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살옥 심리에 밤새워가며 정성을 쏟았던 이유
조선의 형정은 교화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판결문을 통해 덕화의 의지를 천명했을 뿐 아니라 관료들의 형정에 영향을 미치고자 했으며, 나아가 백성들의 행동을 바루고자 했다. …… 정조는 살옥사건을 심리하면서 천하의 공론, 즉 물정에 부합하는 최선의 판결을 얻음으로써 당대의 인정세태에 호응하고자 했다. 물정에 부합하는 시중의 판결을 내리는 순간, 그 재판 결과는 민심에 공평한 법 감정으로 수용될 것이요 원통함은 저절로 사라질 터였다. 정조가 살옥 심리에 밤새워가며 정성을 쏟았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 「머리말, ‘권선징악’의 통치론」 중에서
《무원록》을 근거로 살옥 심리를 펴다
정조는 《무원록》을 통해 사건의 내막과 실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호생지덕의 정치를 펼치고자 했다. 그렇다고 처벌받아 마땅한 자를 쉽게 용서하거나 감형하지는 않았다. 전주 양시돌 사건의 경우, 정조는 《무원록》의 지식을 동원해 살해 후 범행을 은폐하려 한 악행을 간파해냈다. 양시돌이 한설운금과 술을 마시고 다투다가 그날 사망했는데, 목을 매 자살한 사건으로 보고되었다. 정조는 시장을 살펴본 후 자액(自縊)이 될 수 없다면서 사건의 재조사를 명했다. 정조는 사망 후에 목을 매달아 자살한 것처럼 위장한 경우 액흔이 흰 빛을 띤다는 《무원록》의 조항을 근거로 삼았다. 검시 과정에서 이를 살피지 않았던 지방관의 견책은 당연했다.
--- 「1부, 조선 형정론의 전통과 ‘덕주형보’」 중에서
차라리 관대하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지나쳐서는 안 된다
형벌은 불가피하지만 될 수 있으면 처벌을 가볍게 하여 호생지덕을 펼쳐야 했다. 정조는 이른바 초옥(楚獄)의 고사를 경계로 삼았다. 초왕(楚王)의 감옥에 사람이 넘쳤다는 일화는 중국 한대 명제(明帝)의 동생 초왕이 모반한 뒤 이와 연관되어 무고하게 죽은 사람이 많았던 일을 비판한 것이다. 왕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이를 기쁘게 생각한 나머지 나라가 망했다는 것이다. 정조는 형정은 차라리 관대하다고 비판받을지언정 지나쳐서는 안 되고, 가볍게 처벌하는 잘못을 저지를지언정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조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누군가가 왕의 의지가 나약하다고 비판하자, 정조는 엄형을 일삼다가 나라가 망한 초옥의 고사를 지적한 것이다.
--- 「2부, 《일득록》을 통해 본 정조의 법치」 중에서
광자와 의협을 칭송한 정조의 교화론
공정한 사회는 불의와 부도덕에 침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정조는 함묵과 교언영색을 비판하는 동시에 진정한 광자와 의협의 용기를 칭송했다. 부당함에 과감히 맞설 수 있는 광자들, 이들이야말로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다. …… 그리고 천금을 주고라도 광자의 용기를 칭찬해야 한다던 다산의 생각은, 명덕(明德)을 부여받은 그 누구라도 불의와 부도덕을 비판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정조의 교화론에 바탕했다. 정조의 통치 기획, 다시 말해 명예를 아는 사람들과 진정한 광자들에 의해 말세(末世)의 조선이 일신(日新)할 것이라는 기대는 소민들에 대한 교화, 인간다움의 도리를 강조한 형정 운영과 그 맥락이 잇닿아 있었다.
--- 「3부, 정조의 명예론과 《심리록》」 중에서
가짜를 경계한 정약용의 형정론
특히 인륜을 가장한 ‘거짓 행위’를 세밀하게 살펴서 반드시 응징해야 했다. 사람을 죽이고도 거짓으로 형제의 우애를 앞세우거나, 남편의 복수였다고 주장하고, 부모를 위한 효도였다고 강조하는 이들의 ‘위선’을 처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산은 도덕교화를 강조하면 역설적으로 인륜을 가장한 위선들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는 성리학 사회의 태생적인 모순이자 불가피한 현상이었지만, 위선과 위광 등 가짜를 제대로 변별하지 못할 경우 심각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인륜의 도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생겨난 역효과를 관리하지 못한다면, 조선 사회는 인간 본성을 신뢰하지 못하고 붕괴할 수 있었다. 다산은 조선 후기의 진짜·가짜 논쟁, 즉 위광과 위선에 대한 관리야말로 형정 운용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 「4부, 정조 이후의 형정론」 중에서
백성들의 신뢰를 받은 정조의 형정
정조가 살옥 심리를 숙고한 배경에는 사회가 ‘부당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느낌’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의 사건(혹은 사태)을 둘러싼 고유한 맥락과 사회적 가치들이 무시되었을 때 그 결과는 명확했다. 때문에 정조는 매번 심리 때마다 법의 인율에 앞서 사건의 진실과 고유한 맥락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통념을 깊이 ‘고려’했다. 물정 (物情) 으로 불릴 ‘시대의 (법)감정’에 호응하려면 인정투쟁과 그 바탕의 욕망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개개의 사건을 심리하면서 어떤 이에게 주어져야 할 ‘적절한 존중’, 다시 말해 사정을 세심하게 배려한다는 사실로 인해 백성들은 ‘형정을 신뢰’했을 뿐 아니라 ‘명예 추구의 의지’를 키울 수 있었다.
--- 「맺음말, 정조의 ‘공평론’」 중에서