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가 죽었다. 나는 그때 고작 네 살이었다. 슬픔의 블랙홀에 빠진 엄마는 아빠 이름을 놓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자기가 아빠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듣기 위해 내 이름을 바꿨다. 결국 엄마는 서류 문제도 처리하여 공식적으로 내 이름을 바꿨다. 그래서 내가 태어난 한참 뒤에, 여자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빠 이름을 물려받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드루 로빈 솔로’가 되었다. 때로 티티로 불리는. 에멧 크레인은 그때 또는 그 이후로 나를 언제나 로빈이라고 불러 준 내 인생의 단 한 사람이다. --- p.18
털이 덥수룩한 분홍 카펫에 앉아 아빠의 공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거의 날마다 읽었다. 나를 세차게 뒤흔들거나 깜짝 놀라게 한 부분이 있었는지는 말하기 애매하다. 전혀 몰랐던 사람에 대해 알아 갈 때에는 하나하나가 놀라움 그 자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말할 수 있다. 그날 오후, 어떤 문장이 내 가슴에 깃털처럼 살포시 내려앉았기에. 조금은 쓰라린 울렁거림을 멈추기 위해 왜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는지.
-두려운 점 : 우리 티티가 하늘 나는 법을 배우는 모습은 결코 볼 수 없으리라는 것.--- pp.21-22
스우지 아줌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아, 티티, 중학교는 신기한 생명체들이 사는 이상한 나라란다. 대학에 갈 때까지는 숨죽이고 조심조심 얌전히 지내는 게 최선이야.”
이 말은 이미 내가 살고 있는 모습을 훌륭히 정리한 표현이다. 기다려 보기. 정확히 뭘 기다리는지는 몰라도. 내가 아는 건 내겐 아무 일도, 중요하게 꼽을 만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엄마에게는 치즈가 중요하고, 닉에게는 파도타기가 중요했지만 내게는 그처럼 중요한 것이 없었다. 나는 내 삶이 시작하기를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고 보니, 숨죽일 날이 오래 남은 것도 아니었다. --- p.18
자주는 아니지만 아빠를 떠올릴 때 그 사진이 생각나는 건 아니었다. 대신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양철맨이 떠올랐다. 심장은 아예 없고, 삐걱거리는 껍데기만 남은 남자. 그러다가 나는 아빠의 공책을 발견했고, 아빠는 서서히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 pp.74-75
“나는 에멧이야.”
남자아이가 이렇게 말하고는 손을 쑥 내밀었다. 내가 그 손을 잡자 허밍이 남자애 팔을 따라 기어 내려오더니 내 팔 위를 달려 올라갔다.
“에멧 크레인.” --- p.66
에멧은 왜 도망쳤을까? 왜 인사도 안 했을까? 어디로 갔을까? 뭔가 일이 잘못된 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나한테 친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우정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걸까? --- p.151
기다리기를 잘했다. 그날 밤 집에 와서 내 방으로 올라가 방문을 닫고 종이학을 펼쳐 에멧이 쓴 걸 읽은 순간,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네 친구가 되고 싶어. 그런데 방법을 몰라서 두려워.’
나는 울었다. 또 울었다.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다. 에멧이 쓴 쪽지와 쪽지에 담긴 의미 때문만이 아니라, 허리케인 같은 감정이 마음속을 온통 휘저었기 때문이다. 나는 닉과 종잇장처럼 납작해져 있던 병원 이불 때문에 울었다. 카드 한 벌 개수와도 같은 삶처럼, 1년이 52주인 것처럼, 52장짜리 아빠의 공책 때문에 울었다. 엄마와 기다란 계산서 같은 엄마의 걱정거리 때문에 울었다. 내게서 엄마를 태우고 떠나는 은색 차 때문에 울었다.--- pp.164-167
얘가 미쳤을까? 숲 속 온천지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는 에멧이, 알래스카에서 로렐라이가 기다리고 있으니 꼭 찾으리라고 믿는 핀보다 더 미쳤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그날 해변에 가지 않고 가게에 일하러 갔더라면 닉이 베스파를 타다 나무를 들이받는 일은 없었으리라는 생각보다 더 미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내와 코흘리개 아이가 있고 빨간 푸맨추 수염을 기른 서른넷의 남자가 삶이 끝나 가고 있는 심장을 가진 채, 아직 못다 한 일이 있노라고 공책에 죄 목록으로 써 내려간 것보다 더 미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도 너랑 갈래.”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말했다. 조심성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 안 그런가? 두근두근 뛰는 심장이 갑작스레 이끄는 대로 따르다니.
“너랑 같이 그 샘물을 찾아갈래.”--- pp.225-226
나는 닉을 꼭 안았다.
“고마워.” “뭐가?”
나는 닉의 미소를 마음에 새겼다. 바다 빛깔의 초록 눈을, 헝클어진 금발을, 나를 염려하는 진심 어린 시선을.
“아름다운 닉으로 있어 줘서.”--- pp.235-236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잘 들어 줘. 나는 다시 돌아올 거야. 하지만 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괜찮아. 가서 너 나름대로 또 다른 삶을 살아도 괜찮아. 너는 훌륭한 쥐야. 친절한 쥐야. 조그마한 철사 우리 안보다 더 넓은 세계를 발견하면 더 행복한 쥐가 될지도 몰라.”
나는 에멧의 팔을 잡고 버스 터미널 입구 쪽으로 끌었다. 우리가 놀던 대로 허밍이 마카다미아씨를 가지고 돌아오는지 돌아보지 않았다. 내게 돌아오고 있다면 이 사이로 마카다미아씨를 꽉 물고 있을 텐데.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언젠가 이 순간을 떠올릴 때, 허밍이 마카다미아씨를 주워서는 길게 자란 풀 사이로 행복하게 멀리멀리 달려가는 모습을 그릴 수 있도록. --- p.253
이번 일이 그동안 겪은 일 중에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에멧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전설이 진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고. 이미 나는 뛰어내린 셈이라고. 나는 모든 걸 무릅썼고, 살아 있다고 느낀다고. 이 한밤중에 에멧과 함께 어두운 버스 안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포기하고 희생을 치른 그 모든 게 가치롭다는 사실을. --- p.255
“고마워. 백만 번 고마워.” 에멧은 다른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네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내가 말했다.
“잊지 마. 꽉 잡아.”
에멧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잠시 서 있었다. 서로의 손을 꽉 잡은 채. 에멧은 집중하고 있었다. 기도하고 있었다. 바라고 있었다. 꿈꾸고 있었다. 에멧은 기적을 간절히 구하고 있었다. 나도 눈을 감았다. --- p.279
기적을 더 이상 믿지 않겠다고 생각하던 나날이 있었다. 기적을 믿기에는 내가 너무 커 버렸다고 믿었던 순간이. 바로 그 순간,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우편함을 살펴보다가 에멧이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보낸 사람 주소는 없었지만, 편지를 열자마자 에멧이 보낸 편지임을 알았다. 나는 봉투에 손을 넣고 완벽하게 접힌 종이학을 꺼냈다.
--- pp.287-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