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 군사사 연구가 중요한 이유
한국 군사사에서 정조대와 고종대 사이의 극적 차이와 간극은, 조선 후기의 군사적 발전과 변화를 서구의 기준이 아니라 당대의 맥락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선 후기 군사 분야의 여러 성취와 한계를 전체 사회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독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성취의 정점이자 단절의 시초가 되는 정조대 군사사는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이자 실마리가 된다.
--- 「머리말, 정조의 군사적 기획과 당대 사회」 중에서
대청 관계에 냉정한 태도로 임하다
정조가 이처럼 대청 사대에 진력한 배경에는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 청의 안정이 곧 조선의 안위와 연동된다는 무시할 수 없는 현실 또한 잠재해 있었다. 이미 영조대부터 청과 조선의 안보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군신의 발언이 자주 보인다. 뿐만 아니라, 강포하고 미개한 몽골이나 준가르부보다는 차라리 청이 낫다는 냉정한 판단도 하고 있었다. 정조와 그의 신료들 역시 영조와 생각이 다르지 않았다. 강성한 몽골이 잠재적 위험이라고 관성적으로 인식했지만, 그렇다고 단기간 내에 청이 몰락할 거라고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자신들이 목도한 건륭제의 개인적 능력에 대한 믿음도 깔려 있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리적 형세가 임진왜란과 같은 일본의 전면적 침략을 제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였을 뿐, 청에 대한 특별한 경계심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 「1부, 정조의 대외 인식과 외교」 중에서
대명의리를 실천해야만 했던 정조
인조 이후 조선의 국왕들은 무엇보다도 1637년 조선을 대표하여 대명의리를 부정한 인조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대명 의리에 포함된 중화적 가치가 조선 내에서 동요되지 않는 한, 더욱 열과 성을 다하여 대명의리를 예(禮)와 사(史)의 차원에서 실천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다. 정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들은 광해군과 같이 배리(背理) 또는 배교(背敎)의 차원에서 축출당했거나 지지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 「1부, 정조의 대외 인식과 외교」 중에서
진법을 통해 선왕의 제도를 이어받다
아울러 위의 사료에서 보이는 것처럼 정조는 병서 편찬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접한 진법을 실제 자신의 군사로 하여금 자주 습진하게 하였다. 이러한 훈련은 물론 군사 기술의 습득이라는 측면에서 볼 수도 있지만, 과연 이렇게 복잡한 진법이 절체절명의 실전에서 그대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지 않다. …… 정조의 입장에서 보면 오위진법의 시연은 다름 아닌 선왕의 고제,
즉 고례를 실천한다는 측면에서 효과가 있었다. 더욱이 이것이 능행(陵幸)을 오가는 도중에 시행되었다는 점은 더욱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정조 왕권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군사력은 이러한 습진의 형태로 시각화되어 연도(沿道)의 사민(士民)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 「2부, 정조의 군제 개혁과 화성 방어 체제 정비」 중에서
정조의 ‘이순신론’
정조는 왜 그(이순신)를 문무겸전의 상징적 인물로 지목하였던 것일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의 비루하지 않았던 행적과 인품이다. 그는 벼슬을 탐내어 고위 관료에게 줄을 대거나 청탁하지 않았고, 상관의 명령이라도 부당하고 불의한 것이면 사리를 따지며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무장들은 용력 (勇力) 이 세거나 무공만 높을 뿐 염치없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깨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정치적 필요에 따라 관행적으로 주는 선물인 부채 등을 중앙의 고관에게 상납하는 융통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 「3부, 정조의 문·무 인식과 대책」 중에서
정조의 상무 정책을 청 황제 강희제와 비교하면?
반농·반목의 만주족 전통에서 성장한 강희제의 군사 지식은 정조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었다. 기사에 능숙하였고 총포를 쏘는 것도 꺼리지 않았으며, 작전은 물론 행군·보급·통신·기상 관측에 대한 지식도 수준급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준가르부의 수장 갈단을 격파하기 위한 원정길에 올라 굶주림에 시달리며 사막을 행군할 정도의 실전형 군주였다. 정지된 과녁을 겨냥한 정조의 활쏘기와 달리 강희제의 활은 살아 움직이는 맹수의 몸통에 꽂히곤 하였다. 여기에서 희열을 느끼는 강희제의 심성은 만물을 낳아 기르는 천지(天地)의 인(仁)을 본받고자 했던 군사(君師) 정조의 마음가짐과는 확실히 달랐을 것이다. 요컨대 정조의 상무 정책 관련 활동은 철저히 유교적 전통 내에서 군주에게 규범적으로 요청되는 의식을 모범적으로 행한 것이었다.
--- 「3부, 정조의 문·무 인식과 대책」 중에서
유교적 전통 안에서 문과 무의 겸전을 지향하다
정조의 문무겸전론은 어디까지나 유교적 전통 안에 포섭되는 이념이었으며, 그의 군사 개혁도 근대적 군대를 지향하거나 국방력의 획기적 강화를 위해 추진되었다기보다 고제와 고례를 지향한 상징적 조치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도는 당대 맥락에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정책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요컨대 군사 분야를 포함한 그의 전방위적 개혁은 군사(君師)를 자임한 철인군주(哲人君主) 정조가 자신의 소명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이행한 결과물이었다.
--- 「맺음말, 예와 통으로 문무일체의 이상을 추구한 국왕, 정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