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예교정치를 지향한 까닭
정조는 후손에게 길이 복되는 정치를 꿈꾸었다. 단기적 효과를 내는 시책보다 ‘나라가 영구히 유지될 수 있는 방도’를 찾고자 했다. 국방과 민생, 외교 등 시급한 현안들을 처리하고 경제적 풍요, 정치적 안정, 사회적 화합을 이끌어낼 정책과 제도도 마련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에게 더불어 풍요롭고자 하고 안정과 화합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사회의 근본적 개선과 항구적 발전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길러낼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실행하고자 했다. 사람들의 내면에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는 이런 마음을 잘 길러낼 수 있게 제도를 마련하고 문화를 구축하려는 정치가 예교정치이다. 이때 정치는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교육과 다름없었고, 왕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육자일 수밖에 없었다. 정조가 보기에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정치 비법 역시 여기에 있었다.
--- 「책을 펴내며」 중에서
만민을 가르치면 책임 있는 실천으로 이끌 수 있다
정조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도덕적 능력은 하늘이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준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타고난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을 가르쳐 자율적인 도덕주체로 거듭나게 하면, 그들 각자가 자발적으로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본심에 토대한 책임 있는 실천들을 해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국가가 행정력을 써서 일일이 개입하고 간섭할 필요도 없고 형벌로 위협하고 감시하지 않아도 집집마다 편안하고 다툼 없이 안정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례, 향례, 학교례 등 정부 이외의 영역에서의 예제에 더 힘을 기울이고 실천해야 했다.
--- 「머리말, 정조의 조선 예제 인식과 변통론」 중에서
“왕도 공도를 따라야 한다.”
추숭(추왕)의 전례를 행한다는 것은 천하를 위해 정한 종통 계승의 원칙〔不貳本〕을 사사로운 정(아버지에 대한 애통함)에 이끌려 바꾼다는 것이다. 이는 정조가 스스로 공사를 재량할 수 있는 정치가가 아님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일이었다. 정조는 영조에 대한 의리 때문에 추숭에 반대했던 것이 아니다. ‘왕도 공도를 따라야 한다.’는 정치적 심성이 주류인 상황에서, 공공의 대원칙을 사적으로 침해하면 군주의 정당성이 근본적으로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영조와의 약속은 이 원칙을 아버지에 대한 친친의 정때문에 훼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이를 어기는 것은 권력을 잡고 복수를 하기 위해 속이고 기만했다는 명백한 선언일 수밖에 없었다.
--- 「1부, 가례: 정조의 제한적 가례 인식과 효치론」 중에서
정조가 관례와 혼례를 《향례합편》에 넣은 문제의식
조선에서도 조선의 실정에 맞게 가례서를 만들며 신유학적 가족 모델을 정착시키고자 노력해왔다. 상례와 제례는 과도할 정도로 행해졌지만, 정작 관례와 혼례는 예제대로 제대로 실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신유학적 문제의식에 따라 가정을 교육의 첫 장소로 삼고, 가정에서 배운 공공적인 마음을 사회로 확장해나가길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큰 문제로 여겨졌을 것이다. 상례와 제례를 통해 공고히 하려 했던 소종주의의 친족 제도는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울타리를 마련해준다는 의의를 넘어서 일부 특권층의 위세를 분식하는 대종주의의 가문으로 발전함에 따라 그 본래의 의의를 오히려 상실 해가고 있었다. …… 신유학적 가례 제도의 본의를 되살려 ‘가’가 만민 교화의 첫 장소로 기능할 수 있도록 되돌려야 했다. 정조가 풍속 교화를 돕기 위해 《향례합편》을 편찬하면서 이미 과도하게 실행되고 있는 상례와 제례 대신 관례와 혼례를 넣도록 한 문제의식은 이 지점에 있었다.
