주의도 구호도 아니다. 그러나 [왕 좌의 게임] 시즌 8의 마지막 회에서 티리온 라니스터가 말했듯 “역사는 이야기가 있는 자가 이끈다.”
나는 되도록 솔직하게 이 글을 썼다. 에두르지 않았고 조심하지 않았고 따지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모른 채 어딘지 불편하고 불안하고 억울한 시민들이 이 책을 읽고 “속이 다 시원하다”고 한마디해주면 좋겠다.
만약 당신이 부자와 권력자와 건물주라면 이 책의 이야기 소재가 되는 것에 너무 민감해하지 말라. 당신은 돈과 힘과…… 그리고 빌딩이 있지 않나.
--- 「들어가는 말」 중에서
중국 역사를 보면, 혼란한 시대에 꼭 등장하는 혹리(酷吏)가 있다. 이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어디 세금 더 뜯어낼 데 없나?’만 연구하고 다녔다. 이런 작자들이 판치면 얼마 뒤엔 꼭 나라가 망했다.
아마 대학에도 그런 직원이 있을 거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아니, 체육관에 학생은 공짜로 들어간다고? 무슨 소리야? 이 좋은 체육관을 왜 공짜로 쓰게 해? 학생 1인당 월 3만 원만 받아도 1년에 십수 억이 생기는데! 여기도 회비 때려!’ 뭐 요런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직원 말이다.
제발 학생들 상대로 장사하지 마라. 우리나라의 명문 사학은 서양 선교사들이 헌금으로 세웠다. 그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갈 때 땡전 한 푼 받지 않고 고스란히 한국민에게 학교를 기부했다.
가난하지만 배우려는 젊은이들에게 기꺼이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내주라는 게 그들의 뜻이었다. 연세대도, 세브란스도 그런 숭고한 뜻으로 세웠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학생들한테 푼돈을 뜯어내면 되겠나! 최소한, 체육관은 무료로 이용하게 하라. 기숙사도 실비만 받아라. 주차비도 학생과 교직원에겐 좀 받지 마라.
우리나라에서 대학은 너무 폐쇄적인 구조다. 지역 사회에 대한 기여는 아예 안 하거나 최소화한다. 내가 살던 쌍문동에는 근사한 운동장을 가진 덕성여대가 있었는데 몇 년 전 아이와 함께 들어가려다 제지를 받아 ‘대학에 일반인은 못 들어가는구나’ 하고 말았다.
도서관은 어떨까? 대부분의 대학 도서관 규정은 다음과 같다.
“일반인은 출입하여 책을 ‘볼’ 수는 있으나 책상에 앉아 ‘자습’은 못 한다.”
이건 그냥 들어오지 말란 얘기다. 연세대의 경우, 일반인이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도서 대출을 하려면 1년에 30만 원의 회비를 내야 한다. 한마디로 대학은 한 학기에 기백만 원씩 내는 학생들의 것이지, 지역 주민의 것은 아니란 소리다. 그런데 어떤 교수들은 “대학은 학생의 것이 아니라 교수의 것이다”라고 지껄인다(사실, 알고 보면 맞는 말?).
--- 「빚 구덩이의 시작, 대학」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3루타를 친 줄 알고 살아간다.”
미국 텍사스 댈러스 카우보이 미식축구팀 감독으로 1995년 팀을 슈퍼볼 우승으로 이끈 전설적 감독, 베리 스위처가 한 말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인간들이 많다. 나는 부자라고 무조건 비난하거나 사장이라고 무조건 욕하지 않는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존중한다.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든 자산가들이 내 주변에 꽤 있다. 이들은 주로 청소년기에 집안이 몰락하거나 어떤 계기로 자기 집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깨닫는다. 빚뿐인 가정을 살리기 위해 이 악물고 돈을 모아 수십 억 재산을 만든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존경받을 만하다.