--- 「2부, 향례: 지방의 자발적 도덕화에 대한 기대와 《향례합편》」 중에서
태학 유생들과 함께 밥을 먹다
1783년 8월에도 춘당대에 나아가 태학 유생을 불러 강을 하고 나서 식당을 베풀었다. 정조는 “정자 (程子)는 승사(僧舍)에 모여 앉아 먹는 것을 보고도 삼대의 위의가 있다고 감탄했으니, 대학의 식당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북을 쳐서 나아가고 나이 순서로 앉는 것이 질서정연하여 볼 만하기에 내 기꺼이 유생들과 함께하는 것이다. 나물 반찬이 비록 초라하나 내주(內廚)의 진수성찬보다 나으니, 경들은 각각 배불리 먹도록 하라.”고 하여, 북을 쳐서 나아가고 나이순으로 앉는 태학의 예제에서 성대했던 옛 시절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기에 식당에서 기꺼이 유생들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식당례는 꼭 태학 유생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일반 사회의 각종 차별 관행에서 벗어나 나이에 따라 존중하고 양보하는 새로운 문화를 익히는 것은, 모든 학교의 학생들에게 필요한가르침이었다.
--- 「3부, 학례: 공교육 정상화의 노력과 태학 예제의 정비」 중에서
정조가 바람직하게 여긴 신하의 ‘분의(分義)’
정조는 송시열이 ‘춘추의리’로 효종과 마음을 같이하였던 사실을 거론하며 그를 효종 묘정에 배향하지 않은 일을 조정의 궐전이라 평가했다. 효종과 송시열이 ‘의합(義合)’ 즉 의리로 서로를 인정한 군신 관계였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정조는 주자와 송시열을 시대를 뛰어넘어 서로 이은 듯 마음을 같이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는데, 송시열이 주자보다 나은 점은 함께 의리를 도모할 군주를 만났다는 사실이라고 하기도 했다. 의리가 있다면, 마음을 다해 따르며 잡목이 우거진 길을 개척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정조가 늘 신하들에게 요구한 바였다. 이것이 바로 정조가 말한 신하의 ‘분의(分義)’였고, 그 ‘분의’가 바로 정조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문신의 충이었다.
--- 「4부, 방례: 국가례의 시행과 왕조 이상의 설득」 중에서
오랑캐를 이기는 진정한 방법
천자와 제후의 신뢰가 사라지고 힘으로 위협하여 굴복시키는 패권적 세계 속에서도 정조는 이이제이의 방법을 말하지 않았다. 거짓으로 속이고 모면하는 예제를 쓰는 것은 오랑캐를 이기기 위해 진짜 오랑캐가 되는 방법이었다. 오랑캐에게 이긴 후의 세상이 다시 오랑캐의 세계라는 것만큼 허무한 일은 없다. 천하 만민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를 만들고자 했던 고대 성왕의 인의의 정치와 인의의 국제 정치(사대교린)의 방법을 조선 땅에서 충신 독경하게 보존하는 것, 자격이 없는 상대에게도 충신하고 독경하게 대함으로써 자신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정당한 천자가 사라진 시대에 제후왕 정조가 선택한 천하례의 실천 방법이자 복수의 방법이었다.
--- 「5부, 천하례: 대명의리와 정조의 사대예설」 중에서
예교 정치를 통해 조선의 대변통을 꿈꾸다
정조는 조선의 대변통을 꿈꾼 개혁군주였다. 문제는 개혁의 방향성과 기준이었다. 정조는 왕과 몇몇 사람의 노력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보았다. 만민에게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길러주고 가르쳐서 자율적인 도덕주체로 변화시키고, 도덕감정에 맞는 자발적 실천들이 누적되어야 선정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던 주자학적 예교론에 공감했다. 그러면서도 앞서의 예제를 고수하지 않고 가례, 향례, 학교례, 국가례, 천하례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예제변통을 시도했다. …… 정조대 예교의 정치를 어떤 역사적 자산으로 삼을 것인지는 우리 시대가 풀어야 할 과제이다.
--- 「맺음말, 만민의 마음을 기르는 제도와 정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