부모덕에 잘살게 된 사람들은? 존경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다. 그 운명이 부러울 뿐이다. 재벌 2, 3세를 보면서 ‘나도 든든한 빽 하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불끈불끈 솟구치는 젊은이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럼 도대체 나는 이 책을 왜 쓰는가?
이 사회의 가진 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서다.
“적당히들 하시오, 적당히들!”
영화 [광해]에서 광해군 역할을 맡은 이병헌이 한 대사다. 신하들이 “명 황실 앞으로 은자 30냥을 보내자”, “이런저런 예물을 보내자”, “2만의 군사들을 파견하자”라고 하자 광해는 “도대체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요!” 하면서 외친다. 이때도 신하들-있는 자들-은 백성 2만 명을 사지로 내몰자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제 새끼들 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있는 자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없는 자의 자식 들이 군대를 간다. 2015년을 전후해 KBS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삼성가의 군 면제 비율은 73퍼센트, 재벌가 평균은 33퍼센트, 일반인의 군 면제 비율은 6퍼센트다. 병장 제대한 나를 비롯해 사 병으로 군대를 다녀온 여러분은 결국 재벌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뺑이를 쳤던 거다. 아니라고 말할 자, 그 누구인가!
--- 「나도 든든한 빽 하나 있었으면」 중에서
인간은 굉장히 민감한 존재다. 말 한 마디에 상처받고 표정 하나에 힘을 얻는다. 호모 사피엔스는 모두 세심한 영혼의 소유자들이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무딘 생명체가 아니다. 인간만이 가진 이 속성이 바로 존엄성이다.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는 한, 자본주의는 파멸로 갈 수밖에 없다. 이제는 자본주의도 인본주의도 아닌, 자본과 인간의 존엄을 조화롭게 추구하는 ‘인자본주의(人資本主義)’의 길을 가야 하지 않을까? 2016년 5월, 가수 모 씨가 무명 화가에게 헐값을 주며 그림을 대신 그리게 한 사건이 있었다. 진중권 씨 같은 평론가는 “대신 작업을 시켜 그림을 완성했어도 아이디어를 제공한 자가 진정한 창작자이며 이런 게 현대미술”이라면서 그 가수는 무죄 라고 했다. 법원 판결도 1심은 유죄, 2심은 무죄로 결론이 났다. 이 사건의 핵심은 누가 아이디어를 대고 누가 그림을 그렸느냐가 아니다. 나는 그 그림이 현대미술인지 아닌지에는 관심이 없다. 화가 겸 가수인 유명인이 후배 송 모 화가를 어떻게 대했느냐만 관심이 있다.
유명인 모 씨의 진짜 잘못은 대작시킨 데 있지 않다. 후배이자 화가인 송 씨의 존엄을 훼손한 데 있다. 송 씨는 미술을 전공한 화가였다. 인터뷰 동영상을 보면 그는 “돈 액수에는 관심 없
고 주는 대로 받았다. 그 앞에서 돈을 세지도 않았다. 나는 장사꾼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다만, 그는 수입이 없는 배고픈 화가라 대작 작업을 했을 뿐이다. 유명인 모 씨는 송 모 씨 에게 그림 한 점에 10만 원을 주고 300점을 그리게 한 뒤 하나당 평균 800만 원에 팔았다. 만약 그가 후배에게 편당 50만 원쯤 주 고 “이것밖에 주지 못해 미안하다, 후배야”라고 했다면 어땠을 까? 송 씨는 그림 한 편당 10만 원 또는 그 이하의 수고비를 받았 다고 한다. 어떨 때는 17점을 그려주고 150만 원도 받았는데 “그림값을 좀 더 달라”고 하면 선배인 유명인이 “요즘 택시 값이 얼만 줄 아느냐? 까분다”면서 물건을 집어던지려 한 적도 있었단다. 송 화백의 존엄은 무시당했고 그 때문에 그는 상처받았다. 이 작은 상처 하나로 대작 사건은 시작한다. 그 시작은 비록 미약한 찰과상이나, 그 끝은 창대한 폭로가 된다.
--- 「돈이 아니라 존엄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